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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잡지보다 눈 떴죠..고대 중퇴까지하고 택한 직업

조회수 2020. 9. 24. 16: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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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서 패션 잡지 보던 철학도가 돈 대신 택한 이 직업은?

남들과 똑같은 패션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개성을 표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찾는 게 소위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이다. 독특한 외형과 기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디자이너들은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거대 의류회사에서 근무한다. 반면 자기 브랜드를 운영하는 디자이너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고유 컨셉트를 제품화 해 소수의 매니아 고객에게 판매한다. 이들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춘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의 가격은 일반적인 옷보다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다.


일찍이 패션 산업이 발달한 유럽이나 미국은 디자이너 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대부분 패션쇼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제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하지만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시장은 규모를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불모지에 가깝다. ‘디자이너 브랜드 제품은 외국 디자이너의 제품을 카피한 게 많고, 가격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제품만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전용 매장에서 비싼 값에 팔릴 뿐이다. 이 때문에 자기 브랜드를 꿈꾸는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경제적 이유로 꿈을 포기한다.

출처: jobsN
아이소플럭스 이강일 디자이너

영국 런던에서 패션을 공부한 이강일(36) 디자이너는 6년째 자기 브랜드 ‘아이소플럭스(ISOFLX)’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 철학과에 다니던 그는 군대에서 패션에 눈을 뜬 후 학교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다. 건축과 산업 디자인이 주로 추구하는 기능성을 패션에 덧입혀 ‘합리주의적’ 디자인을 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이 디자이너는 “우리나라에서 자기 주관대로 옷을 만드는 브랜드를 운영한다면 ‘경쟁이 치열하다’는 차원을 넘어 성장 가능성 자체가 매우 희박하다”고 말한다. 외국은 디자이너의 가능성을 믿고 선뜻 지갑을 여는 바이어 마켓이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한국은 재고 부담을 오롯이 디자이너가 떠안아야 해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자기 브랜드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강동구에 있는 아이소플럭스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아이소플럭스는 어떤 브랜드인가.
“아이소플럭스는 실용주의적 기능성을 강조한 패션 제품을 디자인하는 브랜드입니다. 전통적으로 패션 디자인은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작업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기존의 질서를 깨야합니다. 그런데 과도하게 새로운 것을 좇다보면 점차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패션쇼에 나오는 옷을 보면 ‘보통사람이 어떻게 저런 옷을 입지’란 의문이 드는 게 많습니다. 반면 건축 디자인이나 산업 디자인은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심미성보다는 기능성을 강조합니다. 아이소플럭스는 패션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산업 디자인의 방법론을 추구하는 브랜드입니다. ‘표리일치’(表裏一致·겉과 속이 같음)하는 디자인이 제가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제품의 존재 이유와 표면적인 모습이 일치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아이패드가 직사각형인데는 ‘보기 좋다’는 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동그랗거나 삼각형일때보다 ‘쓰기 좋기’ 때문입니다. 패션 제품을 디자인할때도 이러한 접근방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합리적이면서도 세련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출처: 아이소플럭스 제공
이강일 디자이너가 만든 파카. 수납 능력을 극대화 해 기능성을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제품을 디자인했나.
“창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파카’를 모토로 겨울철에 입는 파카를 주로 디자인했습니다. 보온성이라는 파카의 기본적인 조건을 훌륭히 만족시키면서 일상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들, 예를 들어 휴대폰과 휴대폰 충전기, 태블릿 PC, 노트, 필기구 등을 모두 파카 안에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제품이었습니다. 패션 스쿨에 다닐 때부터 오랜시간 구상해 온 제품 디자인으로, 어떤 제품과 비교했을 때도 떨어지지 않는 파카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재를 최고급으로만 사용했습니다. 이밖에 사용자의 편의성을 극대화 한 가방과 모자를 디자인했습니다.


최근에는 실용성이 극대화 된 ‘택티컬 웨어’(tactical wear) 제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실용성이 극대화 된 패션 제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군복과 요대 같은 군 장비입니다. 색깔과 디자인 모두 실용성에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패션업계에서는 보통 베트남 전쟁때의 군복을 ‘밀리터리 웨어’라고 하고 그 이후 이라크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쓰였던 군복은 ‘택티컬 웨어’라고 합니다. 기존 패션과는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지만, 최근 외국에서는 주목을 받고 있는 패션 트렌드입니다. 현재 택티컬 웨어가 추구하는 단단한 내구성, 편의성 등을 접목한 백팩과 바지 등을 디자인하고 있고, 올해 안에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처: 아이소플럭스 제공
자신이 만든 파카를 입고 있는 이강일 디자이너

-아이소플럭스란 이름이 지닌 뜻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남긴 말인 ‘Everything is in a state of flux’에서 영감을 얻은 이름입니다. 오늘 내가 발을 담근 강물은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닌 것처럼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새롭고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습니다.”


-명문대 철학과를 다니다 패션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중퇴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인문·사회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공각기동대 같은 공상 판타지 계열의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했고요. 그래서 철학과에 들어갔는데 군대에서 패션에 눈을 떴습니다. 원래 군대에 있을 때 못하는 것에 대한 갈망이 강하잖아요. 멋진 옷을 봐도 입을 수 없으니까 더욱 강렬히 빠지는 것이죠. 의무 경찰로 복무했는데 쉬는 시간에 인터넷이나 패션 잡지를 통해 ‘디올 옴므’ 제품을 보며 패션 디자인에 대한 꿈이 생겼습니다. 전역 후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가 고민을 했을 때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론은 패션 디자인이었어요. 학교를 관두고 영국 런던에 있는 센트럴 세인트마틴 예술학교에 진학해 4년 동안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세계 3대 패션 스쿨 중에 하나로 꼽히는 곳입니다.”


-우리나라의 패션 교육과는 무슨 차이가 있나.
“우리나라의 패션 교육은 ‘어떻게 디자인을 해야하는지’, ‘어떤 생산 과정을 거쳐 옷이 탄생하는지’등을 선생님이 가르치고 학생은 배우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세인트마틴는 모든 수업이 프로젝트 과제로만 이뤄져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열 몇가지 주제를 던져주면 학생은 자기가 선택한 주제에 맞는 티셔츠를 알아서 제작해오는 것이예요. 결과물이 얼마나 예쁜지, 대중적인지, 상품성이 있는지는 평가대상이 아닙니다. 옷을 만들기 전 사전 조사를 어떻게 했는지, 어떤 컨셉을 무슨 이유로 잡았는지,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쳤는지 등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시켜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입니다.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죠.”

출처: 아이소플럭스 제공
이강일 디자이너가 제작한 파카와 가방

-디자이너 브랜드를 운영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자기 브랜드를 운영하는 거의 모든 디자이너들은 사업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적정한 수준의 돈을 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단 대량 생산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가격이 비싸서 판매량이 낮죠. 만약 제가 영국에서 런칭을 했다면 디자이너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본적인 루트가 있습니다. 우선 샘플 제품을 만들고 바이어들이 모이는 마켓으로 가 쇼케이스를 열고 선주문을 받습니다. 실험적인 상품이더라도 ‘우리 회사가 소비자들에게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바이어들이 지갑을 여는 것입니다. 모험을 무릅쓰고 패션 디자이너들을 밀어주려는 풍토가 있습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선 자신이 재고 부담의 위험을 지지 않기 때문에 창의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경제적 환경이 조성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바이어가 선매입하는 문화가 거의 없습니다. 편집샵이건 백화점이건 매장 부지를 빌려주고 제품이 팔리면 수수료를 떼어가는 식으로 상품 판매가 이뤄집니다. 이런 시스템 하에서는 재고 부담을 디자이너가 오롯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브랜드를 갖고 있는 상당수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대신 잘 팔릴만한 제품만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소플럭스를 운영하는 이유는.
“제가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저 혼자 먹고 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는 됩니다. 만약 제가 결혼을 해서 부양해야할 가족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이 없습니다. 돈 보다는 제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을 연구하고, 이를 제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에서 엄청난 희열을 느낍니다. 제 로망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경제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최소 공장 생산량을 걱정없이 판매할 수 있을 정도의 레벨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재고 부담없이 제가 하고 싶어하는 디자인을 연구하며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물건을 만들어서 판다는 전통적인 패션 브랜드의 관점에서 벗어나 패션에 관한 종합적인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현재 디자인에 관련된 책을 쓰고 있습니다. 패션 디자인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디자인을 당시의 순수 미술, 산업 디자인과 비교해가며 시대상으로 엮어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잘 팔리지만 뻔한 물건을 만들기 보단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새로운 자극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제품이나 영상, 사진, 책 등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글 jobsN 이준우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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