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남아주세요" 부탁받는, '사이클계의 박항서'
베트남에 박항서가 있다면 태국에는 정태윤이 있다. 종목은 축구가 아닌 사이클. 1978년부터 40년 동안 한국에서 사이클 선수를 키운 그는 2018년 은퇴 후 태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지난 1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019 트랙사이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태국팀에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줬다. 대회가 끝나고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에 견줄 정도로 현지에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정태윤(66) 태국 사이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만났다.
-사이클에 입문한 계기는.
“대구 능인고등학교 1학년 때 사이클에 입문했다. 그 전까지는 스케이트 선수였다. 스케이트 선수는 여름에 경기용 자전거를 타고 훈련을 한다. 사이클이 스케이트보다 좋아져서 종목을 바꿨다.”
-간단한 이력을 소개해 달라.
“고등학교 재학 중 전국대학사이클연맹회장기대회에서 5관왕을 했다. 지금은 단거리·장거리 등 주 종목이 정해져 있다. 그때는 한 선수가 800·1600·4800·10000·40000m 경기를 나갔다. 육군(현 상무)팀과 실업팀을 거쳐 28살 은퇴했다. 1978년 마산중앙중·고등학교에서 지도자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마산중앙중·고등학교에서 활약한 선수 대부분 경남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래서 1980년 경남대학교로 넘어가 사이클팀을 창단했다. 1983년까지 경남대에 있다가 국군체육부대·기아자동차 사이클팀 감독 등을 거쳐 2001년부터 17년간 서울시청 사이클팀을 지도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태국으로 건너간 계기는.
“국제 대회를 나가면 종종 외국 코치진과 이야기를 나눈다. 2018년 초 알고 지내던 태국 사이클팀 관계자가 나의 은퇴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확답을 못하자 8월쯤 다시 태국 사이클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감독 생활을 더 해보고 싶었다. 고심 끝에 가겠다고 했다.”
-2019 트랙사이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이 나왔다.
“포나르즈탄 빠톰뽑(22) 선수가 남자 15km 스크래치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스크래치는 마라톤과 비슷한 경기다. 15km를 가장 먼저 달리는 선수가 1등이다. 각국 1명씩 24명가량 참가한다. 장거리 경기라 기록보다 순위가 중요한 종목이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사상 첫 금메달이다. 소감은.
“동메달만 따도 고맙겠다고 생각했다. 금메달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작전이 통했다. 보통 선수들은 이빨이 53개인 기어를 쓴다. 이 친구에게는 54개 이빨이 있는 기어를 쓰라고 권했다. 이빨이 많으면 페달을 밟을 때 힘을 더 써야 한다. 대신 속도가 한 번 붙으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선수가 힘을 못 내면 역효과가 나서 꺼려하는 선수도 많다.
빠톰뽑 선수도 처음에는 기어 바꾸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도 금메달을 따려면 과감한 작전을 펴야 했다. 빠톰뽑 선수는 다리의 힘이 좋아서 기어를 바꿔도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남과 비슷한 조건으로는 1등을 할 수 없다고 설득했다. 결국 작전이 먹혔다.”
-훈련은 어떻게 했나.
“2018년 9월 20일 태국에 갔다. 1월 대회까지 3개월 동안 훈련을 했다. 선수들의 기존 훈련 강도는 한국에 비해 매우 낮았다. 그래서 한국에서 하는 것처럼 스파르타식 훈련을 했다. 예를 들어 하루에 100km씩 타던 걸 150~180km로 늘렸다. 속력도 기존 시속 40km에서 43~45km로 높였다. 훈련 초기 선수들이 많이 힘들어했다. 그래도 강도 높은 훈련으로 기록이 좋아지는 것을 보며 참고 열심히 해줬다.”
-현지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나.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 태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인이 나 하나 뿐이라 외로웠다. 의사소통 문제도 있었다. 태국어를 몰라서 선수 이름을 외우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통역사가 없어서 태국 선수들과 영어로 대화했다. 영어 실력이 서툴러서 깊이 있는 대화는 못 했다. 운동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사이클 용어를 태국어로 익히고 나니 큰 어려움은 없었다.”
-태국에서 사이클 종목의 위상은 어떻나.
“우리나라는 사이클이 비인기 종목이다. 아시안게임에서 5관왕을 해도 반응이 시원찮다. 국제대회가 끝나고 인천공항으로 돌아와도 취재진이 없다. 반면 태국은 사이클에 대한 관심이 많다.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태국으로 돌아갔을 때 공항에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태국 국왕도 사이클의 인기에 한몫했다.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2016년 12월 즉위했다. 그의 취미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라는 게 알려지자 3년 전부터 많은 태국 시민들이 자전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임금은 얼마나 받나.
“베트남도 마찬가지지만 동남아시아는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다. 애초에 돈 때문에 간 것은 아니었다. 미화로 한 달에 3000달러(약 340만원) 정도 받고 있다. 월급 외에도 태국사이클연맹에서 숙식을 제공한다. 현재 시내 호텔에 머무르고 있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이후 아직까지 인센티브는 없었다. 조만간 새로 계약서를 쓴다. 그때 실적을 반영해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웃음)”
-앞으로 계획은.
“원래 지난 1월 아시아선수권대회까지만 태국에 있으려고 했다. 태국 사이클팀에서는 3~5년 정도 감독으로 있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5월부터는 16~18세 선수들이 뛰는 태국 주니어팀을 맡는다. 10대인 주니어팀을 나에게 맡긴 것도 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워달라는 뜻인 것 같다.
우선 주니어팀을 훈련시켜서 10월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 그 대회에서 메달을 따고 난 뒤에 다음 계획을 세우고 싶다. 일단 태국 주니어 선수들을 아시아 정상권에 올려놓고 싶다.”
글 jobsN 송영조
jobarajob@naver.com
잡스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