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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으로 꿈 잃고 PC방에서 살던 중학생 권투선수, 지금은…

“디자이너는 다 천재?” 밑바닥부터 시작한 디자이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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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에 처음 드레스를 만든 베르사체. 21살 때 디올(Dior) 수석 디자이너에 오른 이브 생 로랑. 23살 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선보인 알렉산더 왕. 이들은 모두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패션 업계에서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또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패션 업계엔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은 천재 디자이너들이 많다. 하지만 인턴이나 판매원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해 뒤늦게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도 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를 알아봤다.

톰 브라운.

출처조선DB

매장 판매원으로 취직···20년 만에 6000억원 브랜드 만들어


대학생 때 배우를 꿈꿨던 톰 브라운(54). 1988년 할리우드가 있는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배우로 성공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한 톰 브라운은 디자이너로 과감히 진로를 바꿨다. 1997년 뉴욕에서 명품 브랜드 아르마니 매장 판매원으로 취직해 패션계에 입문했다.


톰 브라운은 법조인·의사가 대부분인 엘리트 집안에서 자랐다. 가족들은 그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톰 브라운은 가족의 눈총을 견디며 묵묵히 경력을 쌓았다. 패션에 대한 브라운의 열정을 알아본 랄프 로렌(80)은 그를 랄프 로렌 산하 브랜드 ‘클럽 모나코’(Club Monaco) 디자이너로 스카우트했다. 랄프 로렌 곁에서 디자인을 배운 그는 2001년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했다. 정장 주문제작을 시작으로 2003년 모든 의류로 제품군을 늘렸다.


럭셔리 남성 패션 브랜드로 유명해진 톰 브라운. 브라운은 2018년 8월 이탈리아 남성복 에르메네질도 제냐에 브랜드 지분 85%를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5억달러(약 5860억원). 매장 판매원으로 취직한 지 20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랄프 로렌.

출처CBS Sunday Morning 유튜브 캡처

톰 브라운을 발탁한 랄프 로렌도 매장 판매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낮에는 브룩스 브라더스 매장에서 일했다. 밤에는 뉴욕시립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로렌은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1967년 학교를 그만뒀다. 같은 해 ‘활동적이면서도 우아함을 추구한다’는 뜻을 담은 폴로(Polo) 브랜드를 만들었다. 넥타이 디자인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했지만 로렌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 사업가로부터 5만달러를 빌려 사업 규모를 키웠다. 넥타이뿐만 아니라 남성복과 여성복까지 만들었다. 백인 상류층을 주요 고객층으로 삼은 폴로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뉴욕 블루밍데일 백화점에 입점도 했다. 1970년 로렌은 매년 뛰어난 디자이너에게 주는 ‘코티 상’을 받았다. 2018년 기준 폴로의 브랜드 가치는 40억달러. 폴로의 인기는 40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한물갔다”는 말 듣던 구찌 부활시킨 무명 디자이너


구찌(GUCCI)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수석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47). 2002년부터 구찌 디자인을 책임지던 프라다 지아니니가 2014년 매출 부진으로 물러난 뒤 후임으로 뽑혔다. 발탁 전까지 구찌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12년 동안 일한 미켈레. 주로 잡화를 디자인하던 그는 실력은 뛰어났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인지도는 보잘것없었다. 미켈레의 승진을 두고 명품 업계 관계자들은 구찌가 곧 망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미켈레는 옷에 뱀·나비·새 등 파격적인 디자인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추락하던 구찌가 다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미켈레가 처음 컬렉션을 선보인 2015년 구찌 매출은 2014년보다 12% 올랐다. 2016년에는 매출이 전년 대비 17% 상승했다.


2018년 구찌는 10조7000억원어치 상품을 팔았다. 사상 처음으로 샤넬을 꺾고 명품 브랜드 매출 2위를 했다. 2019년에는 1분기에만 23억유로(약 3조300억원) 매출을 거뒀다. 한물갔다는 이야기를 듣던 구찌의 매출 절반이 35세 미만 고객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앞길이 탄탄하다는 의미다.

구찌 수석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

출처The New York Times 유튜브 캡처

권투선수 하다 제품 디자이너로 진로 바꾼 사람도


한국에는 권투선수 출신 제품 디자이너 문승지(29)씨가 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씨름을 했던 그는 중학생 때 권투를 시작했다.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다. 꿈은 세계 챔피언이었다.


하지만 문씨는 2006년 중학교 2학년 때 운동을 포기해야 했다. 피가 자꾸 묽어지는 병인 혈소판감소증 진단을 받았다. 왼쪽 신장과 횡격막 사이에 있는 비장(脾臟)을 떼어내야 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동네 이웃들이 십시일반해 수술비를 마련해줬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꿈을 잃은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고 PC방을 전전했다.

권투선수 출신 문승지 제품 디자이너.

출처조선DB

문씨는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신입생 모집을 홍보하는 인쇄물이었다. 내신·수능 성적을 보지 않고 면접으로만 신입생을 뽑는다는 문구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2010년 계원예대 감성경험제품디자인과(현 리빙디자인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디자인 전공을 택한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낙서 하나는 잘 했기 때문”이었다.


문씨는 반려동물 가구 디자인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작품을 알리기 위해 해외 디자인 전문기자 600여명에게 작품집을 보냈다. 해외 디자인 잡지에 문씨의 작품이 실리기 시작했다. 독일 패션 브랜드 코스(COS)에서 문씨의 작품을 매장에 전시하고 싶다며 연락도 왔다. 2013년에만 세계 35개국 45개 코스 매장이 문씨의 작품을 전시했다.


문승지 디자이너는 어린 나이에 꿈을 포기했다. 또래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때는 건축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또 포장마차에 손님을 끌어오는 ‘삐끼’ 아르바이트도 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는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제품 디자이너다. 문씨는 “저처럼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살면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적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글 jobsN 송영조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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