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쇼 진품명품' 꼭 챙겨보던 소녀는 지금 이렇게 됐습니다

조회수 2020. 9. 28. 15: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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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공예가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소개하려고 합니다

스타트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시장을 철저하게 공부하라고 한다. 그래야 시장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청년 창업이 흔하지 않던 시절, 전통 공예를 아이템으로 창업한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박물관에 가서 전통 문화재를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었다는 박경아(38) ‘세간’ 대표는 한국전통문화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창업을 꿈꿨다. 철저한 준비 끝에 23살에 서울 인사동 쌈지길에 천연재료로 염색한 의상을 파는 가게를 열었다. 이후 매장을 하나둘씩 늘려가며 사업을 키웠다. 최근엔 지방 도시의 죽어가던 거리를 전통 공예를 테마로 재생시키는 프로젝트 사업도 시작했다. ‘자온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충남 부여와 서울을 쉴 새 없이 오가느라 바쁜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인사동 ‘세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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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첩 표지에 ‘세계적인 기업의 CEO’라고 적혀있다. ‘세간’에 대해 소개해달라.


“늘 제 수첩 맨 앞에 써넣는 문구에요. 전통 공예를 바탕으로 창업해서 사업을 하는 동안 늘 제 꿈은 한국 전통 공예품으로 세계적인 기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표로 있는 ‘세간’은 말 그대로 집안 살림에 쓰이는 모든 물건들이라는 뜻이에요. 전통 공예로 만든 가방, 그릇, 옷, 그림, 장식품 등을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저렴한 제품부터 전통 공예작가가 만든 작품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 전통 공예가 일상에서 이렇게 쓰일 수 있다는 걸 알리는 게 제 사업의 목표이기도 해요.”


- 어렸을 때부터 전통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문화 체험을 많이 경험하게 해주셨어요. 덕분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박물관에 가서 하루 종일 노는 걸 좋아했어요. 학교 소풍 때 박물관을 가면 혼자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자유시간을 거기에 다 쓰기도 했습니다. TV쇼 진품명품을 늘 심취해서 보기도 했어요. 한국 전통 공예 미술에 특히 관심이 많았어요. 친구들이 아이돌 잡지를 볼 때 미술 잡지를 보는 게 취미였죠.


중학교 때 학교에서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규슈에 도자기를 만드는 지역을 방문했어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너가서 만들어진 곳이었죠. 그런데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공예가들이 도자기를 정성스레 만드는 것을 보여주고 직접 체험하고 구매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지역에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었어요. 부러웠죠. 그때의 경험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도화선이 된 것 같아요.


미술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중에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한국전통문화학교를 소개하는 포스터를 보게 됐어요. 충남 부여에 있는 국립대학교인데 한국 전통 공예를 다양하게 가르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미술공예과에 입학했어요. 국내에 유명한 장인들로부터 전통 회화, 섬유, 조각, 도자 등을 배웠습니다. 졸업하기 전에 전통 공예로 창업을 한 것도 그 영향이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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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업했을 때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전통미술공예에 대해 배우다 보니 작가로 대성할 만큼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보다 뛰어난 작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예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었어요. 전통공예와 관련해서 다양한 분야를 접하고 배웠으니, 그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의 작품을 소비자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활로를 개척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부터 틈만 나면 서울에 유명한 공예품 매장들을 다니면서 상권과 가격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인사동에 쌈지길을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2004년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쌈지길에 입주하기 위해 열심히 기획서를 작성했어요. 당시 만들어진 쌈지길은 공모를 통해 기획안을 제출하면 경영진이 심사해서 입주를 결정했어요. 경쟁이 치열했는데, 전통문화학교 교수님들의 추천과 공들인 기획안으로 입주에 성공했습니다. 3평짜리 조그만 매장에서 천연재료를 사용한 자연염색 의상을 팔기 시작했어요.”


- 대학생으로 창업을 했다면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나.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학원 강사도 해보고 과외도 했었고, 장사하는 걸 배우고 싶어서 백화점에서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아동복, 가전제품, 이불, 여성복 매장 등에서 물건을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창업 자금을 위해 돈을 모으는 목적도 있었지만, 직접 매장에서 경험해보면서 많은 노하우를 배웠어요. 창업을 했던 2004년 당시에는 청년 창업이 드물었던 시절이라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어요. 그동안 모아놨던 돈 1000만원으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사동 쌈지길 매장은 보증금이 없었고 월세도 비싸지 않았어요. 대신에 창업 초가에는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자금이 넉넉하지 않아서 절약을 위해 친구 두 명과 서울에 방 하나를 얻어 월세를 내며 지내기도 했습니다.”


- 혼자 인사동 매장을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장사는 잘 됐는지.


“3평 밖에 안되는 조그만 매장이었지만, 쌈지길에 있는 매장 70여 개 중에 늘 판매 랭킹은 상위권이었어요. 혼자 매장을 운영했는데, 대학교 4학년 때 수업이 있는 날은 아르바이트를 쓰기도 했죠. 40~60대를 소비자를 타깃으로 천연 재료로 염색한 의상을 판매했어요. 아르바이트 때 장사에 대한 경험을 하며 물건을 파는 데는 자신이 있었어요.


공예에 대한 이론을 알고 있어서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자연 염색 재료인 쑥, 양파껍질, 오리나무 등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면 무척 반응이 좋았어요. 손님을 상대하는 태도도 중요하다는 걸 알기에 늘 서서 고객을 응대했습니다. 매장을 열었을 때부터 매달 1000만원 이상의 매출은 올렸어요. 인사동 쌈지길 매장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쌈지길이 생긴 이래로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는 매장은 70개 중에 5군데 밖에 없어요.”

출처: 본인 제공
작업실에서.

- 파주 헤이리에 사옥을 지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사업을 확장시켜 갔는지.


“처음 열었던 매장이 잘 돼서 쌈지길 3층에 여성 의류 매장을 하나 더 열었어요. 첫 매장에서 판매하는 전통 공예 의상이 아닌 좀 더 캐주얼한 의상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 삼청동 정독도서관 앞에 남성 넥타이 매장을 오픈했어요. 당시 정독도서관 앞은 정말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유동인구가 거의 없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늘 상권 분석을 하며 살아온 제 눈에는 그곳이 뜰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우선 거리가 너무 아름다웠고, 인근에 안국역이 있어서 삼청동 메인 도로보다는 훨씬 교통이 편리했어요. 당시는 월세 50만 원이면 가게를 열 수 있었습니다. 전통 직조 방식으로 만든 넥타이를 만들어서 매장에 내놨어요. 전통 문양으로 고급스럽게 만든 타이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점점 인근에 매장들이 생겨나서 핫 플레이스가 됐죠. 당시 매장을 통한 연 매출이 8억 정도 였습니다. 그런데 삼청동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경험했어요. 지역이 뜨자 50만 원 하던 월세가 500만 원이 넘었습니다. 조그만 가게들이 모여 만들어진 상권이었는데, 버티기 힘들어진거죠. 그래서 다른 지역을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동네가 무척 예뻤어요. 지역의 성장 가능성도 보였고요. 그래서 조그만 땅을 사서 3층짜리 사옥을 지었어요. 사업을 하면서 사옥을 가져보는 것도 꿈이었거든요. 그때 나이가 32살이었어요. 1층은 전통공예품을 파는 매장을 열고 2층은 세를 주고 3층은 제가 살았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자온길의 독립책방 세간.

- 전통 공예품을 찾는 사람이 한정돼 있을 것 같은데. 사업의 노하우가 있다면.


“일단 한번 제품을 산 전통 공예 소비자는 충성도가 높아요. 계속 전통 공예품을 찾는 특징이 있어요. 대신에 처음 진입 시키기가 무척 힘들어요.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산품에 비해 가격도 비싼 편이에요. 의류의 경우 10만~20만원 선이고, 비싼 옷은 60만원까지 해요. 주요 소비층이 40~60대죠. 사업의 지속 가능성은 높지만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 분야입니다.


고객들에게 전통 공예품의 쓰임을 알려주고 그 가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요. 제가 쓰는 가구 중에는 만든 지 100년 된 것도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물건, 버려지지 않는 것, 전통 공예의 가치가 그런 것이라고 알려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판매하는 제품에 직접 메시지를 써드려요. ‘오랫동안 예쁘게 써주세요’라구요.”


- 소비자층을 확대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고 있는지.


“얼마 전 투자 플랫폼 와디즈에 조그만 생활 소반을 올린 적이 있어요. 차를 마시거나 혼술을 할 때, 라면을 먹을 때 받침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소반을 한정 수량으로 내놓은 거죠. 사실 옛 살림살이 중에 지금도 우리 생활에 널리 쓰일 수 있는 물건들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20~30대 소비자들이 많이 주문하셨어요. 200를 목표로 했는데 400개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살면서 전통 공예품들을 접해보지 못한 젊은 층은 전통 공예를 새로운 문화로 인식해요. 전통 공예가 일상에서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온라인 쇼핑이 발달하면서 거리의 로드샵들은 설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새로운 방식의 로드샵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문화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경험하는 매장’을 만들고 싶어요.”

출처: 본인 제공
부여 자온길 공사현장에서.

- 최근 충남 부여에서 ‘자온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로드샵의 한계를 피부로 느끼면서 사업을 어떤 방식으로 키워나갈까 고민했어요. 그래서 떠올린 것이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방 도시의 거리를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어요. 중학교 때 방문했던 일본 규슈의 도자기 거리처럼, 사람들이 찾아가고 싶은 거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했던 곳이라 부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여가 떠올랐어요.


부여는 문화유산이 훌륭한데 콘텐츠가 부족한 곳이었거든요. 콘텐츠만 갖추면 사람들이 충분히 찾아올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부여의 구도심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과거 상권의 흔적이 남아있는 규암 마을을 발견했습니다. 인근에 쪽방 하나를 얻어서 틈만 나면 내려가서 지역을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거리의 문화 흔적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데 텅텅 비어있는 곳이 대부분이었죠. 이곳을 살려서 문화를 체험하는 거리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자온길 프로젝트’에요.”


- 대규모 사업인데 진행 과정이 궁금하다.


“투자나 지원이 없으면 진행하기 힘든 프로젝트였어요. 처음에는 충남도청에 공모를 냈는데 탈락했습니다. 이후에 사업의 방향을 조언해주는 액셀러레이터를 만났는데, 이 아이템이 좋으니 투자자를 유치해서 진행해보자고 했어요. 액셀러레이터 양경준 대표님의 도움으로 투자자를 모았고 50억 정도의 투자금이 모였습니다.


2년 전부터 부여 규암 마을의 낡은 집과 상점들을 법인 명의로 구매해서 하나씩 손보기 시작했어요. 지역의 특색을 유지하기 위해 원래 있던 낡은 집의 특색을 최대한 살리며 고쳐나갔습니다. 그곳에 법인 직영의 매장들을 열었고, 특색 있는 샵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자온길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부여에서도 도시재생의 필요성을 실감한 것 같아요. 부여군이 예산을 확보해서 주변 정비 사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출처: 본인 제공
자온길 이안당에서.

- 도시재생사업을 해서 이루고 싶은 꿈이 무엇인가.


“전통 공예를 테마로 보고, 먹고, 사고, 꿈꾸고,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싶어요. 전통문화콘텐츠 타운을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 무척 바쁠 것 같다. 취미는 무엇인지.


“서울과 부여를 쉴 새 없이 오가면서 차의 주행거리가 23만 킬로를 넘었어요. 시간이 없어서 차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많았죠. 원래 취미는 야구장에 가는 것이었어요. 고향이 천안이라 한화 이글스의 팬이에요. 동호회에 가입해서 함께 응원도 많이 갔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야구를 보며 응원하는 과정이 재밌거든요. 요즘은 바빠져서 야구장에 못 간지 한참 됐어요. 내 문화가 하나 없어진 것 같아서 무척 아쉬워요.”


-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20대에 창업한 이후로 지금까지 전통 공예가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좀 더 잘 쓰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어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 그 속에는 일본 전통문화가 많이 녹아있어요.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이미 녹아있었던 거죠. 그걸 전 세계 사람들이 봐요. 우리나라 전통문화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일상 속에 녹아있는 한국 전통 공예.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간’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고 싶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사진 jobsN 오종찬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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