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200명뿐인, 세상에서 제일 짧은 글 짓는 직업입니다

조회수 2020. 9. 25. 11: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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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오피, 카누 등 한번쯤 들어본 제품 이름, 제가 지었습니다"
제품이나 서비스 이름 짓는 직업 ‘브랜드 버벌리스트’
카누, 티오피 등 500여건 프로젝트 진행해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 내야 하는 ‘크리에이터’

“IOC 위원장은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알리면서 제가 만든 슬로건인 ‘패션 커넥티드(Passion Connected)’을 외쳤어요. 가슴이 뭉클했죠. 일을 시작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제가 만든 이름을 공개할 때면 늘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국적 컨설팅 회사인 인터브랜드에서 전무로 일하고 있는 민은정씨는 자신을 소개할 때 쓰는 단어가 따로 있다. 바로 브랜드 버벌리스트(Brand Verbalist). 1994년부터 브랜드 이름과 슬로건을 만드는 버벌리스트로 활동했다. 지금까지 약 500여 건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대표작으로는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인 ‘티오피(T.O.P)’, ‘카누(KANU)’, 서울 중구에 위치한 건물인 ‘서울스퀘어’ 등이 있다. 민은정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름에 제품 특성, 콘셉트 다 담아내


-브랜드 버벌리스트라는 직업이 다소 생소하다. 주로 어떤 일을 하나.


“'언어'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버벌(verbal)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버벌리스트는 발음, 이야기 같은 언어적 요소를 활용해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의 이름을 짓는 사람이다. 기업이 이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면 나는 어떤 이름이 제품의 정체성을 잘 반영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새로우면서 낯설지 않은 이름들을 여러 개 고안한 다음에 고객들이 가장 잘 기억할 만한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고른다.”

출처: 민은정씨 제공
민은정 인터브랜드 전무.

-브랜드는 정확히 무얼 의미하나.


“제품이나 서비스가 갖고 있는 고유한 이름, 상표 등을 말한다. 브랜드는 제품의 정체성이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여러 과정에 걸쳐서 심혈을 기울여 브랜드를 만든다. 또 브랜드 버벌리스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브랜드 제작 과정에 참여한다. 예를 들어서 전략 담당자는 어떤 콘셉트의 브랜드를 시장에 내놓을지 결정하고 브랜드 디자이너는 어떤 스타일의 제품을 출시할지 고려한다. 기업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브랜드를 제품을 홍보하는 마케팅 수단으로 쓴다.”


-작업 과정에 대해서 말해달라.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제품의 콘셉트나 정체성을 파악한다. 이 제품이 어떤 기능을 갖고 있고 어떤 점이 다른 제품들과 다른지 알아본다. 2013년 동서식품이 새로운 커피를 출시했다면서 작업을 요청해 왔다. 관계자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커피’라는 점을 소비자들한테 보여주고 싶다고 하더라. 당시 대부분의 믹스 커피들이 따뜻한 느낌을 주는 브랜드명을 썼다. 그래서 이런 브랜드들과는 다르게 들었을 때 시크하고 차가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콘셉트는 ‘내 손 안의 작은 카페’였다. 그래서 카페(café)와 새로운(new)을 합쳐서 ‘카누(Canew)’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들한테 알파벳을 하나씩 보여줬을 때 뇌에서 반응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알파벳은 ‘K’라고 하더라. 알파벳 ‘씨(C)’를 ‘케이(K)’로 바꿨다. 그렇게 해서 만든 이름이 ‘카누(Kanu)’다."

출처: 카누 광고 유튜브 캡처
민은정 인터브랜드 전무가 '카누'라는 브랜드 명을 직접 지었다.

-브랜드를 만들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염두에 두나. 회사의 이미지, 상품의 기능 등 고려해야 할 요인이 많을 것 같다.


“‘어떻게(How), 왜(why), 무엇(What)’. 이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브랜드를 통해서 주려고 노력한다. 이 제품이 고객들의 삶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해준다. 또 무슨 기능을 갖고 있는지 담아내려고 한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나.


“KB 국민은행의 모바일 금융 서비스인 ‘리브(liiv)’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시 ‘금융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고민 끝에 ‘금융은 곧 삶’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금융 거래가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매순간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은행에 가서 돈을 대출받는 것만이 금융이 아니다. 출근 후 회사에서 커피 한잔을 사 마시고 퇴근 후 집에서 TV 다시 보기를 결제하는 것도 다 금융 활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삶’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리브(live)’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단어를 브랜드명으로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단어 자체가 너무 단순하고 뻔했다. 변화를 주자는 생각에 철자를 ‘리브(liiv)’로 바꿨다. 만들고 나니 ‘i(아이)’ 두 개가 마치 두 사람이 서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브랜드의 콘셉트를 이름에 담았다.”

출처: 유튜브 광고 캡처
국민은행 '리브(Liiv)'의 광고모델인 가수 방탄소년단.

◇세상에서 제일 짧은 글을 짓는 사람


브랜드 버벌리스트는 하는 업무로 따지자면 이들은 제품이나 상품을 홍보한다는 점에서 마케팅 종사자들과 유사하다. 또 광고에 쓰이는 슬로건 등을 만들기 때문에 카피라이터와도 비교가 가능하다. 버벌리스트의 수입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이들의 수입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직장 정보 사이트 ‘글래스도어(Glassdoor)’에 의하면 미국 내 마케팅 종사자들과 카피라이터들은 한 해에 6만불, 한화로 약 7300만원을 번다.


-브랜드 버벌리스트의 평균 수입은 얼마인가.


“현재 약 200명이 우리나라에서 브랜드 버벌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이들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고용 형태, 직장 규모 등에 따라서 벌어들이는 수입이 다르다. 나는 전세계에 24개 법인을 둔 규모가 꽤 큰 회사에 다니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임원 기준으로 적절한 대우를 받는다.”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 초기에는 어떤 작업을 했는지 궁금하다.


“우연한 기회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로펌에서 비서로 근무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만난 한 변호사가 “많은 기업들이 유사 상호를 사용해서 상호 저작권을 이유로 서로 소송을 거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회사의 이름만 전담해서 만들어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로펌을 나와서 관련 회사에 들어갔다.


당시 회사에 전문 인력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타사와 협업해서 브랜드 작업을 맡았다. 이때 ‘스포티지’, ‘칙촉’ 등 이름을 지었다. 원래 작가를 꿈꿨을 정도로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 일도 일종의 글쓰기다. 이름을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지 않나. 성향과 적성에 잘 맞아서 오랫동안 일을 하고 있다.”

출처: 유튜브 캡처
2018 평창올림픽 공식 슬로건이었던 "Passion.Connect.".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는지.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마파크 이름을 만드는 작업에 참여했다. 1996년 이곳은 자연농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테마파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놀이공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그래서 세계적인 테마파크인 디즈니월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등에 대한 책들을 찾아서 읽었다. 연구한 결과 ‘애버랜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최근엔 명사들이 나와서 강연하는 테드(TED) 영상들을 보면서 다양한 관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브랜드를 홍보할 수 있는 슬로건도 만든다고 들었다.


“슬로건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홍보할 때 쓰는 광고 문구다. 최근엔 요가복 제조업체 ‘안다르’의 슬로건으로 ‘스트레치 유어 스토리(Stretch your story)’를 만들었다. 제품의 특성과 기업의 메시지를 슬로건을 통해서 고객들한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편한 운동복을 입고 활동 범위를 비롯해서 삶의 기회, 가능성을 늘려 나가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하루하루 최선 다해 프로젝트 완성하길 바라


-잘 지은 이름이란.


“뻔하지 않고 어렵지도 않아야 한다. 누구나 생각해낼 수 있는 뻔한 이름은 들으면서도 재미가 없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브랜드를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면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한다. 이 점에 유의해서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이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버벌리스트는 매번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크리에이터’다. 다방면에 관심을 두고 트렌드나 유행을 파악해서 이를 작업 과정에 반영하면 좋다. 또 다양한 관점을 익혀서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약 200명이 우리나라에서 브랜드 버벌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출처: 민은정씨 제공
한 컨퍼런스에서 발표하고 있는 민은정씨 모습.

-이 일의 힘든 점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보람을 느낄 때는.


“모든 일은 99 퍼센트의 고통과 1퍼센트의 기쁨으로 만들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이 말에 크게 공감을 한다. 새로운 작업을 맡을 때면 매번 힘들다. 우선 현실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인터넷에 이름을 검색해 보면 누군가가 벌써 쓰고 있다. 최선의 아이디어는 누군가가 쓰고 있기 때문에 차선의 아이디어를 줄 수밖에 없을 때 개인적으로 아쉽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내가 생각해 낸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게 이 직업의 큰 매력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서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 짓는 것. 세상은 빨리 변하고, 소비자들의 기호도 급격히 바뀐다. 제품은 늘 새롭다.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에 발 맞춰서 지금 내 눈 앞의 프로젝트에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


글 jobsN 신재현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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