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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강사'로 불리며 수십억 빚 갚던 스타 영어강사의 반전 근황

조회수 2020. 10. 4. 14:4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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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영어강사에서 영상PD로, 문단열의 새로운 도전
사다리필름 문단열 대표
스타 영어강사에서 영상PD로 인생 2막
"장인 정신 있는 회사 만들고파"

영어 공부에 예능을 접목해 2000년대 스타강사로 떠오른 문단열(55)씨. ‘영어 공부는 재밌어야 한다’는 원칙을 국내에 전파한 인물이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EBS ‘잉글리시 카페’는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강사 말고도 여러 출연자가 나와 수다를 떨고 상황극을 했다. 라이브 밴드 반주에 맞춰 마치 랩을 하듯 리듬 위에서 영어를 갖고 놀았다. 당시 유행어인 ‘엽기’를 붙여 그를 ‘엽기 강사’라 불렀다.


15년 넘게 영어강사로 사랑받았던 그가 2017년 12월 ‘잉글리시 클리닉’ 방송을 끝으로 교육계를 잠시 떠났다. 최근 tvN '아찔한 사돈연습'에 딸과 함께 출연 중인 그의 직업은 영어강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영상 PD로 살고 있다. 2016년 영상 제작사 ‘사다리필름’을 창업했다. 나이 50이 훌쩍 넘어 도전한 중년 창업이다. 유명 영어강사라는 명성을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카메라 앞에 섰던 그가 이젠 카메라 뒤에 선다. 그와 함께하는 직원 수는 5명. 서울 신촌의 한 건물 한편에 자리 잡은 사다리필름 사무실에서 문 대표를 만났다. 

출처: jobsN
문단열 사다리필름 대표.

3번의 퇴짜, 3번의 사업 실패 그리고 다시 도전


연세대학교 신학과 4학년 재학 중 강남에서 영어 강사로 교육계에 입문했다. 방송 속 쾌활한 이미지 때문에 실패 한번 안 겪어 봤을 법하다. 하지만 그가 유명 강사 자리에 오르기까지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2년 EBS에서 영어 방송을 진행하기 전까지 무려 7년간 물을 먹었다. “당시 제작진이 신선한 인물을 섭외하려고 학원 강사들을 찾아다녔어요. 제게도 연락이 와서 오디션을 보러 갔죠. PD나 작가들 반응은 좋은데 막상 연락이 안 옵니다. 3차례나 막판에 엎어졌어요.”


내세울 만한 ‘타이틀’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비전공, 비유학, 비석사 출신이라는 점이 걸림돌이었다. 그는 실력으로 승부하기 위해 이름을 가렸다. 2000년 포털 시대가 열렸다.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강의 영상을 찍었다. 강의명은 ‘김치발음에 빠다를 발라주마’. 본명 대신 ‘문피디’라는 예명을 썼다.


“다음, 야후, 라이코스 등 포털에 있는 교육 탭에 영상을 올렸어요. 무료강좌 인기 순위 1위를 계속하니까 재능방송에서 방송을 같이 해보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때도 저는 얼굴과 이름을 가렸어요. 다른 강사를 출연시키고 저는 중간에 잠깐 등장해 발음만 하고 사라지는 ‘솰라맨’을 맡았습니다. 이 방송을 보고 EBS에서 다시 연락이 왔어요.”


이번엔 통과였다. 하지만 그는 방송을 녹화할 때도 믿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또다시 미끄러질 거라 생각했어요. 첫 방송 나가고 나서야 ‘진짜 하나보다’ 싶었습니다.” 두 달간 임시 방송으로 시작했던 잉글리시 카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시청률 4%라는 기록을 세웠다. EBS에선 시청률 2%대만 나와도 대박이라 말할 때였다. 이후 MBC 뽀뽀뽀, EBS 라디오 브레인 팝스 등을 진행하며 스타 강사로 자리를 굳혔다.

출처: EBS '잉글리시 카페' 캡처
문 대표가 영어강사 시절 진행했던 '잉글리시 카페'는 영어 교육 예능이었다. 쇼 형식을 빌려 재밌게 영어 회화를 배울 수 있도로 했다. 스튜디오에 시청자를 초대해 영어를 함께 배웠는데, 프로그램에 출연하려면 20~30대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할 정도였다.

그는 사업 실패도 혹독하게 경험했다. 1994년 문을 연 학원이 IMF 여파로 망했다. 이때 수십억원의 빚을 떠안았다. 스타강사로 이름을 날리며 한 해 4억원 정도를 벌었지만 청춘도 돈도 오롯이 빚 갚는 데 썼다. “2000년대 초반 닷컴시대에는 영어회화 사이트 펀글리시 닷컴을 열었습니다. 한해 20억~30억원 매출이 났지만 방송 때문에 바빠서 경영에 신경을 쓰지 못했고 흑자도산했어요. 이후 홈쇼핑 사업도 했지만 잘 안됐습니다.”


그는 다신 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랬던 그가 영상 회사를 차린 이유는 순전히 영상이 좋아서다. “원래 유명 강사가 돼야겠다 맘먹었던 건 아닙니다. 어릴 적 꿈은 PD였어요. 영어를 가르치는 일은 두번째로 좋아하는 일이고, 첫번째로 좋아하는 일이 사진 찍고 영상 만드는 일이에요.”


2012년부터 자신의 강의 영상을 직접 제작했다. 영상 제작도 마케팅도 독학했다. 내친김에 메가스터디·에듀박스·야나두 등에 강의 영상을 납품했다. 반응이 좋았고 자신감이 붙었다. 2016년부터는 영어 강의에 국한하지 않고 상업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큰돈을 들여 영상을 만들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을 주 고객으로 했다.  

사다리필름 제공

외국계 광고대행사를 찾아가 ‘작은 거라도 맡겨달라’고 했다. 창업하고 1년 동안 어디에도 알리지 않고 자신을 숨겼다. “계급장 떼고 청년들과 붙어보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진 강사라지만 영상은 처음이었습니다. 저와 만난 외국계 대행사 부사장은 제가 영어 강사인지 몰랐고 ‘대체 왜 하려고 하냐’고 물었습니다. 제 나이에 다른 사람이라면 은퇴했을 시기라면서요.”


그가 영상 PD로서 맡은 첫 작업은 연세대학교 영문과 동창회 스케치 영상이었다. 의뢰 제작비는 50만원. 직접 카메라를 들고 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회를 보러 온 전현무씨가 ‘선생님 여기서 뭐하시냐’고 하더라구요.”


이후 제작한 중소기업 영상들의 반응이 좋았다. 세계적인 가구 기업 이케아, 구인구직사이트 알바몬에서도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아직까지 내세울 만한 매출은 아니어서 공개가 어렵지만, 2019년 1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출처: 사다리필름 제공
사다리필름 창업 전 만들었던 영어 교육 영상과, 사다리필름 창업 후 만든 이케아, 알바몬 영상.

"그 사람과 그 기업의 옷을 입고 만든다"


의뢰가 들어오면 먼저 하는 일이 ‘면담’이다. 미팅이 아닌 면담이라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고객사가 요구하는 건 영상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영상 제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영상이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마케팅’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에요. 마케팅을 이야기하려면 경영철학이나 비전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고객이 처음엔 진짜 목적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실은 기업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게 먼저일 수 있고 얼굴을 알리는 게 목적일 때도 있어요. 고객이 숨긴 ‘진짜 니드(need)’를 찾는 게 첫번째 단계입니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첫 면담에만 2시간 넘게 걸린다. 며칠 동안 고객사를 공부하고 심층취재한다. 예를 들어 책 홍보 영상을 만든다 하면, 저자가 쓴 모든 책을 읽고 기사나 강연 영상을 샅샅이 찾아보는 식이다. 고객사를 A부터 Z까지 완전히 파악하면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박사는 상담 내용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꾸준히 올리고 싶다고 의뢰했어요. 저희가 파악한 캐릭터는 차분하고 진솔하면서 소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캐릭터가 잡히면 미장센(구도나 배경을 통한 화면 연출)도 함께 잡힙니다. 감성적인 이야기가 주내용이기 때문에 낮보다는 저녁에, 어두운 서재에서 따뜻한 조명으로 찍기로 했죠. 또 재촬영 없이 한번에 찍어서 포장하지 않은 진실성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영상을 만들 때만큼은 그 사람의 옷을 입습니다.”


영상마다 고유 스토리텔링이 있어 개성이 드러난다.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전략은 큰돈을 들여 홍보 영상을 만들기 힘든 중소기업·스타트업에도 효과적이다.


사다리필름의 차별점은 ‘지성’이다. 스토리텔링이 살아 있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저희는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 데 자신 있습니다. ‘북트레일러’가 대표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조회수가 몇십만 건 나옵니다.” 북트레일러란 책 소개 영상이다. 영화 트레일러처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

출처: 각 북트레일러 영상 캡처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의 책 '뇌는 춤추고 싶다' 북트레일러와 김정운 박사의 책 '에디톨로' 북트레일러. 장 박사의 경우 분홍색 장막 뒤에서 장 박사가 춤을 추는 모습이 등장한다. 전문 댄서가 아닌 아재 댄스 느낌이어서 묘한 친근감이 든다. 김 박사의 경우 여수 바닷가에서 촬영을 했다. 자유로움, 마이웨이의 행복 등을 스케치하는 손,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표현했다.

사다리필름이 차별성을 갖기까지 치열한 고민이 있었다. “제가 영상 만드는 게 재밌어서 시작했지만 함께하는 직원이 있으니 더이상 재미만 따질 수 없었습니다. 과거 제가 회사를 운영할 때는 기업가 정신이나 상업 마인드가 부족했어요. 회사를 계속 운영하려면 저희의 정체성, 경쟁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덤벼야 했습니다.”


국내에는 수많은 영상 회사가 있다. 이들은 저마다 품질 또는 가성비를 강조하며 경쟁한다. “저희 같은 작은 회사가 노력할 때 대기업은 훨씬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구글에도 영상제작팀이 있어요. 이 말은 구글이 직접 광고를 만들고 구글에 올린다는 겁니다. 작은 회사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따라잡기가 힘들죠. 영상 제작 품질은 상향 평준화된 지 오래에요. 초공급·초복제 사회에서 저희가 살아남으려면 ‘개성’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카피(copy) 할 수 없는 영상을 만들어야 하죠.”

출처: jobsN, tvN 영상 캡처
최근 tvN '아찔한 사돈연습'에 딸 문에스더씨와 출연했다.

빠른 성장보다는 장인 정신이 있는 회사


앞으로 영어 강의를 하지 않겠다 선언한 건 아니다. “지금은 영상을 만드는 일이 좋아서 집중하고 싶습니다. 또 이젠 영어 교육이 조심스러워요. 알면 알수록 영어 공부의 왕도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발하고 싶은 영어교육이 있긴 하지만 아직은 여건이 미비하다고 봅니다.”


대신 교육자로서의 경험을 사업에서 발휘하고 있다. 그는 한달에 한번 ‘홍차(홍보격차) 해소’라는 세미나를 연다. 대기업에 비해 마케팅 역량이 떨어지는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 재직자 또는 마케터 지망생이 참석한다.


영상 촬영법 등을 고객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 분야는 ‘콜라보’라고 부릅니다. 기업에서 직원들이 휴대폰으로 찍은 영상이 있는데 편집해줄 수 있냐는 의뢰를 받았어요. 첨엔 거절했는데 이 시장이 생각보다 크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후 저희가 ‘어떤 식으로 찍어 오라’고 시나리오를 주고 영상 찍는 법도 알려드립니다. 이후 편집만 저희가 하는데 고객 만족도가 높아요.”

출처: 사다리필름 제공
(왼쪽부터) 서울 신촌에 있는 사무실 초창기 모습과 회의하는 모습. 인테리어는 문 대표와 직원들이 직접 했다.

고객 의뢰가 늘면서 문 대표의 어깨가 무겁다. 직원들은 과거 문 대표와 함께 작업한 인연이 있다. 문 대표와 함께 회사를 이끌고 있는 안효리 PD는 대학교 2학년 때 아르바이트생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아무리 잘해도 저는 20대보다 디지털 감각이 떨어져요. 중년의 장점인 종합적 안목과 분석력은 있지만, 창의력과 기술력은 젊은 직원들이 월등합니다.”


일하기 좋은 문화를 만들기 위해 주 4일제를 도입했다. “고객사와 계약할 때 여유 있게 제작 기간을 말하는 편이고, 애초 계획을 잘 짜면 충분히 주 4일이 가능합니다. 월요일에 마감하면 주말에 일해야 하니까 보통 화·수에 마감하는 등 원칙도 있어야 해요.”


그의 목표는 빠른 성장보다는 장인 정신이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다. “성장성·효율성을 우선하면 영상의 개성이 사라지고, 그러면 저희 경쟁력도 사라질 거예요. '어디에도 없는 개성 있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면 오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고집과 정체성이 녹아있는 장인의 제품처럼요. 다만 저는 경영자로서 장인 정신을 갖는 건 무리가 있다 봅니다. 전 상인이 되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지원하겠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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