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라인 스커트요? 청바지 입고 카톡 확인하며 뛰어다녀요

조회수 2020. 9. 25. 15: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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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에 카톡 확인하며 뛰어다니는 일은?
엄은경 빅베이슨캐피탈 선임심사역
투자한 회사 성공해야 수익
"투자할 땐 대표와 팀을 먼저 봐"

잘 나가는 스타트업 창업자의 뒤에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먼저 알아보고 투자한 뒤 성장의 길을 함께 걸어 온 사람들이 있다. 바로 벤처캐피탈(VC) 투자심사역이다. 이들은 스타트업의 꿈을 보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 돈을 투자한다. 심사(審査)란 말 때문일까, 이름만 들으면 날렵한 수트나 똑 떨어지는 H라인 스커트가 떠오르는 직업이다.


21일 서울 삼성동 위워크에서 만난 엄은경(31) 빅베이슨캐피탈 선임심사역은 “스타트업에 투자한다니 멋져 보이고 또 도도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저었다. 대신 “청바지 입고 밀려드는 카톡 확인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도 “인터뷰만 아니었으면 이런 정장 안 입었을 것”이라고 했다. 

엄은경 빅베이슨캐피탈 선임심사역

엄 심사역은 국내 벤처캐피털 업계의 흔치 않은 여성 투자심사역이다. 국내의 여성 심사역 수는 전체 747명의 심사역 중 57명(2015년 기준). 전체의 7.6% 수준이다. 엄 심사역은 “지금도 100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남성 중심의 업계에서 그는 2016년 포브스가 선정한 ‘아시아 금융·벤처캐피털 분야의 영향력있는 30세 이하 30인’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나이 만 스물아홉.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거쳐 투자심사역으로 일한 지 6년만의 일이었다.


그에게 투자심사역이란 어떤 일을 하는지, 일의 매력과 어려움은 무엇인지, 억대의 투자를 결정하고 또 책임지는 중압감은 어떻게 견디는지 물었다. 일과 사람에 치여 도망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는지도.


-투자심사역은 어떤 일을 하나요.


“한 마디로 좋은 회사를 발굴해서 투자하고 키우는 일을 해요. 하는 일은 투자한 회사가 어떤 단계에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저는 얼리스테이지(early-stage)라고 하는 초기 단계의 기업 투자를 담당해요. 돈을 투자한다니 마치 갑(甲)일 것 같지만 한 번 투자를 하면 그 때부터는 철저한 을(乙)이 돼요(웃음). 투자한 회사가 성공해야 수익이 나고 잘 안 되면 저희도 손해를 보니까요. 회사 소개자료도 함께 만들고, 창업자들의 네트워킹을 돕기도 하고요.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 조언하거나 도움이 될 경험을 공유합니다. 심사역은 다양한 회사들을 많이 만나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평균적으로 이렇게 되더라’는 경험을 많이 갖고 있거든요. 기업에 투자한 다음 사후관리를 하면서 가치를 더해주는 거죠. 초기 단계에서는 보통 5억원에서 10억원대 사이의 투자를 해요. 최근에는 해외송금 서비스 스타트업 ‘소다트랜스퍼’에 총 16억원의 투자를 주도했습니다.”


-보통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우리가 투자한 회사들에 연락을 해요. 필요한게 있는지, 어려운 건 없는지. 보통 1~2주에 한 번 정도 연락을 하죠. 너무 자주하면 시어머니 소리를 듣거든요(웃음). 매일 정해진 일정이 있지는 않아요. 주로 미팅이 많아요. 새로운 기업의 소개를 듣거나, 저보다 앞·뒷 단계의 기업에 투자하는 분들과의 네트워킹도 중요합니다. 좋은 기업을 발굴하려면 저보다 앞 단계 기업 투자자를, 후속투자를 유치하려면 저보다 뒷 단계 기업 투자자를 만나야 하거든요. 벤처 관련 단체나 학교, 기업에서 주최하는 데모데이(투자자를 상대로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행사)에도 참석하고요.” 

엄은경 빅베이슨캐피탈 선임심사역

-투자심사역이란 직업을 동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최근 한 심사역 지원자에게 왜 지원했냐고 물으니 ‘멋있잖아요’라고 답하더라고요. 꼭 그런 면만 있는건 아니에요. 저는 심사역을 ‘자동차 보험사’에 비유하고 싶어요. 언제든 투자한 회사에 일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서 도와주는.”


-쉽지 않겠네요, 어떤 능력이 필요합니까.


“일단 사회성이 중요해요. 사람 만나는 일이 많고 인적 네트워크도 잘 유지해야 하거든요.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고 공부하기 좋아하는 분들이 적성에 맞을 것 같아요. 회사와 돈을 다루는 일이다보니 숫자 분석 능력은 필수고요. 금융사, 컨설팅회사 출신을 선호합니다. 스타트업은 대부분 정보통신기술(ICT) 투자라서 공대 나온 엔지니어 출신도 좋고요. 특히 회사의 성장을 돕는 일이다보니 신입사원보다는 회사 생활을 최소 3년 이상은 한 경력자를 선호해요.”


-심사역의 매력 그리고 힘든 점은?


“반짝반짝한 아이디어를 가진 기업을 많이 만나고 이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을 한다는 게 보람있어요. 내가 힘을 보태서 회사가 달라지는 걸 지켜보는 것은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에요. 또 여러 기업의 성장 과정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요. 다만 개인 시간은 많지 않아요. 오전 10시만 돼도 저의 답을 원하는 카톡 20개는 쌓여있어요. 누구 소개해달라는 부탁부터 미팅 요청도 많고요. 하루 종일 사람만 만나다 끝나는 경우도 많아요. 심사역으로 3년쯤 일했을 때 회의감이 든 적도 있었어요. 창업자들은 성장하는데 저만 계속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잘 되면 연락이 두절되는 분들도 있고요. 지금은 ‘이게 내 직업이구나’하고 받아들였어요.” 

엄은경 선임심사역

-여성 심사역으로 사는건 어떻습니까.


“여성의 강점을 살릴 수 있는 분야가 많아요. 많은 스타트업의 타깃 고객은 구매력이 있는 2030 여성이거든요. 가끔 남성 창업자들이 막연하게 ‘이거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엄마가 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때 제가 고객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판단해주죠. 흔치 않은 여성 심사역이라 사람들이 더 많이 기억한다는 것도 장점이에요.”


-심사역의 대우는 어떻습니까.


“벤처캐피탈마다 많이 달라요. 가장 큰 변수는 투자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죠. 기본급이 작고 인센티브 비중이 높거나 혹은 그 반대인 곳도 있습니다. 외국계는 대기업 연봉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미국에 본사가 있는데 투자문화가 다릅니까.


“한국과 미국 벤처투자사는 성격이 많이 달라요. 제가 일하는 빅베이슨캐피탈은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회사입니다. 미국은 투자했는데 회사가 망하면 나의 판단미스라고 생각해요. 반면 한국은 투자가 잘못되면 스타트업 대표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들도 많아요. 저희는 많은 기업에 투자해 성공 확률을 높이기 보다는 소수에 투자하고 함께 성장하는걸 중시해요. 그래서 1년에 5~6개 기업 정도에만 투자합니다.”


-투자할 때는 어떤 걸 주로 보나요.


“초기 단계 기업은 사람을 주로 봐요. 아직 매출이 안나는 회사도 많고 사실 분석할게 많지 않거든요.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만큼 대표와 팀을 주로 봅니다. 팀이 어떻게 만났는지 꼭 물어보고요. 지금은 ‘으쌰으쌰’하지만 똑같은 서비스·제품이라도 팀이 누구냐에 따라 회사의 2~3년 뒤 모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1인 회사에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엄은경 선임심사역

-최근 스타트업의 트렌드는 뭔가요.


“요즘은 블록체인이 가장 뜨거운 것 같아요. 그 직전까지는 송금과 같은 핀테크(금융과 기술의 결합) 스타트업이 인기가 많았고요. 과거에는 고객 데이터만 많이 모을 수 있어도 투자를 받았는데 요즘은 매출이 나지 않거나 광고 매출에만 의존하려는 회사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분위기에요. 증강현실(AR)·가상현실(VR)이나 O2O(오프라인-온라인 연결) 창업은 과거에 비해 많이 잠잠해진 것 같습니다.”


-개인 얘기를 물어볼게요. 미국에서 학교를 나오셨네요?


“중3 때 혼자 유학을 갔어요. 당시 한 반에 모두를 모아놓고 똑같은 교육을 시키는게 안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하고 싶은건 꼭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건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축구부도 하고 뮤지컬도 배웠어요. 미시간대에서 경제학, 중국어를 전공했고요. 졸업 후에 한국으로 와서 미래에셋에서 애널리스트로 3년반쯤 일하다가 스파크랩스를 거쳐 2017년말부터 빅베이슨캐피탈에서 일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심사역이 되고 싶었나요?


“사실은 창업이 꿈이었어요. 대학에서 전공을 정할 때도 ‘사업을 하려면 경제와 중국어 정도는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결정한 거에요. 그런데 대학 졸업하고 금융위기가 터졌고 한국에 돌아와 취업 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하면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됐죠. 지금도 여전히 창업을 하고 싶은데 용기가 부족해요. 많은 기업들을 지켜보면서 창업이 쉽지 않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 그런 측면도 있고요. 지금은 심사역이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투자자로 성장하는게 꿈이에요.” 

엄은경 선임심사역

-좌우명은?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삶을 살자.”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까지 총 4개 국어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스페인어를 배웠어요. 미국에서는 스페인어를 ‘사랑을 속삭이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말하거든요. 스페인어를 배우면 같은 라틴어 기반인 이태리어·포르투갈어도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 좋아요. 저는 언어를 공부할 때 문화를 이해하려고 해요. 드라마·영화를 보거나 배낭여행을 가도 골목골목을 주로 다니는거죠. 문화를 알면 왜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를 빨리 이해할 수 있어요.”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방법은?


“저는 운전을 좋아해요. 주말에는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교외로 혼자 떠나요. 최근에는 강원도 양양에 가서 바닷가 카페에서 노트북 펴놓고 서너시간 일하다가 저녁먹고 왔어요. 주중에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주말에는 혼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해요.”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투자심사역에 관심이 있거나 초기 단계의 창업자분들은 언제든 찾아오세요. 만나는 분들께는 항상 제가 아는 걸 다 쏟아내려고 노력해요. 그게 시간내서 찾아와준 분에 대한 예의니까요.”


글 조선일보 박순찬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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