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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게 팔수도 있는데..3개월 애지중지 작품을 깨는 사연

조회수 2020. 9. 24. 16: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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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쇠망치를 인정사정 없이 휘두르며 도자기 깨는 이유
[한국의 장인] ⑦ 서광수 도자기 명장

‘파삭·퍽·쨍그랑’


경기도 이천의 한도요. 서광수(72) 도자기 명장은 원수라도 만난 듯 쇠망치를 인정사정 없이 휘둘렀다. 그때마다 아무런 흠도 없어 보이는 달항아리·연적·주발 등 이름조차 생소한 자기들이 터져 나갔다. “선생님 그 아까운 걸 왜 깨세요. 깨지 마세요. 차라리 저를 주세요.”


서 명장은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 외부로 내보내지 않는다. 그의 대표 작품인 달항아리 하나에 1000만원은 기본이다. 만들기 힘든 대형 달항아리는 1억원에 육박한다. 불황으로 수요가 많지 않지만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 석 자를 알 정도로 유명하다.

출처: jobsN
서광수 도자기 명장.

서 명장은 도자기의 본고장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올해로 58년째다. 강산이 여섯 번 변했다.


그는 ‘백자 대가’로 불리는 지순택 선생에게 물레 성형, 조각은 물론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불가마에 넣어 굽는 소성(燒成) 등 전통 도자기 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전수받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 말고는 한 번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1986년에는 자신의 호를 딴 ‘한도(韓陶)요’를 세웠다. 그리고 2003년 도자기 공예 부문 대한민국 명장에 올랐다. 그는 “기다림과 끈기, 자신에 대한 믿음 세 가지를 지켜 60년 가까이 도자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jobsN

서광수 명장은 한국에서도 유명하지만 일본에서도 꽤나 이름이 알려졌다. 1990년대에 일본에 진출하면서 한 해 2억원쯤 벌어들였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 최소 10억원이 넘는 돈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불황 탓에 일본 고객이 급격히 줄었다. “지금은 한도요를 운영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전통방식으로 도자기를 굽는다. 그는 "도자기는 내 인생 이상이다. 항상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을 불사를 것이다”고 말했다. 아무리 커도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를 아낌없이 깨는 것으로 유명한 서광수 명장을 만나 도자기와 함께 한 60년 인생에 대해 들었다.

jobsN

언제부터 도자기 배우기 시작했나.


"먹고살기가 힘들어 1961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자기 공장에 들어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운명이었던 것 같다. 철부지였지만 마냥 어리광이나 부리며 살 수 없었다. 그래도 몸에 익숙해지고 조금씩 기술이 느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남들보다 어린 나이에 흙으로 도자기 형태를 만드는 물레 작업을 할 수 있었다. 밤에도 혼자 호롱불을 켜놓고 물레를 차곤 했다. 올해로 60년 가까이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데, 도자기를 만드는 일이 여전히 재미있다. 이 일을 안 했으면 이렇게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싶다.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이 ‘백자 대가’로 불리는 지순택 선생이라고 들었다. 


"지순택 선생님과 같은 도자기 공장에서 일했다. 선생님이 어린 나이지만 열심히 도자기를 만드는 나를 이쁘게 본 것 같다. 선생님이 1960년 중반 경기도 이천에 고려도요를 세울 때 나를 데리고 갔다. 당시 이천에는 도자기 공장이 별로 없었다. 


1976년까지 고려도요에서 일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물레 성형, 조각은 물론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고 불가마에 넣어 굽는 소성 등 전통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선생님이 지금의 나를 만든 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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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세운 곳에서도 일했다고 들었다.


"고려도요에서 나온 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경기도 광주에 세운 도평요에서 10년 일했다. 이 씨는 나에게 최고 도공 대우를 해주면서 도자기 제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맡겼다. 엄청난 급여를 받았다. 잘나가는 기업에서 일하는 직장인보다 3배가 넘었다.


이후락씨는 도자기를 불가마에 넣어 굽기 전 붓으로 글을 썼다. 그는 성격이 급한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도자기를 만들면서 급한 성격이 조금씩 변했다.


하나의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이 수개월 걸리고, 성공을 담보할 수 없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성격이 차츰 변한 것 같다. 도자기를 구우면 모두 작품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큰 오해다. 100개를 구우면 많아야 50개만 작품 가치가 있다. 적을 때는 30개에 불과할 또 많다. 특히 달항아리는 열 개 구우면 2~3개 나오기가 쉽지 않다.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기다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격이 유해진 것 아닌가 싶다."


좋은 대우를 받았는데 독립해 ‘한도요’를 설립한 이유는.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이름을 걸고 도자기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런데 직접 도요를 경영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전에는 만들기만 하면 됐지만 판매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당시 불가마가 아닌 가스, 전기 가마로 만든 생활 도자기가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장작가마를 고수했던 것도 어려움을 겪은 이유다.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만큼 비쌀 수밖에 없다. 비싸니 잘 팔리지 않았다. 판매 루트를 찾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jobsN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나.


“한국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작품을 사간 고객의 95% 이상 일본인이었다. 매년 일본에서 전시회를 3~4번 열었는데 그때마다 5000만~6000만원씩 벌었다."


전국에 적지 않은 도공들이 있는데 2003년 도자기공예 대한민국 명장으로 지정된 비결은.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면 3개월쯤 걸린다. 흙 거르고, 도자기 모양으로 성형하고, 불가마로 도자기를 구우려면 소나무 장작이 많이 필요하다. 내가 만든 장작 가마에서 한 번에 구을 수 있는 도자기 수량은 100개에 불과하다. 비용이 많이 든다.


나는 아깝지만 색이 이상하거나 조금만 흠이 있으면 도자기를 깨버린다. 3개월 동안 애지중지 만든 도자기를 깰 때 속이 상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내 맘에 들지 않는 작품이 후세에 남겨지길 원하지 않는다.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면 된다. 그리고 자신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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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끈기는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부족한 점이다.


“요즘은 외동이 대세다. 많아야 둘이다. 귀하게 키워 인내심과 지구력이 부족하다. 금방 싫증 내도 부모들도 오냐오냐 들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분야든 끈기와 신념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신념을 고집과 혼동하면 안 된다. 기다림과 끈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60년 가까이 도자기를 만들고 대한민국 명장이 될 수 있었다."


경기가 불황이다. 도자기를 찾는 이들이 예전만 못할 것 같다.


“예전에는 일본인들이 내 작품을 많이 찾았다. 하지만 2000년 이후 일본에서의 판매가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본 고객이 거의 없다. 불경기 탓인지 국내 고객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래서 시작한 게 찻잔, 그릇 등 생활 도자기다. 물론 전통 방식으로 만든다."


가스나 전기 가마를 이용하면 경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통 장작가마를 고집하는 이유는.


“한국 도자기의 멋을 제대로 내기 위해서다. 불가마에 100개의 도자기를 구우면 색이 제 각각이다. 뽀얀 유백색을 내는 한국 도자기 특유의 미를 지닌 작품도 몇 점 건질 수 있다. 이 맛에 전통 가마를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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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가스 가마로 작품을 만들면 백이면 백 모두 똑같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생활 도자기처럼 대량 생산할 때나 적합한 방식이다.


나는 평생 도자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싶다. 도자기는 내 인생이다. 그동안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들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 신념이다."


혼신을 다해도 작품이 안 나올 때도 있고, 경제적으로 힘들 때는 포기하고도 싶었을 것 같다.


“도공을 천직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작품을 만들 때면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진다. 장작가마에서 36시간 이상 구워진 도자기를 꺼낼 때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이 맛에 도자기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특히 좋은 작품을 많이 나오면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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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계획은.


"1961년부터 도자기를 만들었으니 2년 후면 60년이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정확히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60년 기념행사로 이천에 ‘도자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 박물관에 전시할 내가 만든 작품은 물론이고, 다른 도공의 작품과 골동품도 모으고 있다. 그동안 한 것처럼 앞으로도 도자기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글 jobsN 박지환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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