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싫어 17살에 MBC 코미디언 시험봤던 소녀, 지금은..

조회수 2020. 9. 28. 11: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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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보러와요' 방미는 OOO을 20대부터 보러 다녔다

“젊을 때 벌어놓은 돈 못 모으면 말년 비참하게 사는 거예요.”


‘날 보러와요~외로울 땐 나를 보러 오세요.’ 가수 방미는 1979년 MBC 2기 공채 코미디언으로 데뷔했다. 개그우먼으로 시작했지만 개그보단 노래 실력을 기억하는 이들이 더 많다. ‘날 보러와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이 히트곡이다. 요즘 세대는 잘 모르지만 1980년대 대표 인기 연예인이었다. 과거 부동산으로 재산 200억원을 모았다는 인터뷰를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지난 5월 해외 부동산 투자 비법을 담은 책을 출간하고 유튜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가수 방미를 만났다.

출처: jobsN
유튜브 방송을 찍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어떻게 연예인을 했나.


“아버지는 도박꾼. 집안을 전혀 돌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남대문에서 옷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다 먹여살렸죠. 가난이 너무 싫었어요. 어려서 목표라곤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제 재주는 사람들 모아놓고 재밌게 웃겨주는 거. 딱 하나였죠. 정신여고에서 개그 반장으로 유명했어요. 열일곱살에 MBC 공채 개그맨 시험을 봤습니다. 심사위원으로 배삼룡 선생님이 계셨어요. ‘잘하는 거 하나 해봐’ 하시더라고요. 무인도를 불렀더니 면접장이 조용해져요. 그 방에 여섯 명이 들어갔는데 혼자 합격했어요.”

 

가난한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은 세 가지. 돈은 버는 것보다 모으는 게 더 중요하다. 인생에 계획이 없으면 아무렇게나 산다. 반드시 재산을 키워나가야겠다. 이 생각을 갖고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들어섰다. 70년대 말 코미디언 생활을 하면서 받던 월급은 3만원. 방송국은 서울 서대문구에 있었다. 그의 집은 명륜동이었다. 방 한 칸에서 온 가족이 살았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집에서 직장까지 매일 걸어 다녔다고 한다. 대략 8km 거리다. 코미디언 경력이 1년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배삼룡 콘서트의 특별 초청 가수로 무대에 섰다. 그곳에서 날 보러 와요 작사가를 만났다.

출처: 출처·KBS, 유튜브(@Again 가요톱10) 캡처
80년대 가수활동을 활발히 펼치던 모습.

-코미디언으로 데뷔했지만 가수 활동이 더 유명하다. 가수 데뷔 계기는.


“노래를 불렀더니 작사가께서 음색을 마음에 들어 하세요. 그렇게 음반을 계약했죠. 노래가 나오자마자 많은 분들이 그 곡을 좋아해 주셨어요. 1980년 ‘날 보러 와요’가 청계천 카페마다 흘러나왔습니다. 히트를 친 거죠. 일반 직장인은 30~40년 일정하게 월급을 받잖아요. 연예인은 인기를 끄는 3~4년 안에 평생 벌 돈을 바짝 벌어요. 목돈을 만질 수 있어 좋겠다 하는데 그 이후부턴 쭉 내리막길이죠. ‘한물갔다’ 싶으면 그 어디서도 찾아주지 않아요. 어린 나이였지만 이 인기와 수익이 평생 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아버지 덕분에 안 교훈이었어요. 인생계획을 잘 세우고 살 것. 가난을 탈출하는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하고 계획했나.


“목돈을 만든 거죠. 엄마가 남대문 옷 가게 직원이었어요. 팔고 남은 옷을 이리저리 천으로 기워 무대의상으로 입고 나갔죠. 비싼 건 절대 안 입었어요. 어느 날 동료 가수가 번쩍거리는 옷 입고 와서 그러더라구요. ‘이 옷이 뭔 줄 알아? 엘비스 프레슬리 백댄서가 무대에서 입던 옷이야. 1500불짜리.’ 그때 얼마나 웃겼던지. 환율이 1달러에 700원이었으니 1500달러면 한국 돈으로 100만원 정도예요. 그 돈이 지금으로 치면 얼마예요. 지방 행사 가도 전 궁색한 티가 났어요. 다른 연예인들 차를 줄지어 세워놓으면 맨 끝에 낡은 백만원짜리 차가 하나 있어요. 저 빼고 다 벤츠 몰았어요. 그때 동료들이 ‘돈 벌어서 어디다 써’ 자꾸 물어댔어요. 저요? 그때 아끼고 아껴 집 샀어요. 어릴 적 집 없이 맨날 옮겨 다니는 게 하도 서러워서. 돈 모아 1980년대에 방배동 아파트를 샀죠.”


방미 씨가 1982년 샀던 32평짜리 방배동 궁전아파트 가격은 2500만원. 2년 뒤 4000만원에 여의도 은하 아파트를 구입했다. 1985년 동부이촌동 신동아아파트를 8000만원에 매입. 이후엔 6000만원의 은행 대출을 끼고 방배동 신삼호아파트를 1억5000만원에 사들였다. 1982년부터 86년까지는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시기다. 처음에 샀던 아파트 가격은 세 배 이상 급등했다. 20대 나이에 집 4채를 보유할 수 있었다.

방미 제공

-부동산 투기를 한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보는 사람도 많아요. 노래만 불렀던 제가 부동산에 대해 뭘 알았겠어요? 제가 집 산 지역을 둘러보면 전형적인 ‘부의 길’이에요. 방배동·동부이촌동·여의도···. 전부 서울의 내로라하는 부촌이잖아요. 투자를 알고 한 건 아니었어요. 관심이 생기는 지역이 있으면 계속 지나가면서 관찰했어요. 연예인을 하면 세상 물정 돌아가는 걸 잘 몰라서 부동산에 대해 본인이 관심 갖고 연구하지 않으면 잘 몰라요. 요즘에도 연예인들이 건물 샀다, 부동산 투자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는데 사실 진짜 부동산을 움직이는 핵심은 패션디자이너·헤어디자이너들이에요.”


-왜 헤어디자이너와 패션 디자이너가 부동산을 움직이나? 


“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재벌들 옷 맞춰주고 국회의원 가족들 머리 만져주잖아요. 알짜 정보를 얻는 지름길이죠. ‘서초동에 예술의전당이 들어선다, 청담동에 명품 매장이 생길 예정이다···.’ 지춘희 패션 디자이너는 1만원 정도에 청담동 건물을 사서 1000만원으로 불린 인물이에요. 그럼 그와 인맥이 있는 또 다른 디자이너가 합류하는 거죠. 과거 김지미·정윤희·노주현 등 최고 배우들의 헤어를 디자인해주던 유지승 헤어디자이너라는 분이 있어요. 홍성호라는 성형외과 의사도 유명했죠. 그들이 압구정·청담동에 모여 매장이나 병원을 냅니다. 지금까지 상권이 형성된 것 살펴보면 디자이너·성형외과 의사 같은 분들이 가격 낮을 때 들어가서 매장 내고 동네를 개발한 거예요. 연예인이 건물 사는 건 소문날 거 다 난 다음 일이에요.”


그렇게 젊을 때부터 국내 부동산에 관심을 가져오다 갑자기 노선을 틀었다. 미국에 가서 사업을 하겠다는 꿈 때문이었다. 그가 미국에 처음 간 것은 1984년. LA올림픽이 열렸을 때다. 화려한 도시를 보니 드는 생각이 있었다. ‘10년 정도 연예인을 한 다음 돈 모아 뉴욕에서 살아보겠다.’ 어차피 인기는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매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연예인은 남에게 보여주는 직업이다. 겉치장에 신경 쓰다 보면 사치를 해야 한다는 점도 성격에 맞지 않았다.

출처: 방미 제공
10년 전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1990년 갑자기 미국으로 향했다.


“연예계 생활이 맞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연예인이 싫었던 건 아닙니다. 지금도 전 ‘한번 연예인은 죽을 때까지 연예인’이라 생각해요. 우리가 죽으면 신문에 부고 하나는 나잖아요. 누군가 우리 노래를 듣거나 영화를 봤던 기억을 해주잖아요. 특별한 직업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젊은 시절엔 그 일이 너무 짐스러웠어요. 어딜 가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으니까요. 돈을 벌기 위한 직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미국에서는 어떤 생활을 했는지.


“사업을 벌이고 부동산을 보러 다녔죠. 쥬얼리샵을 운영했어요. 그 와중에 틈틈이 매매로 나온 건물을 살폈어요. 뉴욕에서 가장 먼저 산 부동산은 트럼프 플레이스입니다. 센트럴파크 서쪽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건물이죠. 로열층을 2000년 32만달러(3억7000만원)에 샀어요. 창으로 허드슨강이 내려다보이는 좋은 뷰를 갖고 있죠. 지금 시세가 한 11억~15억원 정도 할 거예요. 주위엔 센트럴파크와 줄리아드대학교(The Juilliard School of music), 컬럼비아대학교(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가 있어요. 서울에서는 이 가격으로 이 정도 매물을 구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서울 부동산 가격이 비싸단 말이죠.”


-주얼리샵은 잘됐나.


“사업을 하려면 사람들 만나고 영업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했습니다.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매일 밤 가방이나 구두에 큐빅을 다느라 손가락 마디가 다 굽었어요. 그러다 낮에는 부동산을 보러 다녔어요. 사장이 가게에 없으니 가게가 잘 될 리 없죠. 천성이 부동산 투자자인가 봐요. 그것 말고는 다른 것에는 재미를 못 느끼겠어요. 어릴 때부터 새로운 동네 가면 이 동네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주변엔 무슨 명소가 있는지, 대중교통은 뭐가 있는지 등을 살폈어요. 순수한 호기심이라면 호기심일 수도 있고 또 다르게 보면 본능적으로 돈 버는 걸 연구했던 것 같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동산이 돈을 불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니까요.”

jobsN

-해외 투자를 하다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이젠 대중들이 저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요. 거리를 다녀도 알아보는 이가 많지 않아요. 책(나는 해외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도 내야하고 겸사겸사 한국에 돌아온 거죠.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어요. 미국 생활할 때부터 블로그를 운영했는데 습관이 들었나 봐요. 이젠 영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부동산 투자 얘기, 정치 얘기, 연예인 얘기···. 하고 싶은 말을 해요. 댓글 창도 닫아놓고 제 말만 하니까 구독자는 많지 않죠. 재밌으니까 하는 거예요.”


-재산이 진짜 200억원인가.


“노코멘트할게요.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지금은 국내 부동산 자산은 거의 처분한 상태입니다. 논현동에 건물이 있었는데 1층을 10년 넘게 공실로 비워뒀어요. 국내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요. 이 기사가 나가면 또 얼마나 많은 비난이 실릴지 모르겠지만, 정부가 지나치게 세금을 많이 걷고 있어요. 자영업자들의 사정이 어렵다 보니 공실률이 높아지고 있고요. 악순환입니다.”


-정치적 발언을 하거나 상대 연예인을 비판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성격이 그래요. 솔직하게 말해야 속이 풀립니다. 요즘 한국 사회가 하도 답답해서 한마디 했습니다. 말했잖아요. 한번 연예인은 죽을 때까지 연예인이라고. 대중의 관심을 받고 살았으면 품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요? ‘남 탓하지 마’요.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이 어떻든지 분명 헤쳐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끝까지 돌파해내세요. 구두쇠처럼 한번 살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글 jobsN 김지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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