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원 지폐에 실려 있는 '그림'이 가짜라고 하는 사람

조회수 2020. 10. 4. 16:5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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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수집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 사람
미술품 감정가 이동천 박사
요즘도 매일 100개 이상 작품 본다

1000원권 지폐에 실려 있는 그림 ‘계상정거도’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계상정거도’는 겸재 정선이 그린 조선 시대의 풍경화다. 그는 2008년 이 작품을 위작이라고 감정했다. 같은 해 서울대 학술행사에서 ‘계상정거도는 왜 가짜인가’를 주제로 학술행사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계상정거도’를 수록한 ‘퇴우이선생진적’(보물 제585호)은 2012년 K옥션에서 열다섯 번의 전화 입찰 경쟁 끝에 한국 고미술 경매가로는 최고액인 34억원에 팔렸다. 낙찰받은 삼성문화재단 측이 감정 결과를 믿지 않은 것이다. 작품을 감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jobsN
이동천 감정가.

이동천(53) 감정가는 미술품의 진위를 가려내는 데 한평생을 바쳤다. 요즘도 하루에 100편이 넘는 그림을 보고, 한 달에 수차례 중국 경매장에 다닌다. 1999년 중국 중앙미술학원에서 한국인 최초로 감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02년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내 최초로 ‘예술품 감정학과’를 만들었다. 지난 2004년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품 감정을 가르치고 있다.


-미술품 감정가는 무슨 일을 하나.


“미술관 소장 작품이나 경매에 나온 미술품을 감정한다. 학위 논문이나 미술사 서적에서 다루는 작품의 진위 여부도 감정한다. 미술품 수집가로부터 의뢰가 들어오면 그들이 사려는 작품이 진품인지 판별해준다. 무명이라는 이유로 당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작가를 찾아내는 것도 감정가의 일이다.”


-미술품은 어떻게 감정하나.


“감정의 핵심은 ‘작가에 대한 익숙함’이다. 익숙해지려면 긴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 작가 특유의 화풍이 무엇인지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그림만 봐도 한 눈에 그 작가가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사람도 자주 만나다 보면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군지 알지 않나. 유명한 화가인데 나온 그림이 문화센터에서 1년 배운 솜씨보다 못 하다면 일단 의심부터 한다.


낯선 작가의 작품을 감정할 때는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상을 본다. 작고한 무명의 화가라면 그림만 보고 감정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그 시대에 살았던 작가들이 어떻게 그렸는지 본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작가의 그림들과 어떤 점이 같고, 다르게 표현한 것은 무엇인지 찾아낸다.”

출처: 한국은행 제공
1000원권 지폐에 실려 있는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그 시대만 알더라도 쉽지 않은 작업같다.


“시대를 파악하고 나면 그 작가의 주변 정보를 하나씩 찾아낸다. 가족·주변인·지역의 특징을 알아내서 논리적으로 근거를 찾아내고 퍼즐을 맞춰나간다.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감정가는 위조자가 어떤 동기와 방식으로 위조했는지 알아야 한다. 요즘 프로파일러가 인기 직업인데, 그들은 몇 백년 전 사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미술품 감정가는 다르다. 가령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이라고 하면 최근 제작한 위작도 있지만 200년 전 작가가 살아 있을 때 만들어진 위작도 있다. 보통 작가가 죽은 뒤 50년 안에 위작이 많이 생기는데,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위조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예술품 종류마다 감정에 필요한 역량도 다르나.


“주로 고서화를 감정한다. 고서화의 기초는 붓의 놀림이다. 한국·중국·일본의 동양 고서화를 감정하려면 붓글씨 공부는 기본이다. 옛날에는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글씨를 알면 감정은 당연히 쉽다.


도자기는 밑굽을 가장 세심하게 본다. 유약 상태나 만졌을 때 촉감은 어떤지 본다. 도자기는 땅에 묻혀 있다가 출토한 작품이 많아서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서 본다. 미술품 감정 공부는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병사를 훈련하는 데 1000일이 걸리고, 병사를 쓰는 데는 하루가 걸린다)이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을 반복해야 하는 셈이다. 잡다한 지식도 알아야 하고, 차가울 정도로 냉철해야 한다.”


-어떤 계기로 감정학의 길에 들어섰나.


“어렸을 때부터 미술이 좋았다. 초·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미술부에서 활동했다. 대학교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감정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미술사나 감정이론 책을 사서 봤다.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감정을 배웠다. 1994년부터 중국 서화 감정의 대가인 양런카이(楊仁愷) 선생 밑에서 감정학을 배웠다. 중국 국학 대가인 펑치융(馮其庸) 선생한테는 문헌 고증학을 배웠다. 두 분 모두 중국의 국보급 인물이다.”

K옥션 유튜브 캡처

-미술품 감정가를 하려면.


“미술품 감정 관련 자격증은 따로 없다. 자신이 직접 위작을 보고 어떤 부분이 진품과 다른지 눈으로 확인하면서 배워야 한다. 혼자 배우면 쉽게 자만해진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하다. 도제식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노하우가 쌓이면 안목만으로도 감정을 한다. 본격적으로 감정을 배운다면 미대에서 직접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 유리하다. 한 번이라도 붓을 잡아 봤으니 위조 유형 분석이 상대적으로 쉽다.”


-돈은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인가.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다.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다 돈을 버는 과정이다. 어디에 여행을 가도 골동품 가게부터 찾는다. 일과 재테크를 동시에 할 수 있다. 미술품 감정가는 1인 기업이다.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면 일과 병행할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한 소규모 경매에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고려시대 수묵화 ‘독화로사도’를 260만원에 낙찰받았다. 조선시대 화가 안견의 수묵화 ‘몽도원도’(夢桃源圖·’몽유도원도’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후세에 붙인 이름이다)보다 100년 앞선 그림이었다. 경매에서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1000억원 이상은 나가지 않을까 싶다.


고가 미술품의 운명을 가르는 일인 만큼 돈의 유혹도 많다. 지인이 감정을 부탁하면 쉽게 가짜라고 말하기 어렵다. 가짜를 보고도 눈 한 번 감아주면 큰 돈을 만질 수도 있다. 비밀유지 서약서를 써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감정을 부탁하려고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재력가나 권력자가 굉장히 많다. 많은 돈·고가의 술 등 접대의 유혹도 많다.


위작인데 진품으로 감정하라고 주변에서 분위기를 몰아가기도 한다. 그때 유혹에 넘어가면 감정가는 도둑이나 마찬가지다. 감정가라는 직업을 사랑하고 자신의 양심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 특히 젊은 나이에 일을 시작하면 많은 유혹에 시달린다. 자부심을 갖고 오래 일하기 위해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한다.”

출처: 본인 제공
이동천 감정가가 직접 그린 '석류와 앵무새'(83X53cm).

-잘 만든 위작을 보면 감정가로서 무슨 생각이 드나.


“미술품을 위조한 사람이 학식이 낮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위작을 만들려면 엄청난 공부가 필요하다. 미술품 감정가들이 노하우를 공개하기 꺼려하는 이유는 한 번 노하우가 알려지면 더 이상 노하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술품 위조업계의 흡수력이 굉장히 빠르다.


스승의 작품을 거의 똑같이 그린 제자의 그림이 진품으로 팔리기도 한다. 이럴 때는 어떤 제자가 그렸는지까지 잡아내야 한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광직은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의 위조꾼이었다. 위작이라고 다 조잡하지는 않다. 아주 잘 만들어서 미술사에 남길 수 있을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재현한 위작도 있다.


요즘 우리나라 미술 시장에는 위작이 너무 많다. 진품을 찾기가 마치 보물찾기를 하는 것 같다. 위작 때문에 우리나라 미술품 가격이 많이 떨어져 있다. 지금 가격의 적어도 열 배 이상은 받아야 하는 작품도 많다. 그래서 감정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출처: 본인 제공
이동천 감정가는 2016년 천경자 화백의 '뉴델리'를 위작이라고 감정했다.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나.


“2016년 7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고 천경자 화백의 1주기 추모전에서 ‘뉴델리’를 위작이라고 감정했다. 작품에 적힌 서명 중 ‘뉴’ 글자가 다른 그림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평소 서명에 무심했던 천경자 화백이 서명을 덧칠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천경자 화백은 글자를 잘못 써도 고치거나 물감이 번져도 수정하지 않았는데, 그런 작가가 덧칠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술관 측은 진품이 맞다고 했지만, 전시회가 끝나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위작이라고 생각한다.”


-미술품 감정에 관심 있는 청년에게 하고 싶은 말.


“분명 도전할 만한 직업이다. 아무리 취업이 어렵다고 해도 모두 공무원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소질이 있거나 유능한데도 재능을 살리지 않고 직장을 택하는 청년들이 너무 많아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미술품 감정 분야는 아직 불모지나 다름 없다. 감정이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실력 있는 감정가가 없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불안하거나 고통스러울지도 모르지만 그 시간을 견디면 회사 간판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


미술품 감정가는 자신이 들인 노력과 실력만큼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서양의 미술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경매 시장을 통틀어 1년 판매액이 800억원 정도인 반면 중국은 경매 행사 한 번에 2조원이 넘기도 한다. 미술품 딜러나 위작을 수사하는 경찰도 미술품 감정을 배웠으면 좋겠다.”


글 jobsN 송영조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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