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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도 깜짝 놀랐다, 베트남 선수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 일

조회수 2020. 9. 27. 23: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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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매직, 밤을 잊은 노력
출처: 조선DB
베트남에 최초의 축구 국제대회 준우승을 안겨준 박항서 감독이 2018년 2월 4일 베트남 호찌민시 통낫경기장의 VIP 대기실에서 베트남 국기인 금성홍기 티셔츠를 입고 팔짱을 꼈다.

2018년 스포츠 분야 ‘올해의 한류(韓流)’ 상이 있었다면 당연히 박항서 감독이 수상했을 것이다. 그만큼 작년 한 해 ‘파파 리더십’을 앞세워 베트남을 동남아 축구 최강으로 끌어올린 박 감독의 활약은 폭발적이었다. 베트남 국영방송은 부임 1년 만에 자국 축구를 동남아시아 최정상에 올려놓은 박 감독을 ‘올해의 최고 인물’로 선정했다. 베트남 국영방송 ‘VTV1’이 해마다 뽑는 ‘올해의 최고 인물’에 외국인이 뽑힌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2017년 10월 베트남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박 감독이 ‘성공 스토리’를 쓸 것이라 예상한 이는 적었다. 그가 국내에서 성공한 지도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남, 전남, 상주에서 두루 감독직을 맡았으나 뚜렷한 성과가 나지 않았다. 결국 프로에서 실패하며 3부 리그인 실업축구 창원시청의 감독을 맡았다. 사람들 기억에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코치로 4강 신화에 힘을 보탰던 ‘박항서’라는 이름은 지워졌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박 감독은 괴로워했다. 2017년 지원서를 들고 이동준 디제이매니지먼트 대표를 찾아갔다.


도망치듯 베트남으로


“이제 한국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 동남아시아 팀이라도 좋으니 감독 자리를 알아봐 달라.”


2017년 10월 그렇게 도망치듯 베트남으로 갔다. 환대는 없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축구 이야기를 하는 베트남에서 얼굴도 모르는 한국 3부 리그 감독을 환영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두 명의 일본인 선임 감독이 실패한 터라 더욱 그랬다.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 감독은 지휘봉을 잡자마자 승승장구했다. 출전하는 대회마다 좋은 성적으로 베트남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2018년 초 아시아 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시작으로,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4강, 스즈키컵(동남아시아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동남아시아 최대 축구 대회) 우승까지 박 감독은 베트남 축구 역사에서 큰 획을 제대로 그었다. 한국 팬들이 ‘박항서’ 이름 세 글자에 열광하는 것은 이런 극적인 스토리 때문이다. 지난해 분위기를 유지한다면 2019년 기해년도 박 감독의 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성실함은 최고 무기

출처: 조선DB
지난 2002년 파주 NFC를 방문한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박 감독의 목을 끌어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박 감독의 성공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피와 살을 깎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특한 외모에선 형이나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라운드에 서면 지독한 승부근성을 내뿜는다. 선수 시절 박항서를 떠올려 보면 새로울 것도 없다.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그는 상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괴롭히던 악바리였다. 그의 노력은 선수 시절에도 빛을 발했다. 차범근, 최순호처럼 A급은 아니었지만 럭키금성(현 FC서울) 미드필더로 5시즌(20골-8도움)을 뛰었고 베스트11에 한 차례 뽑혔다. 1981년에는 국가대표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박 감독의 이야기다.


“자화자찬일 수 있겠으나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성실했습니다. 노력파에 가까운 선수였지요. 성격도 불같고 급하며 다정다감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가식은 없었지요.”


박 감독은 지도자가 돼서도 노력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의 영향이 컸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김호 감독의 국가대표팀 트레이터로 활동한 그는 1997년 수원 삼성에서 코치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2000년 국가대표 수석코치로 발탁됐는데 이때가 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위해 부임한 히딩크 감독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박 감독은 히딩크 감독이 선수 심리를 파악하는 능력에 매료됐다. ‘정치적 면모와 뛰어난 사회성’도 닮고 싶었다. 그를 ‘롤모델’로 삼았고, 일거수일투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히딩크 감독님은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제가 부족하다고 느낀 부분을 히딩크 감독은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지요.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는 보물처럼 아끼는 수첩들을 펼쳐 듭니다.”


수첩에는 히딩크 감독의 노하우가 그대로 담겨 있다. 효율적인 훈련법, 선수 관리, 경기 유형별 대처법, 하다못해 식사할 때 수칙까지 적혀 있다.


유창한 영어 구사 비결


박 감독은 2018년 스즈키컵 준결승을 앞두고 필리핀 감독인 스벤 예란 에릭손과 유창한 영어로 대화해 화제가 됐다. 2002년 히딩크 감독에게 영어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 감독은 영어 공부에 집중했다.


“히딩크 사단 출범 직후 전화로 영어 과외를 받거나 개인 교습을 받는 등 감독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대표팀 일정이 빡빡해 영어를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없긴 했지만 최선을 다했죠.”


2002년 당시 박 감독은 히딩크 감독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단어 위주로 말하는 소위 ‘조각 영어(broken English)’였지만 그는 ‘전투적’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박 감독은 어느새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지도자로서 영어는 경쟁력입니다.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도록 시간 나는 대로 공부하며 지도자로서 글로벌 무대를 대비했습니다.”


박 감독은 자신의 베트남 제자들에게도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선수들도 영어 하나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선다. ‘글로벌 시대’다. 더 넓은 곳에서 기회를 펼치려면 영어는 필수다.”

출처: 베트남 선수 SNS 캡처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베트남 축구 대표팀 선수가 공개한 박항서 감독의 발 마사지 영상.

스승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베트남 선수들은 삼삼오오 모여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깜짝 놀랐습니다. 선수들이 모여 인터넷으로 영어 공부를 하더군요. 너무 잘하고 있다고 박수 쳐 줬습니다.”


베트남 온라인 신문 ‘단트리’의 부이 티엔 국제부장은 “박 감독이 팀을 이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 선수들이 외국 언론과 영어로 인터뷰하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박 감독은 선수들을 아버지 같이 돌본다는 뜻의 ‘파파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부상당한 선수에게 직접 마사지기로 발 마사지를 해주는 박 감독을 진짜 파파라 부르는 선수도 있다. 정확히 말해 파파 리더십은 ‘박항서 매직’의 일부분이다. 마법 같은 지도력의 출발점은 ‘밤을 잊은 노력’에 있다. 박 감독은 스즈키컵을 치르는 동안 거의 매일 새벽까지 전략을 짰다. 선수들의 데이터에서 혹시나 간과한 부분은 없는지, 라인업과 전술 결정에 오류가 없는지 거듭 살폈다. 남다른 노력은 신들린 용병술로 열매를 맺었다.


“많은 분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과 비법, 특효약을 찾느라 적지 않은 시간을 씁니다. 베트남에서 제가 거둔 성과는 가장 평범하게, 기본부터 철저히 챙기고 노력한 결과죠. 지금 이 시간에도 힘들어하는 한국의 청춘들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공으로 가는 로열 로드(royal road)를 찾느라 귀한 시간을 허비 말라’는 것입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글 jobsN 최우석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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