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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전 유럽땅 처음 밟은 국밥집 막내, 지금 이렇게 됐습니다

조회수 2020. 10. 4. 16:4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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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외식업계 주름잡는 한인 사업가
아카키코(AKAKIKO) 전미자 회장
오스트리아 대표 아시안 음식점
유행에 민감한 요식업계에서 살아남은 비결

아시안 퓨전 음식점 아카키코(AKAKIKO)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큰 아시안 외식업체다. 1994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형 복합쇼핑센터 SCS(Shopping City Sud)에서 66㎡(약 20평) 짜리 작은 가게로 시작했다. 20여년 후 오스트리아에만 17개 매장을 둔 음식점으로 성장했다. 연매출은 2500만 유로(약 320억원). 하루 6000~7000명의 고객이 방문한다. 오스트리아 인구수(875만명)가 한국(5180만명)의 6분의 1 정도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아카키코는 고급 한식당 요리(Yori) 2개 지점도 운영하고 있다. 2018년에는 직장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음식점 다스 김치(Das Kimchi)를 시작했다. 아카키코, 요리, 다스 김치를 합해 직원수가 350명을 넘는다.


오스트리아 외식업계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은 아카키코 전미자(61) 회장이다. 전북 부안의 작은 국밥집 9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1979년 간호사 자격증을 들고 오스트리아 땅을 밟았다. 채소 가게, 불고기 식당, 안경 사업 등을 하다 초밥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2007년 하인츠 피셔 오스트리아 대통령 방한 때 경제인으로 동행했다. 2015년에는 로마 교황청 프란시스코 교황 방문단으로 참여했다.

출처: 전 회장 제공
아카키코, 요리, 다스 김치를 운영하는 전미자 회장. '아카키코'는 전 회장이 지은 말로 일본어가 아니다. 발음이 쉽고 들으면 초밥을 연상케 한다.

날생선 못 먹는 초밥 음식점 사장님


오스트리아는 중앙 유럽 알프스산맥에 있는 내륙국이다. 독일·체코·헝가리·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전 회장이 아카키코를 열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인에게 날생선은 낯선 음식이었다. 전 회장 자신조차도 날생선을 싫어했다. “창업 아이템으로 스시(초밥)를 택한 이유는 간편했기 때문입니다. 생선이 신선하고 밥만 잘 지으면 맛있는 초밥을 만들 수 있어요. 또 90년대 중반만 해도 유럽에서 일식이 보편적이지 않아 오스트리아인이 주목할 만한 차별점도 있었죠.”


회를 싫어하기 때문에 더 깐깐하게 재료를 고를 수 있다. “싱싱한 생선이 아니면 제가 못 먹습니다. 메뉴를 개발할 때 토할 만큼 회를 먹어봤어요. 지금도 노르웨이에서 비행기로 연어를 가져옵니다. 이외 생선은 태국·필리핀, 지중해에서 와요.”


맛과 위생은 기본이고 예쁘고 먹기 간편해야 음식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손님이 음식을 먹기 전 기대하게 만들어야 한다. “음식을 처음 받았을 때 예뻐야 해요. 스시 세트도 주홍 연어, 붉은 참치, 노란 계란, 검정 마끼(김으로 싼 초밥) 등으로 색깔을 알록달록하게 구성합니다. 집어서 먹기만 하면 되니 간편하죠. 가격대도 부담 없어요. 점심때 스시 세트와 음료수 한개를 먹으면 15~17유로(약 1만9000~2만2000원)입니다.” 초밥 4개와 마끼 4개가 들어있는 스시 세트는 20여년 넘게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출처: 아카키코 공식 페이스북
아카키코 메뉴 일부.

사람이 몰리는 번화가에서 아카키코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비엔나에만 13개 지점이 있습니다. 비엔나 근교에 1개, 한국으로 치면 충청도인 린츠(Linz)에 2개, 제2의 도시인 그라츠(Graz)에 1개가 있어요. 오스트리아 고객이 99%입니다.” 한국인 등 동양인 관광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음식점이 아니라, 현지에 스며든 오스트리아 음식점이다.


유행에 민감한 요식업계에서 25년 동안 살아남은 비결은 철저히 손님 반응을 따르는 것이다. ‘일하면서 배운다(Learning by working)’는 원칙이다. “식사 전에 먹는 숙주나물이 있는데 맨 처음에는 푹 삶아서 내놨습니다. 인기가 없었어요. 손님에게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면서 조리법을 수십번 달리했습니다. 지금은 끓인 물에 잠깐 집어넣었다가 건지고 소금, 마늘가루 등으로 간을 해서 내놓습니다.”


아카키코에선 150가지 음식과 디저트를 판다. 초밥으로 시작했지만 한식, 중식, 태국 음식 등 동양 음식 가짓수를 늘려갔다. 3개월마다 신메뉴를 내고 팔리지 않는 메뉴는 과감히 없앤다. “손님이 오면 테이블에 종이를 까는데, 새로운 메뉴가 적혀있습니다. 2주마다 새로운 음식을 내놓고 반응이 좋으면 3개월 후 정식 메뉴로 올립니다. 손님 반응에 따라 빨리 행동해야 합니다.” 

출처: 아카키코 제공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2017년 우수 기업가상을 받았을 때,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피크닉, 교황과의 만남, 한국에서 창업 강연을 할 때. 전 회장은 1년에 1~2번씩 대학에서 창업 특강을 한다.

대기손님에게는 퍼주고, 먹는 법 일일이 알려주고


부안여고 졸업 후 초등학생에게 주산과 부기, 산수, 피아노 등을 가르치는 보조교사로 일했다. 이후 삼양라면 영업부에서 일하면서 간호학을 공부해 간호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비엔나에서 유학하던 남편을 따라갔다. 한동안 양로원에서 일했다.


첫째 딸을 낳고 나슈마르크트(Naschmarkt)라는 재래시장에서 채소가게를 운영했다. 이때부터 장사꾼 기질을 발휘했다. “스물여섯살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제가 독일어를 잘 못했어요. 종이에 독일어, 헝가리어, 터키어 인사말과 채소 가격을 써놓고 벽에 붙여서 달달 외웠습니다. 소리 지르면서 호객행위를 했어요. 그 시장에서 동양인은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본 아시아 여성이 소리를 지르니 신기했을 거예요."

출처: 전 회장 제공
양로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둘째 아들을 낳았을 무렵에 불고기 식당도 열었다. 설거지·서빙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유명 배우가 단골로 오는 등 장사가 잘 됐다. 3년 동안 온몸을 바쳐 일했다. 하지만 1985년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하고 가게를 접었다. 이후 화학회사 영업부에서 서무로 일했다.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한국 대구에서 안경테를 떼다 오스트리아에서 팔아보기도 했지만 성과는 좋지 않았다. 경제학 박사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셋째 아들과 막내딸을 낳고 다시 사업에 도전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아이 4명이면 일을 안 해도 정부 보조금이 충분히 나옵니다. 하지만 도전하고 싶었어요. 남편과 가족들도 응원해줬습니다. 제가 모은 돈,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빌린 돈, 은행 대출금 등으로 자본금 200만 실링(3억원)을 마련해서 가게를 냈어요.”  

출처: 아카키코 제공
키프로스점, 오스트리아 SCS에 있는 멀티플렉스점

독일 호텔에서 20년간 일한 태국인 셰프와 메뉴를 개발했다. 초밥은 신선한 생선과 밥만 있으면 가능했지만, 밑반찬 복병이었다.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어요. 고춧가루는 고사하고 배추도 없었습니다. 무말랭이, 고사리 등은 한국에서 가져왔어요. 지금 재료의 80%는 오스트리아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오픈 행사로 손님에게 초밥을 맛보게 했더니 반응이 좋았다. 문을 연 첫날부터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직원수는 요리사 3명에 직원 4명. 작은 식당치고 적지 않은 직원이었지만 갑자기 몰려든 손님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저희가 손이 느려서 빨리 서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손님을 그냥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이것저것 나눠드렸어요. 녹차나 미소 장국, 수박, 만두 등 그날 있는 건 다 드렸죠. 가장 큰 무기는 ‘웃음’이었어요.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좀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죠.”


손님과 눈을 맞추며 일일이 먹는 법을 알려줬다. “젓가락질, 고추냉이를 간장에 푸는 법부터 시작해, 넥타이를 한 손님에게는 넥타이를 어깨 뒤로 넘기고 고개를 살짝 숙이라고 상세히 알려드렸죠. ” 

출처: 아카키코 제공
초밥 먹는 법을 설명한 그림.

손님이 주문하자마자 음식이 5분 내 나오도록 체계를 잡았다. 예쁘고 빨리 나오는데 맛까지 좋으니 오스트리아인에게는 별세계 음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입소문은 금세 퍼졌다. 창업 2년 만에 비엔나에 3호점을 냈다.


2000년에는 배달 시스템을 도입했다. 당시 유럽에서 배달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피자뿐이었다. 아카키코가 배달 서비스 선구자인 셈이다. 전 회장은 배달을 시작하기 전 6개월 이상 준비했다.


“여러 국가에서 포장 용기를 이것저것 가져와 써봤습니다. 뜨거운 국과 수프 담는 용기 찾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찌그러지고 터지고 난리도 아니었죠. 또 몇달 동안 저희 음식을 배달해서 집에서 먹어보고 30분 후, 1시간 후 맛이 어떤지 확인했습니다. 라면이나 우동, 튀김처럼 맛이 크게 변하는 음식은 배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배달을 시작하고 나서도, 간장을 빼놓고 배달해서 다시 갖다 드린다든지 하는 시행착오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콜센터를 따로 두고 업무를 분업화했어요.” 

아카키코 제공

위기극복비결 "부지런히 신뢰를 회복한다"


항상 승승장구했던 건 아니다. 2008년부터는 매해 위기가 닥쳤다. “매출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직원수를 10% 정도 줄여야 했어요. 대신 직원들에게 당분간 월급을 줄이자고 했어요. 다행히 직원들이 두팔 걷어붙이고 따라줬습니다.”


2009년에는 경쟁 회사에서 직원을 스카우트해 가 어려움을 겪었다. “한번에 셰프 11명을 빼갔어요. 다행히 그 회사가 망하고 셰프 반 정도 돌아왔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해요.”


같은 해 50억원을 투자해 1200평 대지 위에 본사 식자재 창고와 주방을 만들었다. 소스 등의 조리법을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공정 설비를 갖춘다고 끝이 아니었습니다. 고추장 소스 1L 만들 때와 100L를 만들 때 재료 양이 달라요. 100배 더 만든다고 고추장 100배가 들어가는 게 아니었죠. 새로 레시피를 개발하느라 손실이 컸고, 3년 동안 주춤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매출이 회복하더라구요. 손님들이 이런 저희의 노력을 알아주셨죠.”


2013년에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여파로 손님이 20% 이상 줄기도 했다. “생선이 일본에서 온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저희는 일본산을 쓰지 않기 때문에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후 테이블에 까는 종이에 원산지를 정확히 표시해 알려드려요.” 부지런히 신뢰를 회복한 아카키코는 지금까지 국민 음식점으로 통한다. 

출처: 요리 공식 홈페이지
고급 한식당 '요리(Yori)' 메뉴 일부와 다스 김치(Das Kimchi) 내부 모습. 식당 운영 원칙은 아카키코와 같다. “먹기 전부터 고객이 기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화려한 색으로 시각을 사로잡고, 가능하면 청각도 자극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돌솥비빔밥은 나올 때부터 ‘지글지글’ 소리가 나야 합니다. 소리 안나면 다시 갖고 들어가라고 해요. 또 점심 메뉴에 변화를 줍니다. 너비아니, 불고기, 오징어볶음 등 기본 메뉴는 있고 이외에 메뉴는 매일 바꿉니다. 김치 등 4가지 반찬도 매일 달라요.”

2015년 시작한 한식당 ‘요리(Yori)’는 저녁 시간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만큼 인기가 좋다.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 한식당을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자신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한식은 간단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더이상 미룰 수는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셰프를 초빙해 1년 동안 준비를 했습니다.”


아카키코 직원들의 출신 국가수만 20개국이 넘는다. 메뉴를 개발할 때 대부분 아이디어는 직원에게 나온다. “문화 차이가 있으니 직원들 사이 ‘배려’가 중요합니다. 자격증이나 경력이 없어도 상관없어요. 일하는 게 느려도 괜찮습니다. 제가 여태껏 그랬듯, 일하면서 배우면 되니까요.”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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