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 재학 중 입대, 선임의 "뭐하다 왔냐"는 말에 충격받았죠

조회수 2020. 9. 21. 18: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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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이자 사장님이죠" 비누로 일자리 만드는 착한 기업의 정체
동구밭 노순호 대표
밭 가꿔 친구 만들고, 비누 만드는 회사
성인 발달장애인 일자리 해결

서울시 강동구 상일동에는 회색 빛깔 빌딩 숲 사이로 초록색 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있다. 매주 토요일 20여명의 도시 농사꾼이 밭을 가꾼다. 모종 심기부터 수확까지 모든 과정이 농부들의 손을 거치지만 다른 곳과 다르게 수확이나 작물을 파는 것이 주 목적이 아니다. 이곳은 ‘채소를 심어 관계를 수확하는 것’이 목표인 소셜벤처 ‘동구밭’이다. 서울·경기 지역 22개 텃밭에서 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동구밭이 운영하는 텃밭에 나오는 도시농부 반은 발달장애인이다. 성인 발달장애인 한 명과 비장애인 한 명이 팀을 이뤄 활동한다. 이들은 성별, 장애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친구다. 장애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는 동구밭은 이제 이들과 함께 연 180만개의 비누를 생산하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장애인은 모두 1년 이상씩 일하고 있는 장기 근속 사원들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친구가 돼주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노순호(28)대표를 만났다.

출처: 동구밭 제공
동구밭 노순호 대표

도시농업에서 시작한 동구밭


어린 시절 노순호 대표는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는 '체인지메이커'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변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법학을 전공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입학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입대했고 당시 선임의 '뭐 하다 왔냐'는 질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 유치원 때부터 대학까지 모든 삶을 돌아봤지만 2시간이 지나자 할 말이 없었어요. '2시간어치의 콘텐츠도 안되는 인생을 살았구나'를 느꼈고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죠.”


"고민 끝에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전역하자마자 사회 문제를 비즈니스 모델로 해결하는 동아리 '인액터스'에 들어갔습니다. 도시농업에 관심이 생겨 친구 3명과 함께 도시농부를 찾아 '왜 서울에서 농사를 짓냐'고 묻고 다녔어요. 많은 대답 중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다’는 것에 공감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 시대에는 성별, 나이, 장애인, 비장애인 차별 없이 공동체 일원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 문화를 다시 도시에 퍼뜨리고 싶다고 했고 우리도 일조하고 싶었습니다."


강동구청을 찾아가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지원을 받아 밭을 마련했다.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텃밭을 운영했다. 그러다 지금의 동구밭 사업 모델을 구상한 계기가 생겼다. "부모님과 함께 밭에 오는 사람들이 비장애인과 조금 달랐습니다. 알고 보니 발달장애인이었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표였으니 그들을 위해서 뭐든 하고 싶었습니다."

출처: 동구밭 홈페이지
동구밭 텃밭 활동인 '가꿈지기'

첫 프로젝트 실패 후 다시 시작


발달장애인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특수교사,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 전문가 등을 만나고 다녔다. 그들에게 '힘든 게 뭐냐'고 물으면 모두 졸업하면 갈 곳이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단순히 일자리를 만들어 주자는 생각으로 텃밭을 활용해 도시 농부를 육성하기로 했다. 밭에 나오던 발달장애인 부모들을 찾아가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발달장애인 5명과 함께 시작했지만 프로젝트는 실패였다. 텃밭에 나오는 장애인 중 농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장애인 중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그 누구도 일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일자리를 걱정하는 사람은 부모님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부모님의 이야기가 곧 그들의 생각이라고 착각한 거죠. 그래서 농부 할 생각도 없는데 왜 매주 오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라고 답하더군요. 지금 이들에게 일자리보다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다시 공부했다. 발달장애인은 사회성 결핍이 심하기 때문에 3명 중 2명이 친구가 없다. 적응을 못하기 때문에 한 직장에서 오래 일을 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평균 근속 개월수는 3~4개월 밖에 안된다고 한다. 또 그냥 일자리보다 텃밭처럼 지속해서 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노대표는 “우리 사회는 고용률을 중요하게 여기는 비장애인 시선으로 장애인 일자리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장애인 1명이 12개월 일하는 것보다 12명이 1개월 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요. 2개월 후에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단지 고용률이 높으면 좋은 등급으로 예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정말 도움을 주려면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게끔 사회성을 키워주고 그들이 가고 싶어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동구밭을 장애인과 비장애인 1대1로 팀을 이뤄 사회성을 키우는 곳으로 모습을 바꿨습니다. 비장애인 봉사팀과 발달장애인을 모집해 새롭게 시작했어요.”

출처: 동구밭 제공
(왼쪽부터)노순호 대표와 직원들, 비누 제작 과정,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원이 함께 일한다.

비누 제작해 장애인 사원 채용


매년 200여명의 발달장애인에게 친구를 만들어 줬다. 사회성을 길러주고 싶었던 노대표의 바람대로 프로젝트가 흘러갔다. 어느 날 텃밭에 나온 장애인 친구가 '3년째 하는데 나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이냐'고 물었고 노대표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목표는 일자리 제공이었는데 그때까지 채용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기업에 '이들은 일할 준비가 돼 있으니 채용하라’고 말하는 것도 모순이었죠. 전환점이 필요했습니다."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을 고민했다. '발달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 '당장 가진 자본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 '유통기한이 긴 상품', '5년 안에 1등 할 수 있는 사업' 이 기준에 부합하는 일이어야 했다. 고민 끝에 천연 비누제조 사업으로 결정했다. 2016년 9월, 1호 장애인 사원과 함께 시작했다. SOPOONG에서 투자도 받아 지하 공간을 얻어 시설을 갖추고 제품을 만들었다.


동구밭이 만드는 비누는 반죽부터 직접 하는 저온 숙성(CP·Cold Process) 비누다. 비누 베이스를 녹여 첨가물을 넣는 시판 MP(Melt&Pour)비누와 달리 처음부터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재료의 기능이 살아있고 소비자가 필요한 용도에 맞게 레시피를 구성할 수 있다. 이 점이 동구밭 비누의 강점이라고 한다. 또 자사 제품에는 텃밭에서 직접 기르는 재료 케일, 바질 등도 들어간다.

출처: 동구밭 홈페이지
동구밭 자사제품(좌), 또다른 소셜벤처 마리몬드와 협업해서 만든 '꽃 비누' 시리즈. 이랜드, 세븐일레븐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한다(우).

"처음엔 수익보다 시장 파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사제품만 만들었어요. 반응은 좋았지만 판매량이 저조했습니다. 안 팔리는 날은 5개밖에 못 팔았어요. 이래서는 인건비도 안 나오겠다 싶어 OEM과 ODM 납품을 준비했죠. 여러 기업을 찾아가 영업을 했어요. 거래를 성사하진 못하더라도 정성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계약을 따낼 수 있었습니다. 사장님들의 소개로 거래처를 늘릴 수 있었어요."


그러나 무시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애 사원과 함께 시작했다가 금방 사라지는 곳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노대표는 제품을 무시할 수 없게 좋은 거래처를 찾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 결과 워커힐 호텔과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호텔에도 납품하는 제품이라는 것을 보여주면 다른 곳에서 무시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직원들에게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호텔에도 쓰인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더 많은 장애 사원 채용할 수 있는 기업


동구밭의 비누는 국내 30여군데에 납품 중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쓴다. 오직 품질로만 이뤄낸 결과다. 2017년 말, 미국에서 벤더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한국에 왔다가 동구밭 비누에 반했다. 그쪽에서 먼저 기부와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노대표는 사업을 택했고 단가와 수량 협상을 거쳐 2018년 7월 미국에 첫 수출을 시작했다. 현재 미국은 물론 일본과 중국에도 납품하면서 해외 매출 15만불의 성과를 냈다. 올해는 태국에도 수출할 예정이다.


노대표는 발달장애인을 채용하는 데 도움이 되고 동구밭 사업 선정 기준에 맞는 일이라면 언제든 새 제품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설거지 고체 세제를 만들었고 10만개 이상 팔았다. 제품의 질은 기본이고 적절한 판로를 찾았던 것이 성공 비결이었다.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층을 분석해 판로를 선택하는 게 중요했죠. 주부를 주 소비자층으로 잡았습니다. 페이스북에서는 실패했지만 카카오스토리, 라인프렌즈에서는 성공했어요. 또 어머니들이 많이 찾는 생협에 납품했고 좋은 성과를 냈죠."


한때는 일이 없어 출근한 직원들과 소풍을 갔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연 매출 15억원을 올린다.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월 매출이 400만원씩 발생할 때마다 장애인 사원 한 명씩 채용하겠다는 약속도 지키고 있다. 또 발달장애인 평균 근속 개월 수는 3~4개월이다. 그러나 동구밭에서 일하는 20명의 장애인 사원의 평균 근속 개월 수는 12개월이 넘는다. 중도 퇴사자도 없다. 노대표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점이라고 한다.


시작할 때 세웠던 '해외 수출', '호텔 납품', '업계 1위' 목표 중 수출과 호텔 납품은 이미 달성했다. 이제 동구밭은 고체 화장품류를 납품하는 ‘1등 회사’를 위해 나아가는 중이다. “동구밭은 비누 제조라는 전문성을 갖추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입니다. 더 많은 장애인 사원을 채용할 수 있다면 새 사업을 시작할 겁니다. 지금은 입욕제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품질은 유지하고 아이템을 늘려 국내에서 고체 화장품을 가장 잘 만드는 회사로 클 겁니다. 그래서 해외에 있는 발달장애인도 오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회사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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