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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 순혈주의? 이제 그런거 없습니다” 작심발언 1년 뒤…

조직 기강 잡으며 기업 키워낸 순혈주의, 이제는 속속 사망선고
jobsN 작성일자2019.02.11. | 85,224 읽음
국내 기업들 순혈주의 타파 추진
LG·현대차·포스코가 대표적
“모든 것이 융합되는 시대에 순혈주의는 독(毒)”

“앞으로 현대차가 삼성전자나 다양한 IT 업체와 협업하는 일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현대차의 순혈주의? 이제 그거 없습니다. 제가 왔잖아요.”


2018년 1월 CES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 만난 지영조 현대차 사장(당시 부사장)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엑센츄어, 맥킨지, AT&T 벨 연구소 등을 거쳐 삼성전자 기획팀장 부사장을 역임한 그는 2017년 1월부터 현대차 전략기술본부장(부사장)을 맡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이제 현대차는 바뀔 것이다”라고 반복해 말했다. 그 후 1년 뒤인 2018년 12월 그는 현대차 전략기술본부장 사장으로 승진했다. 현대차에 만연했던 순혈주의를 깬 대표적 사례다.


‘순혈주의 타파’를 외치는 기업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동안 자사 순혈주의, 공채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조직 내부 기강을 잡고 빠르게 성장했던 국내 기업들이 외부 인재를 적극 수혈하며 조직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 작년 말과 올 초 기업들의 정기 인사 키워드는 ‘순혈주의를 깨고 혁신’이었다. 기업들의 순혈주의 타파 움직임은 4차 산업혁명과 맞닿아있다. 재계 관계자는 “산업 영역 간 구분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융합·응용되는 시대에 자사 순혈주의는 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융합돼 산업간 영역이 무너지면서 기업의 순혈주의도 퇴출되고 있다.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긍정적 효과 냈던 순혈주의


그동안 국내 기업들은 공채우선주의와 자사순혈주의를 유지했다. 빠른 성장을 위해서는 높은 조직 충성도가 필요했고, 순혈주의를 활용했다. 말단 사원 때부터 기량을 닦고 조직에 충성하면 언젠가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샐러리맨의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필요에 의해 외부 인재를 수혈해도, 외부 인재를 CEO나 대표 자리에 앉히진 않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순혈주의는 기업 내부 결속을 다지고, 단결력을 통한 기업의 빠른 성장을 가져왔다”고 했다. 한국 기업이 세계적 기업의 성공공식을 따라 성장한 ‘패스트 팔로워’ 전략 당시엔 순혈주의가 어느 정도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조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외부 인재 영입과 이들을 통한 조직 재구성에는 소홀했다. 기업정보 분석업체 한국CXO연구소는 작년 10월 국내 100대 기업 중 외국인 임원 수를 조사했는데, 100대 기업에 다니는 외국인 임원은 전체(6843명)의 1.4%(91명)에 불과했다. 100대 기업 중 외국인 CEO가 있는 기업은 S-오일(오스만 알 감디 대표)과 동양생명(뤄젠룽 대표) 등 2개뿐이다.

기업들이 순혈주의를 속속 깨고 있다.

출처 : 조선DB

순혈주의 타파 확대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순혈주의를 깨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LG다. LG는 그동안 ‘순혈주의’ 문화가 심한 곳으로 유명했지만,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들어서면서 외부인사를 적극 영입하고 있다. 작년 11월 첫 인사에서 LG화학은 신학철 3M 수석부회장을 LG화학 부회장으로 영입했다. LG화학이 외부 인사에게 CEO 자리를 내준 건 1947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또 ㈜LG는 홍범식 베인&컴퍼니 코리아 대표를 경영전략팀장 사장으로 영입했고, 김형남 한국타이어 연구개발본부장 부사장을 자동차부품팀장 부사장으로, 김이경 이베이코리아 인사부문장을 인사팀 인재육성담당 상무로 영입했다.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외부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서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왼쪽에서 두번째)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왼쪽에서 네번째).

출처 : 조선DB

‘순혈주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현대차그룹도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전면에 나선 작년부터 인재 수혈과 외부 영입 인사의 중용이 활발하다. 전략과 차량 개발, 상품의 주요 보직에 모두 ‘외국인 용병’을 기용하며 순혈주의를 깼다. 작년 말 인사에서는 차량성능담당을 맡아온 독일 BMW 출신의 알버트 비어만 사장을 현대차의 핵심 중 핵심인 연구개발본부장에 앉혔다. 외국인이 연구개발본부 수장이 된 건 현대차 창사 이래 처음이다.


포스코도 마찬가지다. 포스코는 작년 12월 임원인사를 하면서 “신설되는 조직에는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전문성을 보유한 인재를 중용한다는 경영철학에 따라 외부 전문가를 과감하게 영입한다”고 밝혔다.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신성장 부문장’에 오규석 전 대림산업 사장을 영입했고, 그룹 싱크탱크인 포스코경영연구원장에는 산업연구원 출신 장윤종 박사를 스카우트했다. 산학연협력실장에는 박성진 포항공대 기계공학과 교수가 선임됐고, 2월 신설한 무역통상 부문장에는 김경한 전 외교부 국제경제국 심의관을 영입했다.

외부 영입된 신학철 LG화학 대표이사 부회장(왼쪽)과 오규석 포스코 신성장부문장.

출처 : LG화학·포스코 제공

알버트 비어만 현대기아차 연구개발본부장

출처 : 현대차 제공

자사 기술자 우대하던 인텔도 순혈주의 끝나


보수적 문화의 금융권도 순혈주의 타파가 진행 중이다. 신한금융지주 계열의 신한금융투자는 신임 수장에 동양종합금융증권(현 유안타증권) 출신인 김병철 부사장을 내정했고, 신한생명은 외국계 생명보험사인 오렌지라이프의 정문국 대표를 사장으로 내정했다. 올 1월 출범한 우리금융지주도 외부 전문 인력 수혈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국뿐 아니다. 글로벌 기술 기업인 인텔은 지난 1월 31일 로버트 스완을 CEO로 임명했다. 인텔 최초의 외부 영입 CEO다. 스완은 GE,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스, 이베이 등에서 재무관리자와 최고경영자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그동안 인텔은 장기 근무한 기술자 출신 ‘인텔맨’들을 중용했고, 오랫동안 내부 승진자를 CEO로 임명했다. 원천 기술에 대한 이해와 기술 혁신이 바로 매출 증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외부 인재를 통한 새로운 시각과 사업 전개가 중요해지면서 이러한 전통은 막을 내렸다.

신임 로버트 스완 인텔 CEO.

출처 : 인텔 홈페이지 캡처

“모든 것 섞이고 뒤바뀌는 시대에 순혈주의 강조는 망하는 길”


기업들이 순혈주의를 끝내고 외부 인재 영입에 몰두하는 이유는 비즈니스 환경이 이전과 많이, 그리고 빨리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I)의 발달, 자율주행과 공유 경제, 탈화석연료 등 기존 판을 뒤흔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들이닥치고 있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미래 먹거리 대비’와 ‘사업 영역 재조정’ 등의 이유를 들어 순혈주의 타파를 설명한다. 3M에서 부회장을 영입한 LG화학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LG화학은 전통적인 석유화학 업체에서 배터리와 정보전자소재 중심으로 사업 구조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주력 사업인 기초소재(화학) 부문 매출과 미래 사업인 전지사업 매출이 2021년쯤에는 역전되는 ‘골든크로스’가 예상된다. 외부인사 영입은 이러한 사업구조 재편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LG 측은 “계열사의 사업과 사람에 대한 미래 준비 지원에 중점을 두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하는 한편 경영진의 변화를 꾀하는 인사를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현대차가 해외 기업과 협업한 사례.

출처 : 조선DB

재계에서는 “이젠 순혈주의를 고수하다간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모든 것이 융합되는 4차 산업혁명에서 다른 업종과의 협업이나 인재 교류가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타 업체들과 협업을 하지 않고 순혈주의를 고집한 현대차그룹이 최근 3년 사이 바이두, 오로라 등 기술 기업이나 실리콘밸리 스타트업과 교류를 넓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글 jobsN 김성민

디자인 플러스이십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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