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할거야' 영화관 청소하며 다짐했던 60등, 드디어 꿈 이뤘다

조회수 2020. 9. 27. 22:5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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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청소하면서 "할리우드 제작사 가겠다"했던 지방대 미대생의 현재 직업

2008년 여름이었다. 방학을 맞아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했다. 영화관 앞에서 티켓을 확인하고 상영이 끝나면 청소도 했다. 아르바이트 중 본 영화가 있었다. 지구에 홀로 남아 쓰레기를 처리하는 로봇 이야기를 그린 픽사의 애니메이션, ‘월E’. 영화가 끝나면 불 꺼진 관객석을 치우면서 다짐했다. 10년 후 반드시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할 거라고.


조현정(30)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니켈로디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Nickelodeon Animation Studio)의 스토리보드 리비져니스트(Storyboard Revisionist)다. 니켈로디언 스튜디오는 유명 만화영화인 ‘네모네모 스폰지밥’ 등을 제작했다. 스토리보드 리비져니스트는 영상의 기초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를 감독 지시에 따라 수정한다. 10년 전, 그녀가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꿨던 꿈을 이뤘다.

출처: 본인 제공
2018 LA 산타모니카에서 개최하는 필름페스티벌(LAcinefest) 수상자들의 모습(왼)·조현정씨는 졸업작품 'Nowhere'(오)을 제출해 Best Animation 상을 수상했다.

고3때 시작한 미술, 등수는 63명 중 '60등'


“고등학교 3학년 때 입시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1, 2학년 때는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내내 방황했죠. 제가 제일 좋아했던 일은 그림 그리기였어요. 하지만 주위에선 제게 미술에 재능이 없다 반대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적다면서 부모님도 원치 않으셨죠.”


안산 성안고등학교 3학년, 주변 반대에도 동네 입시 미술 학원에 등록했다. 학원에서 함께 그림 그리는 학생들은 모두 63명이었다. 과제로 석고정물 수채화를 그려 제출하면 다음날 등수대로 학원 벽에 그림이 걸렸다. 그녀의 성적표는 보통 뒤에서 세 번째인 60등이었다.


“꼴등을 해도 상관없었어요. 재밌었거든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났던 것 같아요. 방학 때 미술 학원은 오후 열두시에 시작해 밤 열시에 끝났어요. 집에 돌아가 밤 열한시부터 밤새워 아침 여섯시까지 수능 공부를 했어요. 잠은 대여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어요. 늦게 시작했지만 나만의 목표를 갖고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죠.”

출처: 본인 제공
조현정씨의 개인작업물.

학교에 다닐 땐 야간자율학습 대신 학원에 갔다. 손가락에 물집 잡힐 정도로 그림을 그렸다. 가장 먼저 화실에 나가 새벽 두시까지 남아있었다. 2008년 홍익대학교 조치원캠퍼스 디자인영상학부에 합격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때 본 영화가 ‘월E'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들어가고 싶었다. 학교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사 픽사를 다녔던 외국인 교수가 있었다. 수업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선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00만원 들고 떠난 호주 워킹홀리데이


“선배 중 한 명이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어요. 돈 벌면서 영어공부를 할 수 있다 했죠. 부모님께 손 안 벌리면서 현지에서 영어 실력을 키울 방법이었습니다. 그 후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일단 한국에서 1년 동안 인턴이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은다. 그 돈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간다. 호주에서 일하면서 영어공부를 한다. 영어 실력을 쌓은 다음 한국에 돌아온다. 돌아와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미국 대학원에 진학한다. 이런 식으로요.”


선배의 경험담을 듣고 함께 워킹홀리데이에 가자 했던 동기들은 5명 정도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긴 이는 그녀뿐이었다. 2010년 초, 휴학계를 냈다. 국내 소규모 애니메이션 제작사(스튜디오 에보)에 졸업한 선배 추천으로 인턴으로 들어가 일했다. 4개월 동안 약 400만원을 모았다. 2010년 8월 6일 호주에 도착했다. 행선지는 호주 서부 퍼스였다. 한국인이 많은 시드니나 멜버른에 가면 영어가 늘지 않을 거라 생각해 피했다.

출처: 본인 제공
조현정씨의 모습.

“호주를 떠나기 전, 원칙을 세웠어요. 첫 번째는 호주 현지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할 것, 두 번째는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기 전 미국 대학 입시에 필요한 시험인 아이엘츠(IELTS) 6단계 이상 성적을 거두는 것이었죠. 이 두 가지를 이루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어요. 일단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을 호주 현지인이 고용해주지 않았습니다. 또 영어를 쓸 기회가 없다 보니 실력도 늘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작정 거리에 나가 외국인들에게 말 걸었어요. ‘맥도날드가 어딨는지 알아?’, ‘은행 위치 좀 알려줘’”


그녀는 퍼스 거리 곳곳을 질문하고 다녔다. 영문 이력서 50장과 함께였다. 호텔, 레스토랑, 카페 등 아르바이트생이 필요해 보이는 가게면 무작정 들어갔다. 꺼낸 말은 한국에서부터 외워온 그대로였다. “헬로, 마이네임이즈 스마일리(조현정 씨의 영어 이름) 조···.(Hello, My name is Smiley Cho, Im looking for a job)”

출처: 본인 제공
호주 호텔에서 근무 당시 호텔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왼)·조현정씨는 일한지 두달만에 신발 밑창이 닳아 뿌듯했다고 한다(오).

“퍼스 시내 일대의 가게들을 전부 돌았죠. 영업 시작 시간부터 끝날 때까지 제 이력서를 전단지처럼 뿌리고 다녔어요. 한 번은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 어렵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는데 손님이 말한 솔트앤페퍼(Salt and Pepper) 발음을 알아듣지 못해 하루 만에 잘리기도 했죠. 횡단보도를 걷다 백인 남성에게 주먹으로 어깨를 맞은 기억도 있습니다. 인종차별 욕을 들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쳐다보는데 아프고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구요.”


호주에 온 지 두 달 반쯤 지나자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16달러(약 1만8000원) 남아있었다. 큰일 났다 싶었던 찰나 이력서를 냈던 호텔에서 연락이 왔다. 6개월간 호텔 청소부로 일할 수 있었다. 계약이 끝난 2011년 6월부터 7월까지 한 달간 호주 도서관에서 아이엘츠 시험을 공부했다. 목표했던 아카데믹(Academic) 6단계 점수를 받았다. 기세를 몰아 케임브리지에서 주관하는 영어 어학 자격증 시험인 FCE(First Certificate of English)에 도전했다. Grade B2가 나왔다. B2는 중상급 수준으로 학사 과정에서 영어로 공부하거나 특정 주제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는 정도다.


USC 미술 대학원 석사과정 합격


2012년 2월 한국에 돌아와 복학했다. 2015년까지 졸업준비를 하면서 대학원 학비를 모았다. 2015년 3월, USC 미대 석사 과정에 합격했다(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School of Cinematic Art Animation & Digital Arts). 2018년 월스트리트저널 미국 대학 평가 15위에 오른 명문 대학이다. 학비를 포함한 1년 총 생활비는 약 5000만~6000만원 정도다. 네 명의 룸메이트를 모아 월세를 나눠냈다. 한 사람당 750달러(약 84만원)를 부담했다. 빠듯한 유학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대학원 1학년부터 학생 조교 아르바이트를 했다. 시급은 13~15달러(약 1만5000원)였다.

출처: 본인 제공
(왼) 니켈로디언 인턴십 프로그램 참석 기념사진 · (오)대학원 석사학위 수료식날.

“대학원 시절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어요. 식비를 아끼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근처 마트로 장 보러 가는데 가방으로 쓰던 비닐봉지가 터져버렸죠. 달걀과 우유가 들어있었는데 길에 쏟아져 내용물이 터져버렸어요. 그때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고생하나’ 하는 생각에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어요.”


할리우드 제작사에서 일하는 것을 꿈꾸는 학생들을 위해 미국 주요 대학에는 매년 스튜디오 데이(Studio Day)가 열린다. 할리우드 제작사 인사팀이 학교로 찾아온다. 파티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인사팀과 대화 나누며 이력서를 낸다. 1학년 때 이력서를 냈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2학년 때 기회가 찾아왔다. 스튜디오 데이가 열리던 날, 한 인사담당자가 길을 물어왔다. 그녀는 친절히 행사장 입구까지 데려다줬다. 그는 현재 그녀가 근무하고 있는 니켈로디언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인턴 인사 담당자였다. 인사팀에 좋은 인상을 심어줬던 그는 서류에 합격해 인터뷰를 볼 수 있었다.


“미국 유학 중 체력을 기르기 위해 복싱을 시작했거든요. 이력서에 적힌 취미 소개 글을 읽고 복싱은 왜 했는지 물었죠. 또 니켈로디언에서 만든 캐릭터 중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무엇인지, 너를 만화 캐릭터로 소개한다면 무엇인지 등을 자유롭게 물었어요. 인터뷰 과정에서 최대한 열정을 보여줬던 것 같아요. 계속 열심히 하겠다 말했죠. 2016년 말, 인턴십 프로그램에 합격했습니다. 정식 직원을 뽑는 과정과도 연계된 과정이라 지원자가 매년 8000~9000명 몰리는 인턴십입니다. 합격하고 보니 외국인은 저 밖에 없었어요.”

출처: 니켈로디언 공식 인스타그램(@nickanimation) 캡처
니켈로디언 스튜디오는 유명 애니메이션 '네모네모 스폰지밥'을 만들었다.

인턴 교육 초반부터 회사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10주간 인턴십 참가자들을 모두 관찰하고 평가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평가 자료는 추후 참가자가 회사를 지원할 때 참고할 것이라 했다. 할리우드 제작사에 입사하는 방법은 인턴십과 신입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입사하는 것이 유리하다. 업계가 작은 전문가 집단이다 보니 유학생 같은 외부인이 진입하기는 쉽지 않다.


“함께 일하는 팀원에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애썼어요.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뭐든 도움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작의 모든 과정은 협업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제 실력은 보잘것없지만 회사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 생각해요. 좋은 인상을 남긴 덕에 6개월 인턴을 더 연장해 할 수 있었어요. 모두 가족처럼 서로를 챙겨줬어요. 인턴십이 끝난 뒤에도 회사 사람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죠. 2018년 5월 초, 졸업작품을 만들던 중 마지막으로 인턴했던 팀의 감독님이 연락하셨어요. 1차로 포트폴리오를 제출했습니다. 이후 테스트를 본 후 2018년 8월,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습니다.”

출처: 본인 제공
(왼) 니콜로디온 본사 사옥 내 회의실·(오)조현정씨 개인 책상.

그녀는 작년 11월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직군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스토리보드를 수정하는 스토리보드 리비져니스트(storyboard revisionist)다. 신입 초봉은 7만6000달러(약 8500만원)다. 근무시간 원칙은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지만 자율적으로 조정해 근무한다. 겨울에는 2주 유급휴가를 준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좋은 회사로 미국 내에서도 유명하다.


“10년 전,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봤던 영화 한 편이 제 삶을 바꿔놨죠. 부모님 도움받지 않고 제 힘으로 유학해 원하는 직장에 들어온 스스로가 자랑스럽습니다. 누구나 목표를 갖고 계획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하고 있는 일에서 얼마나 더 높이 오를 수 있는지 도전하는 중이죠. 앞으로 10년, 더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시간으로 보낼겁니다."


글 jobsN 김지아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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