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강제로, 딸은 아파서..역사적인 '역사 부녀' 탄생

조회수 2020. 9. 18. 15: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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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강제로', 딸은 '치료로' 시작한 역도 부녀의 사연
역도인 박훈서 감독이 키운 박수민 선수
올해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받아

박수민(전북체육고·18) 선수는 지난 10월17일 열린 제 99회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 역도 여고부 63kg급에서 인상 부문 금메달·합계 부문 동메달을 땄다. 인상에서 87kg·용상에서 104kg를 들어올렸다. 인상 경기는 바벨을 머리 위로 한 번에 들어올리는 종목이고, 용상은 바벨을 쇄골에 한 번 얹었다가 들어올리는 경기다. 각 체급별로 가장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리는 선수가 이긴다.

출처: 사진 박수민 선수 제공
박수민 선수가 올해 전국체육대회에서 인상 종목 87kg에 도전하고 있다.

박수민 선수가 역기를 들어올리는 순간 누구보다 기뻐했던 사람이 있다. 박수민 선수의 아버지이자 전북체육회 박훈서(49) 역도 총감독이다. 박 감독은 박 선수가 중학교 1학년이던 2013년부터 6년째 역도를 가르쳐왔다.


같은 나이, 다른 이유로 시작한 역도


박훈서 감독은 역도를 강제로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보통 체격이었던 그는 팔씨름에서 져본 적이 없다. 덩치가 훨씬 큰 반 친구도 박 감독의 상대가 아니었다. 이 모습을 본 체육선생님이 박 감독을 체육실로 불렀다. 그곳에 60kg짜리 바벨이 있었다. 허벅지까지 역기를 들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별 생각 없이 역기를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이 한마디 던졌다. “너 역도 해라.” 박감독과 역도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성적도 좋은 편이었고, 미래가 밝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달 정도 체육선생님을 피해 다녔지만, 선생님은 포기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끈질긴 설득 끝에 전국소년체육대회 선발전만 나가기로 했다. 자세 하나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1등을 했다. 역도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박수민 선수는 치료 목적으로 역도를 시작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허리가 좋지 않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다. 허리 디스크 일부가 일찍 퇴화했다. 보통 50대 이후에나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앉아서 수업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종종 수업 도중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딸의 고통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허리 교정 차원에서 역도를 권했다. 박 선수는 선뜻 결정을 못 했다. 그러다가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장미란 선수의 경기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역도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2013년 박 선수는 14살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역사(力士)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출처: 사진 박수민 선수 제공
박훈서 감독의 중학교 시절. 그는 힘이 세다는 이유 하나로 역도를 시작했다.

선수에서 영업사원으로, 선생에서 감독으로


박훈서 감독은 우석대학교에 입학하고 역도단에서 운동을 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역도단이 없어졌다. 대학이나 기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 그는 여인숙에서 생활하며 혼자서 운동을 이어나갔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때는 국가대표였지만 전지훈련에서 어깨를 다쳐 출전하지 못했다.


이후 하이트맥주 실업팀 소속으로 10년 동안 뛰었던 박 감독은 2004년 35살의 나이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은퇴 이후 하이트맥주 영업 파트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주류 도매상을 관리하고 판촉 업무도 했다. 실적도 좋았고, 복지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회사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역도에 남은 미련 때문이다. 결국 퇴사 후 임용고시에 합격해 체육교사로 변신했다. 고창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20년 선수 생활을 바탕으로 역도부를 정식 창단한 전주 우아중으로 옮겨 감독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출처: 사진 박수민 선수 제공
전국체육대회 시상식에서 박수민 선수가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고 있다.

칭찬은 미소로 대신 “짠하고 고마울 뿐”


박 선수가 전북체육고에 진학했다. 박 감독도 작년 3월부터 전북체육회 역도 총감독을 맡고 있다. 훈련을 하고 대회에 나가면 둘의 관계가 부녀에서 사제로 변했다. 박 감독은 다른 학생보다 딸을 더 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학생이 좋은 기록을 내면 아낌 없이 칭찬을 해줬지만, 딸이 잘하면 씩 웃고 말았습니다.”


박 선수에게도 부담은 있었다. 대회에 나가면 아버지가 감독이라는 이유로 선생님들이 남보다 더 잘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과 같이 잘못한 일이 있어도 혼자 혼나니까 억울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하지만 “감독의 딸이라고 감싸준다는 말이 나올까봐 오히려 더 엄격하게 대하신 것 같다”며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했다.


박 선수는 대회 준비 기간 동안 새벽 6시부터 운동을 했다. 오전에는 주로 허리·복근 강화 운동을 했다. 오후에는 인상·용상 훈련과 스쿼트·데드리프트도 했다. 데드리프트는 바닥에 놓인 바벨을 잡고 팔을 구부리지 않은 자세로 엉덩이 높이까지 들어올리는 운동이다. 스쿼트와 데드리프트는 역도의 기본 운동이다. 밤에는 훈련 일정이 없어도 혼자 줄넘기·계단 뛰기를 했다. 자세 보강 연습도 했다.


담력 키우려 밤 12시 ‘보물찾기’ 하기도


물을 무서워한다는 박 선수는 디스크 치료를 위해 밤마다 수영장에 갔다. 킥판을 쥐고 발차기를 했다. 척추기립근이 발달해 허리는 많이 나아졌지만 통증은 아직도 남아 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담력을 키우려고 공동묘지에도 갔다. 밤 12시에 학교 전기를 차단하고 ‘보물찾기’도 했다. “원래 겁이 많은데 핸드폰도 쓰지 못하게 해서 무서웠어요.”


박 감독은 학교에서는 엄한 감독님이었지만, 딸의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야간 훈련이 없어도 딸이 밤마다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대견했다”고 했다. “열심히 해주는 모습이 고맙고, 지금의 마음가짐으로 계속 역도를 한다면 앞으로도 충분히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수민 선수 제공

올림픽 나가 아버지의 못다한 꿈 이룬다


전국체전 금메달 수상 소감을 묻자 박 선수는 의외로 “아쉽고 허무하다”고 답했다. 원래는 금메달 두 개를 생각했다는 그는 “체중 감량을 너무 많이 해서 경기 때 호흡이 차고, 배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올해 고3인 박수민 선수는 대학교 진학 대신 역도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는 “체육대학교에 가면 오전에 수업을 듣고 오후에 운동을 하는데, 온전히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미 여러 실업팀에서 러브콜이 와 지금 어떤 팀을 선택할지 고민중이다.


전국체전만 보고 달려온 박 선수의 다음 목표는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선발전때마다 부상으로 본 경기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2024년 파리올림픽에 출전해 아버지의 못다한 꿈을 이루겠습니다.”


글 jobsN 송영조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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