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나온 남자가 동대문 DDP 건물에 칠을 하는 사연

조회수 2020. 9. 27. 23:3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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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프로젝터로 건물을 칠합니다. 공간예술 스타트업 'VERS'

2017년 8월31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둥근 외벽에 불빛이 들어왔다. 이내 사라진 불빛은 형형색색으로 깜빡이다 입체 도형으로 변하며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불빛은 한국의 전통 문양과 추상적인 도형을 뒤섞으며 동대문 한복판에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VERS는 ‘빛’을 통해 일상적인 공간을 꾸미는 일을 한다. 얼핏 보면 디자인 전공자나 건축학과를 나온 사람이 할법한 일. 그러나 VERS의 대표 유용준(30)씨는 ‘철학과’를 나온 문과생이다. 유 씨를 만나 VERS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다.


-VERS는 무슨 뜻인가


(유용준) “VERS는 시각적 경험을 뜻하는 ‘Visual Experience’, 가상현실을 뜻하는 ‘Vertual Reality’를 합쳐 줄인 말이다. 시각 예술을 통해 자주 접하는 일상 공간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사람들에게 제공하겠다는 뜻이다.”


-VERS에서 하는 일은?


(유)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과 VR영상 제작, 기술 개발을 한다. 가장 힘쓰고 있는 일은 프로젝션 맵핑이다. 미디어 예술의 한 분야로, 프로젝터로 빔을 쏴 벽이나 기둥·바닥 등 공간에 ‘시각 예술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다. 넓은 공간을 맵핑으로 뒤덮으면 보는 사람은 새로운 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출처: 본인 제공.
VERS 유용준 대표.

VR 영상 제작도 주력 분야다. 360도 카메라 등을 활용해 VR과 접목시킬 수 있는 영상을 찍고, VR 관련 기술을 개발한다. 애초에 가까운 미래에 열릴 VR 시장의 수익성을 바라보고 시작한 사업이다. 물론 VR 상용화를 위해 장비 간소화, 컴퓨터 그래픽 혁신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지금은 VR 시장이 활짝 열리면 활용할 수 있는 영상을 미리 모아두고 있다.”


-프로젝션 맵핑을 위해 어떠한 장비를 사용하는가.


(유) “맵핑을 위해 필요한 장비 종류가 많거나 복잡하진 않다. 오히려 어려운 것은 ‘장소 선정’이다. 맵핑을 허락 받지 않은 곳에 빔을 쏠 수는 없으니 작품을 전시할 공간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미술관 같은 전시실, 건물의 외벽, 크고작은 조형물 모든 곳을 맵핑을 위한 도화지로 쓸 수 있다.

출처: VERS 유튜브 캡처.
프로젝션 맵핑을 이용해 DDP 외벽을 전시한 장면.

사용하는 장비는 일반적인 맵핑을 할 것이냐, 인터랙션(interaction·상호작용) 맵핑을 할 것이냐에 따라 약간 다르다. 일반적인 맵핑을 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터와 컴퓨터 정도만 있으면 된다. 물론, 사무실·교실에서 사용하는 프로젝터보다 강한 것을 사용한다. 이런 곳의 프로젝터가 보통 2000안시(빔 세기를 측정하는 단위) 정도인데, 맵핑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5000안시 이상 장비가 필요하다. 영화관에서 사용하는 프로젝터가 약 2만 안시 정도다.


인터랙션 맵핑의 경우 추가적으로 센서를 사용한다. 사람이 움직이면 프로젝터가 쏘고 있는 그림의 내용이 바뀔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젝터와 벽 사이를 사람이 지나가면 그 순간 벽에는 그림자가 생겨 깜깜한 상태가 된다. 빛이 벽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의 변화 등을 포착해 자동으로 내용을 변경해주면 사람들은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를 응용하면, 연필이나 커피잔 등 소품을 들었다 놓으면 화면이 바뀌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전시·교육 등 많은 분야에 활용 가능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전시는


(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했던 전시다. 우리가 처음으로 의뢰를 받고 한 전시여서 기억에 남는다. 2017년 8월31일부터 9월6일까지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서울건축문화제,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서울세계건축대회의 동시 개최를 기념해 ‘건축과 도시’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우리는 그때 DDP 외벽을 프로젝션 맵핑으로 전시했다. DDP가 가진 미래적인 이미지와 한국의 전통 이미지를 조화해 작품을 만들었다. 

작업이 어려웠기 때문에 DDP 전시가 기억에 남기도 한다. 우리는 보통 평면에 맵핑을 해왔다. 그러나 DDP 외벽에는 곡면이 많다. 평면에 빔을 쏴 맵핑을 하는 것보다 곡면에 끊기지 않는 그림을 맵핑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장비가 비싸지는 않은지.


(유) “프로젝터를 마련하는 것이 비싸다. DDP 전시 때 약 10일 동안 프로젝터 6대를 빌렸는데 2500만원이 들었다. 교실에서 사용하는 프로젝터처럼 작은 사이즈부터 어린아이만한 크기까지 프로젝터의 크기는 다양하다. 보통 의뢰주와 계약을 할 때 의뢰주가 프로젝터 대여비까지 낸다. 센서 비용은 보통 한 개에 2000원이어서 큰 부담이 없다.”


-어떤 VR 영상을 제작하는가.


(유) “360도 카메라를 통해 어느 공간을 촬영한다. 언젠간 사라질지 모르는 공간을 영상으로 저장해놓는 것이 목표다. 360도 카메라는 직육면체처럼 생겼다. 각 면에 카메라가 하나씩 달려, 한 번 촬영에 6개 영상이 나온다. 이 영상들을 붙이면 촬영 공간의 모든 면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 나온다. 

360도 카메라를 통해 영상을 틀면, 게임을 하듯 영상 속 공간 구석구석을 이동해볼 수 있다. 건물이나 공간은 언제 어떻게 없어지고 바뀔지 모른다. 이를 통해 꼭 그 공간에 가보지 못해도 세운상가처럼 오래된 건물부터, 서울식물원까지 탐색해볼 수 있다. 이후 VR 기술이 발전하면 우리가 360도 카메라로 찍은 공간 속으로 들어간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작업을 하는 데 미술감각도 중요할 것 같다.


(유) “그렇다. 원하는 모양을 표현하기 위해 미술을 전공한 디자이너를 두었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총 6명이다. 콘셉트를 설정하기 위해 모든 직원이 회의를 한다. 전시나 행사를 앞두고 우리가 회의해 원하는 콘셉트나 모양을 설명하면 디자이너가 이를 그린다. 디자이너가 그린 결과를 바탕으로 건축학을 전공한 직원들이 이를 전시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곡면이 많은 DDP의 벽에 빔을 쏴 자연스럽게 재현하려면, 건축공학적 계산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작품을 구현한다.  

출처: VERS 홈페이지 캡처.
VERS의 직원은 총 6명이다.

DDP 전시 때는 한국의 전통 문양을 구현했다. 또 2018년 ‘제주국제건축포럼’에서는 각각 섬인 오키나와, 기타큐슈, 대만, 제주도 건축물의 특성을 살려 이들이 혼재한 제5의 섬을 만들었다”


-학부 때 철학을 전공했는데 도움이 되는가?


(유) “철학과에서 배운 지식 자체가 많은 도움을 주진 않는다. 다만 철학과에서는 자꾸 어떤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질문하는 연습을 시킨다. 이런 의문을 갖는 것을 습관화하는 것으로부턴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맵핑도, VR영상 제작도 ‘이곳을 왜 찍어야 하는지’ 자꾸 물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맵핑과 VR 사업을 시작했나.


(유) “대학교 2~3학년 시절부터 콘텐츠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에 진학할 만큼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기업에 취직하기 보다는 스스로 원하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2014~2015년을 지나며 VR과 프로젝션 맵핑을 접했다. 항상 새로운 내용과 디자인을 개발해야 하는 VR영상과 맵핑에 큰 흥미를 느꼈다. 2016년 봄, 학내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인 GCTI에 참여했다. 당시 GCTI 주제가 VR이었다. ‘VR 루밍(Rooming)’아이디어를 내 금상을 받았다. VR 기술로 미니홈피처럼 각자의 방을 만든 뒤 서로 방문할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였다.”


-맵핑과 VR을 배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유) “해외 유튜브 채널을 통해 3D 영상 제작 프로그램인 ‘시네마 4D’와 ‘옥테인 렌더러’를 배웠다. 시네마 4D는 CG화면의 밑그림을 그릴 때 사용한다. 옥테인 렌더러는 시네마 4D로 그린 밑그림에 현실적인 질감과 색을 더해 준다. 두 프로그램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렸다.” 

-회사의 수입은


(유) “VERS는 올해 2년째 된 사업이다. 첫해에는 매출이나 수입이 거의 없었다. 2년차 매출은 5억원이었다. 2018년 상반기에 착공을 시작할 현대자동차 그룹의 GBC 타워의 홍보 영상 제작을 따낸 것이 큰 성과다. VR영상 제작 의뢰를 통해서도 수입을 올린다. 한 건물 안에서 촬영이 한 번 이뤄지는 장소를 ‘스팟’이라 한다. 한 스팟당 촬영비는 250만~300만원이었다. 세운상가 같은 경우 10스팟 촬영을 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유) “인터랙션 맵핑을 통해 어린아이들 교육용 프로그램을 만들어볼 예정이다. 예를 들어, 프로젝터로 빔을 쏘는 곳에 어느 물건을 놓으면 다리·도로·건물이 생긴다던지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도시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글 jobsN 정경훈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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