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만 되어야하는 집에서 자란 의사, 지금 이렇게 됐습니다

조회수 2020. 9. 18. 15: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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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션 양방언 작곡가
장르를 넘나드는 뮤지션 양방언 작곡가
의대 졸업, 3번의 갈림길에서 택한 직업
음악 듣는 사람의 ‘행복’이 중요

양방언(58)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그의 이름이 낯선 사람이라도 한번쯤 그의 음악을 들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주제곡 ‘프론티어(frontier)’를 만든 주인공이다. 삼성·소니·니콘·신한금융그룹 CF에 배경으로 깔린 음악을 만들었다. 게임 아이온의 OST ‘The Tower of Eternity’도 마찬가지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 중계를 봤다면 그가 만든 음악을 들은 것이다. 이외에 애니메이션 ‘십이국기’, ‘천년여우 여우비’, 드라마 ‘상도’, KBS 다큐 ‘차마고도’ OST 등 수많은 음악이 그의 손끝에서 태어났다.


재일 한국인 2세로 의사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외과 의사였고 형과 누나들도 의사 아니면 약사였다. ‘의사 아닌 다른 꿈’을 감히 말하기 어려운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일본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마취과 의사로도 일했지만 결국 모든 걸 뒤로하고 음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다. 11월에 있을 유토피아 콘서트 준비로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출처: jobsN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양방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무경계 뮤지션으로 그의 음악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다.

1년 내내 꽉 찬 일정, 몸이 열 개라도 부족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피겨 여왕' 김연아가 성화대에 점화하기까지의 배경음악을 담당했다. 점화 이후 댄스팀 ‘저스트 절크’ 공연 음악과 소프라노 황수미가 독창한 올림픽 찬가도 그가 맡았다. 폐막식에선 ‘기억의 여정’ 무대, 오연준군이 부른 올림픽 찬가와 성화 소등 때 흐른 음악을 만들었다.


공연 직전까지 수정의 수정을 거듭했다. 원래 개막식에서 북한 선수만 계단을 오를 예정이었다. 북한 측 요청으로 이틀 전 남·북한 선수 2명이 함께 오르는 걸로 바뀌었다. 혼자 오를 때를 기준으로 만든 음악이라 자칫 타이밍이 맞지 않을 우려가 있었다. 선수들이 성화대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음악은 끝나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닥칠 수 있었다. 다시 녹음을 하거나 연습할 여유는 없었다.


“현장에서 바로 음악을 수정했습니다. 성화가 경기장에 들어가고, 김연아 선수가 점화할 때까지 크게 4개 순서로 나눌 수 있어요. 순서마다 바뀌는 음악 사이에 1~2초씩 여백을 줘서 선수들이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두 선수가 열심히 달려 올라가 김연아 선수에게 성화를 전달했을 때 음악이 딱 맞아떨어졌어요. 공연 내내 신경을 너무 써서 위가 아프더라구요.” 

솔로 음악과 콘서트, 기업·기관에서 의뢰받는 음악 작업으로 1년 일정이 꽉 찬다. 평창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중국 게임 문라이트 블레이드 OST, 2020년 일본 패럴림픽 다큐 음악 작업에 돌입했다.


솔로 음악과 의뢰받아 만드는 음악은 접근법이 다르다. “의뢰받는 음악은 주제와 목적이 분명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만드니 제 의견만 고집할 수 없어요. 무엇보다 마감기한을 맞추는 게 중요하죠. 반면 솔로 음악은 주제도 마감도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매 순간 경험을 쌓다 보면 ‘어떤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요.”


이제는 콘서트 유토피아를 준비한다. 유토피아는 그의 한해를 집대성하는 공연이다. 한·일 뮤지션들과 함께한다. 록밴드 국카스텐 보컬 하현우, 일본 기타리스트 오시오 코타로가 게스트로 선다. “2019년 KBS스페셜 특집 다큐에 쓰일 아리랑 음악을 초연합니다. 1937년 극동 러시아에서 강제 이주 당한 17만명의 고려인을 기억하는 아리랑입니다. '한(恨)'을 승화시킨 새로운 아리랑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 국내 일정이 끝나면 일본 투어를 시작한다.

출처: 양방언 공식 인스타그램
“국텐이 인디에서 활동할 때 음원을 듣고 팬이 됐습니다. 먼저 연락해 식사를 하고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보컬 현우에 목소리에서 받는 영감이 있습니다.”

제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신의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국적은 반대다. 아버지는 북한, 어머니는 한국 국적이다. 북한 국적으로 30여년을 살다 1996년 한국 국적을 획득했다. 그의 출신과 장르를 넘나드는 특징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경계인’, ‘무경계 뮤지션’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출신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겠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당연히 어릴 때 ‘나는 누굴까’, ‘인생이 왜 이럴까’ 정체성을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너무 무겁게 비치진 않았으면 합니다. 한번은 배병우 사진작가가 ‘너처럼 경계에 있는 사람이 이상한 짓을 많이 한다’고 했는데, 동감합니다. 경계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뮤지션과 함께해 좋습니다.”

출처: jobsN
그는 많은 작업을 하면서 슬럼프를 겪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제 영감의 비결은 마감 시간"이라며 웃어보이기도 했다.

3번의 갈림길에서 택한 직업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12살 터울인 누나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중학교 들어서부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록 음악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버지가 공동창립한 북한계열 학교에 다녔다. 서양음악에 관심 갖는 그를 보는 주변 시선은 곱지 않았다.


“선생님이 절 때리고, LP판을 부순 적도 있어요. 집에서는 온가족이 의사 아니면 약사를 향해 달려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일단 음악을 하려면 아버지 기대를 채워야 했고, 의대에 가기로 했죠. 또 대학에서 음악하는 사람들을 찾아 음악을 계속할 생각이었어요. 말이 안되지만, 음악을 하려고 의대에 갔죠.”


하지만 의대에서 음악 하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보통 종합대의 재학생 수가 1만명을 넘는다. 그가 다닌 일본의과대는 6년제 단과대로 한 학년에 100명 남짓한 학생이 있었다. 그래도 음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른 종합대학에 가서 음악을 같이할 사람을 찾았어요. 메이지대학 출신으로 이뤄진 밴드 티스퀘어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뮤지션 무대에 키보드 세션으로 서면서 세미프로 활동을 했습니다. 당연히 의대 수업은 뒷전이었죠.”


5학년에 접어들자 도저히 학교생활과는 병행할 수 없을 만큼 바빴다. “아버지와 의사 면허는 꼭 따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면허를 따고 음악을 하기로 맘먹으니 의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음악을 하다 힘든 시기가 오더라도 ‘그때 의사할 걸’이라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어요.”  

출처: 양방언 공식 인스타그램

마취과 의사인 누나의 제안으로 일본의과대 마취과에서 1년간 근무했다. 이후 도쿄대 정형외과로 이직하기로 했다. 그런데 도쿄대 합격 설명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계속해서 의사를 하면 평생 음악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마주친 갈림길에서 결국 음악을 택했다.


“많은 뮤지션 지망생이 ‘음악을 계속할 것이냐’를 고민할 겁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치열하게 고민하길 바랍니다. 저도 음악을 택하기 전 3번의 갈림길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의사 면허를 따기 전, 도쿄대 마취과로 가기 전에요. 음악을 정말 하고 싶은지, 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생각만 하면 안 돼요. 판단해야 합니다. 그다음 결단하고 나면 고민하지 말고 달려야 해요. ‘3년간 온 힘을 다해보고 안되면 접는다’든지 한계를 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끝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갈등하던 그는 5만엔(50만원)을 들고 가출했다. 콘서트·라이브 카페·스튜디오 등 연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집을 나와 1년 반 동안 생활이 힘들었어요. 연주 이외에 다른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의사면허가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검진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어요.”


1986년부터 J-POP의 하마다 쇼고와 홍콩의 록 밴드 비욘드와 무대에 섰다. 하마다 쇼고의 경우에만 한해 150번의 라이브 공연을 했다. 가수들의 작·편곡, 프로듀싱을 하며 명성을 얻었다. 건강을 위협받을 만큼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다. 1996년 ‘The Gate of Dreams’으로 데뷔했다. ‘양방언의 음악’을 찾기 위해서다. 이후 7장의 솔로앨범과 음악감독 활동으로 20여년을 달렸다.

음악을 듣는 사람의 ‘행복’이 중요


그는 한때 음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동료 뮤지션들이 ‘음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양방언의 색을 찾은 것’이라고 말해 편견을 깼습니다. 지금도 아예 콤플렉스가 없는 건 아니다. 뮤지션에게는 어느 정도 콤플렉스가 있어도 괜찮은 것 같아요. 더 열심히 하라고 등을 떠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한 경험을 쌓는데 집중한다. “30~40대에 책을 많이 읽었어요. 지금도 읽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양이 현저히 적죠. 또 축제에 자주 갑니다. 직접 돈을 내고 갑니다. 돈을 내야 축제를 즐기는 사람의 입장을 알 수 있어요. 일본 후지락 축제는 10년 넘게 다녀왔습니다. 후지락이 시골에서 열리는데 3일간 14만명이 들러요.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도 아티스트도 다양합니다. 그런걸 보면서 ‘제주에서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얼마 후 ‘제주 뮤직 페스티벌 2017' 예술감독을 맡았다. 

출처: 양방언 공식 홈페이지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 20년전 됴코에서 이곳으로 이사해 산속에 집과 스튜디오를 만들어 산다.

1997년부터 런던필하모닉,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정기적으로 작업한다. 그의 여러 앨범과 게임 아이온 OST,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도 런던에서 녹음했다. “일종의 ‘과제’입니다. 어떤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 예산이 크면 되도록 런던에 가려 합니다. 런던 필하모닉이나 심포니는 클래식도 하지만 폴매카트니 음악, 스타워즈 OST 등의 녹음도 해요. 여러 장르 사람들과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하죠.”


그는 무조건 많은 양의 '인풋(경험)'에만 집중하지 말라고 한다. "아웃풋(결과물)을 내려면 인풋이 중요하죠. 그런데 내 색깔을 만들기 위한 인풋은 무엇인지, 내게 맞는 게 무엇인지 고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출처: 양방언 공식 인스타그램
솔로 데뷔 20주년 콘서트 때.

또 젊은 음악가들이 저작권 등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잘 알아야한다고 강조한다. 그의 음악은 주로 배경음악으로 쓰인다. 연주음악은 가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노래보다 상대적으로 ‘돈을 지불하고 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약하다. 공연이나 행사에서 그의 음악을 무단으로 트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계약금 지급 방식이 달라 곤란한 경우도 많았다.


“계약서 없이 신뢰로만 일할 때도 있어요. 이 경우 의뢰를 받아서 곡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의뢰자가 취소하겠다고 하면 엎어지는 겁니다. 보통 계약을 맺으면 선입금을 받아요.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머지 잔금을 받습니다. 중국에서는 계약금 전액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음악관은 ‘행복’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의 ‘행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솔로 음반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를 맡을 때 제 역할도 음악으로 하여금 영화를, 드라마를, 다큐를 즐길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에요.”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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