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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터졌을 때도, 쓰나미 났을 때도 그곳엔 이 한국인 있었다

조회수 2020. 10. 4. 16: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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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사진 찍는 일이 직업입니다
중미 이주민 ‘캐러밴’ 찍어 주요 외신 장식
동남아 쓰나미·후쿠시마 원전 현장도 갔다
17년 동안 전 세계 다니며 사진 찍어

미국과의 접경지역인 멕시코 티후아나에 최루탄이 떨어진다. 국경을 넘으려는 중남미 이주민 ‘캐러밴’을 막기 위해 미군이 발사한 것이다. 기저귀를 찬 두 아이는 맨발에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다. 다급해진 엄마가 아이의 팔을 붙잡고 도망친다. 이 장면을 뉴스통신사 로이터의 사진기자가 카메라에 담았다. 지난 11월25일 찍은 이 사진은 전 세계 주요 언론의 머리 기사에 실렸다. 

출처: WP 홈페이지 캡처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김경훈 기자의 사진.

촌각을 다투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은 로이터 사진기자는 한국인 김경훈(44) 기자다. 사진이 유명해지면서 뉴욕타임즈·타임·피플지 등에서도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김경훈 기자는 로이터통신의 도쿄지국에서 일한다. 1993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해 보도사진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일간스포츠에서 일을 시작해 3년 정도 일하고 로이터통신으로 이직했다. 그에게 사진기자의 삶에 대해 물었다.

출처: 김경훈씨 제공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방사능 유출로 인한 출입금지 지역에서 방호복을 입고 취재했다.

-지금까지 다닌 현장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로이터통신 서울지국에서 일했다. 2002년·2006년 월드컵과 2004년 동남아시아에서 쓰나미 피해가 있을 때 인도네시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현장을 취재했다. 2007년부터 2013년까지 도쿄지국에서 근무할 때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현장에도 있었다. 2010년 태국의 반정부 시위 현장도 다녀왔다. 2013년부터 2016년 7월까지 베이징 지국에서 일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양쯔강 여객선 전복 사고 현장 등에 갔다. 2016년 7월 도쿄지국으로 돌아와 평창올림픽·멕시코 캐러밴 등을 취재했다.”


-보도사진을 전공한 이유는.


“대학교 3학년 때 순수·광고·보도사진 3개 전공 중 보도사진을 선택했다. 사진을 통해 남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보고 사진기자의 삶을 동경했다. 로버트 카파는 스페인내전·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한 사진작가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셔터를 눌렀다. 기자정신을 뜻하는 '카파이즘'(Capaism)은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는 동안 사진기자가 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로버트 카파의 작품 '쓰러지는 병사'. 김경훈 기자는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보고 사진기자를 꿈꿨다.

-사진기자는 사진을 어떻게 찍나.


“눈 앞에서 상황이 벌어지면 일단 찍는다. 상대방에게 동의를 구하는 순간 간섭이 일어나 표정·행동 등이 바뀐다. 사진을 찍은 뒤에 나를 소개하고 사진을 찍은 취지를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사진을 기사에 써도 괜찮냐고 묻는다.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은 적다. 자신의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멕시코에서 캐러밴을 취재할 때는 이주민 행렬을 2주 동안 쫓아다녔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먼저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분명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위험 지역을 취재하는 기자들은 특수부대 출신 전직 군인 등 전문 강사한테 위험지역 생존법 등을 교육받는다. 지금까지 큰 사고는 없었다. 존중하는 자세로 취재를 하면 상대방도 진정성을 알아본다.”


-기억에 남는 취재는.


“2015년 6월 중국 양쯔강에서 유람선이 침몰했다. 중국 정부가 언론 통제를 해서 취재가 어려웠다. 정부 감시망을 피해 현장 인근 갈대숲으로 들어갔다가 온 몸에 벌레가 달라붙어 고생한 적이 있다. 최근 캐러밴을 취재했을 때는 멕시코시티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차로 갈아타 25시간을 달려 국경으로 갔다. 이동 중에 한 시간 밖에 못 잤다.


2014년 세월호 사고 때는 아이가 있는 아버지로서 가슴이 많이 아팠다. 어떤 현장이든 공정한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관찰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려고 한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여러 재난·재해 현장에서 유족 분들을 만나다 보면 가슴이 착잡해질 때가 많다.”

-무슨 장비를 쓰나.


“기본적으로 카메라 바디(몸체)와 렌즈 2개씩 챙긴다. 바디는 회사에서 쓰는 캐논 EOS 1DX와 5D 2개를 가져간다. 렌즈는 28~70mm 광각 줌렌즈와 70~210mm 망원 렌즈를 쓴다. 예비용 카메라도 챙긴다. 취재 도중 카메라가 고장날 수 있어서다. 취재 현장에 가기 전 머릿속으로 어떤 사진을 찍을지 생각해본다.


가령 중남미 이민자 행렬을 찍으면 이들이 강을 건널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방수 관련 기자재를 챙겼다. 수백명이 열을 지어서 행진할 수도 있으니 이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100~400mm 장초점 렌즈도 가져갔다. 오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취재하기 전에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예상할 수 있다. 사진 전송을 위해 노트북도 챙긴다.”


-위험수당도 있나.


“위험수당은 없다. 통역·운전사 등 현지에서 필요한 것은 회사가 아낌 없이 지원해준다. 정기적으로 생존 훈련 교육도 받는다. 혼자 힘으로 응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등을 배운다. 현장에서 보거나 겪은 일로 정신적 충격을 받고 트라우마가 생긴 직원을 위해 심리 상담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출처: VICE 뉴스 유튜브 캡처
멕시코 티후아나 국경 지대.

-일하면서 언제 가장 뿌듯한가.


“동남아에서 쓰나미가 났을 때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만났다. 난민캠프에 머무르던 아이를 찍은 사진이 인도네시아 지역 신문에 실렸다. 아이의 행방을 몰랐던 가족이 사진 설명에 적힌 장소를 보고 찾아간 것이다. 상봉한 가족이 현지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사진 덕분에 가족을 만났다’고 했을 때 보람을 느꼈다.


메시지가 있고 미학적으로도 좋은 사진을 찍었을 때 성취감을 느낀다. 내가 찍은 사진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때도 뿌듯하다. 많은 사람이 보거나 역사에 남을 만한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진으로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할 때 행복하다.”


-힘들었던 적은 없었나.


“심리적으로 힘들 때가 많다. 2010년 태국에서 ‘레드 셔츠’라 부르는 반정부 인사들이 격하게 시위를 했다. 카메라맨이었던 친한 일본인 동료가 현장에 같이 있다가 총에 맞아서 사망했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취재하고 싶은 현장이 있나.


“큰 사건이 일어난 게 아니면 현장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날그날 취재에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평범한 기자회견장에 가도 새로운 구도를 찾아서 사진을 찍는다. 전 세계를 다녔지만 아직 평양은 한 번 밖에 못 가봤다. 앞으로 남북관계가 달라지고 북한도 바뀐다면 북한 취재를 더 해보고 싶다.”

김경훈씨 제공

-사진기자는 어떻게 하나.


“사진기자는 ‘비주얼 스토리텔러’다. 스토리텔링 능력이 중요하다. 좋은 사진을 찍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사진에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사진기자를 꿈꾸는 후배를 가르친 적이 있다. 사진을 왜 찍었냐고 물어보면 ‘사진을 찍는 대상이 미관상 보기 좋아서’ 또는 ‘당장 눈 앞에 있어서’라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셔터를 누르기 전에 먼저 취재하려는 사람이나 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촬영 기술은 기본이고 인문학적 소양도 쌓아야 한다.


동료나 선후배 중에서 사진을 전공한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학교 동기 60명 중에서 사진기자를 하고 있는 사람은 10명 미만이다. 회사에서도 20~30% 정도만 사진 전공자 출신이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많이 찍어보고 독학한 사람들이 많다.”


-사진기자를 꿈꾸는 청년에게 조언 한 마디.


“영상 콘텐츠 수요가 늘고 있다. 나도 사진기자이지만 가끔 비디오 취재도 한다. 앞으로 ‘포토 저널리스트’라는 말보다 ‘비주얼 저널리스트’라는 말을 더 자주 쓸 거다. 전 세계를 다니며 취재하려면 외국어 실력도 중요이다. 나는 영어·중국어·일본어도 한다. 외국어를 할 줄 알면 현지에서 더 깊이 있는 취재가 가능하다.”


글 jobsN 송영조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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