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삽 들면 안되나요? 말리니까 더 확신 들었어요"

조회수 2020. 9. 25. 15: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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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여기부터, 지금부터

고창 땅콩처자 이누리

밭의 잎이 다 타들어 갔다. 110년 만의 불볕더위에 바짝 타들어 간 콩밭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은 심란하다. 늦여름 더위가 기세를 떨치던 날, 이누리 씨는 해 뜨는 새벽에 나가 해 질 때까지 온종일 땅콩밭에 물을 줬다고 했다. 에어컨 바람은 싫다며 정자에 털썩 앉아 땀을 식히는 그에게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말을 건넸다.


“아이고, 땅콩처자. 땅콩이고 참깨고 다 타버렸어. 물을 줘도 금방 말라버리니. 그나저나 우리 땅콩 밭두둑이 너무 높은 거 아녀?”


“할머니, 그게 더 좋은 거예요. 두둑이 높아야 토양에 수분을 가둘 수 있거든요. 또 고랑이 깊을수록 수확하기도 편하고요. 할머니가 키우는 ‘아몬 땅콩’은 인기가 좋아서 올가을 수확도 기대해볼 만할 거예요.”


“그래? 그럼 그대로 둬야지. 아휴 올해는 고추밭이 노다지여. 다 타들어 가는 바람에 고춧값이 금값이라나.”


누리 씨도 덩달아 ‘김장 가격도 오르겠다’며 맞장구친다. 그들의 수다에 끼어들어 ‘아몬 땅콩’이 뭐냐고 물으니 이번엔 할머니가 답한다.


“몰러. 얘들이 주니께 심었지. 이게 피를 맑게 해 준다대?”


“아몬 땅콩은 저희가 쉽게 부르기 위해 붙인 이름이고, 품종명은 ‘케이올’이에요. 아몬드처럼 알이 굵고 크죠. 혈관을 건강하게 해주고 피를 맑게 한다는 올레산 함량이 85%로 아몬드보다 더 높아요.”


두둑부터 땅콩 효능까지 야무지게 말하는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하니 “이론은 많이 알지만, 경험은 할머니들을 따라갈 수 없어요. 농사는 많이 지어봐야 아는 거예요”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여자가 무슨 농사를

이누리 씨가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온 건 2년 전 겨울이다. 고교 시절 아버지가 ‘농업을 공부해보면 어떻겠냐’ 슬쩍 던진 말이 그를 밭에 서게 했다. 딸 셋 중 막내딸. 연년생이던 언니들의 대학 등록금은 부모님의 근심이었다. 공대를 목표로 준비하던 그는 한국농수산대학에 진학했다.


아버지는 고창에서 가축 약품과 사료 사업을 했다. 늘 남들보다 빨랐던 아버지는 미생물을 이용해 퇴비를 발효시키는 EM 농법에 관심을 두었다. 처음에는 친환경 단지를 조성하고 복분자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돈이 되는 걸 보며 후계자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따라와 줄 누가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종종 했다. 무엇보다 “나중에 나이 들어 일을 못 하게 되면 내가 쏟은 시간이 허망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에 그의 마음이 흔들렸다.


농대 진학을 결심하니 오히려 주변에서 반대했다. 대부분 간호대에 진학한 친구들은, ‘주사기가 아닌 삽을 들겠다’는 그를 의아해했다. 담임 선생님조차 ‘여자가 농사를 지어 뭐해. 간호사 하면 좋을 텐데’라며 만류했다. 그럴수록 ‘왜 여자가 농사를 지으면 안 되지? 농업에도 여자의 섬세함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거야’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학에서 스무 살의 여 학우는 이씨 혼자였다. 학생 평균 나이 28살.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 사이에 끼어 전국 곳곳의 성공 농업 사례를 살피고 유럽과 일본, 호주 등 농업 선진국을 탐방하며 알찬 대학 생활을 보냈다.


“스위스와 독일은 로컬푸드 개념이 확실한 나라예요. 당일 짠 우유를 맛보기 위해 소비자들은 주저 없이 농장을 찾죠. 포장이나 소비자 인식, 농산물을 대하는 문화 자체가 달라요. 상품을 팔더라도 누가 어디서 언제 생산했는지를 따지죠. 우리나라는 수매로 넘어가면 누가 지은 농산물인지 몰라요. 농부는 자신이 지은 농산물을 누가 먹는지 알아야 하고, 소비자도 똑같이 누가 생산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제도가 우리나라에도 필요합니다.”


그는 ‘어떤 농작물을 어떻게 농사지을까’보다 ‘농업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를 먼저 생각했다. 농법에 관심을 두고 유기농기능사 자격증도 땄다. 대학 졸업 후에는 농촌진흥청에 들어가 4년 동안 토양 분야를 연구했다. 틈틈이 아버지가 농사짓는 밭에 들러 토양 상태를 살피거나 시료를 분석하는 일도 했다. 그즈음 아버지는 땅콩 농사를 시작했다.


62명 농부, 함께 일해 함께 나눈다

이누리 씨가 실장으로 근무하는 고창이엠푸드는 아버지 이경수 씨가 세운 영농조합법인이다. 로컬푸드 판매장으로 2010년 건물을 세웠고 이 터를 발판 삼아 그동안 연구해온 EM 농법을 인근 농부들에게 전수했다.


땅콩으로 유명한 고창에서도 땅콩 재배는 대부분 대산면에서 이루어졌다. 이씨 부녀가 경작하는 땅콩밭은 고창IC에서 가까운 전북 고창군 고창읍 신월리에 있다. 대산면은 산골로 들어가야 하지만 신월리는 시내에서 가까워 유통이 빠른 장점이 있다. 이누리 씨의 아버지는 이곳을 ‘땅콩 마을’로 특화해 보겠다는 야심찬 뜻을 품고 참깨나 고추 농사를 짓던 농가를 설득해 땅콩 종자를 나눠주고 농사짓도록 독려했다. 62개 농가가 참여해 전체 31만 4000m2(9만 5000평) 규모의 땅콩밭을 일궈냈다. 마을의 ‘땅콩 농부’들 중에서 이누리 씨는 한참 막내다.


아버지 이경수 씨의 노력으로 마을은 농촌진흥청으로부터 ‘고창 땅콩 명품화 및 가공제품 개발 상품화 사업’ 대상자로 선정됐다. 국산 땅콩 우량종자를 보급하고 신기술을 접목해 교육하는 데 이들 부녀가 앞장서고 있다.


“땅콩 농사에 참여한 62개 농가는 공동 생산, 공동 선별, 공동 분배를 원칙으로 합니다. 저희가 재배한 땅콩 전량은 농협에서 수매해요. 우리는 땅콩으로 내는 수익을 안정적으로 맞추기 위해 4월부터 6월까지 파종해 8월 말부터 11월까지 수확합니다. 수확 시기를 길게 가져야 지속해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죠. 땅콩은 껍질 제거가 제일 어려운데, 이 작업은 동네 어르신들이 맡아서 합니다. 기계로 벗길 수도 있지만, 알맹이가 망가질 수 있어 일일이 손으로 벗겨야 하죠. 껍질 제거도 하나의 일자리 창출이에요. 또 벗긴 땅콩껍데기는 발효시켜 유용한 미생물을 만들죠.”


특색 있는 땅콩 마을을 만들기 위해 품종 연구도 이어간다. 몇 해 전만 해도 이씨 부녀는 고창 토종 땅콩 농사만 지었다. ‘팔팔(88)’하게 자란다고 해서 ‘팔광’이라 불리는 종자다. 하지만 한 종의 땅콩만 심다 보니 점점 수확량이 줄어 농가 소득도 줄어들었다. 팔광 땅콩을 개량해서 만든 게 ‘신팔광’이다. 알이 굵고 단단하면서도 병해충에도 강한 종자다.


신품종은 분명 농민들에게는 돈이 드는 부분이라 민감할 수밖에 없다. ‘기존의 땅콩도 잘 자라는데 뭐 하러 새로운 걸 심냐’는 이들을 설득해야 했다. 신품종을 심고 나서도 수확까지 노심초사다. 다행히 생산량도 늘었고 알이 잘 여물었다.


올해는 이에 힘입어 신팔광을 비롯해 참원, 흑생, 케이올, 조광 등 8가지 품종을 더 심었다. 품종으로는 쉽게 모양을 구분 못 하니 붉은 땅콩인 참원은 ‘자색 땅콩’이라 부르고, 흑생은 ‘검정땅콩’, 케이올은 아몬드 맛이 난다 해서 ‘아몬 땅콩’, 조광은 작고 알이 옹골찬 게 자기를 닮았다고 ‘누리 땅콩’이라 이름 지었다.


“조광 땅콩은 소립종이라 알이 작고 수확량은 적지만, 고소한 맛이 진하죠. 특히나 기능성 땅콩이라 팔 때 가격이 좋아요.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이라는 항암·항산화 물질이 많이 들어 있죠. 땅콩은 국산 품종만도 20가지가 넘어요. 신품종이 나오면 항상 새로 심어봐야 해요. 고창 땅에 맞는지, 생산했을 때 수확량이 좋은지, 또 어떤 종이 잘 자라는지. 우리 땅콩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처럼 기능적으로 특화된 땅콩을 찾는 이들입니다.”


온라인 마켓 열고 판매처 연결하고

마을이 생산하는 땅콩 중 8월 말부터 수확하는 ‘햇땅콩’이 가장 인기다. 당일 수확해 당일 삶아 껍질째판매하기 때문에 성분이 옹골지게 담기는 것은 물론, 맛과 향이 진하다. 최근에는 땅콩 새싹을 키워 건강 음료로 가공하고 있다.


“땅콩 피는 땅콩의 영양소를 응축하고 있어요. 그러니 껍질째 먹는 게 가장 좋죠. 또 땅콩 새싹에는 뼈 건강에 좋은 소야 사포닌이나 항암효과가 좋은 레스베라트롤, 간 기능 개선 및 숙취 해소에 좋은 아스파라긴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요. 마트에 가보면 수입산 땅콩이 가득한데, 우리 손으로 농사지은 국내산 땅콩이 즐비하길 고대합니다.”


이누리 씨가 농촌에 들어오면서 아버지의 사업도 활기를 띠었다. 그는 땅콩의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심는 시기와 수확 시기를 도표로 만들었다. 또 농작물 판매를 위한 온라인 마켓을 열거나 판매처와 연결하는 일을 한다.


“아버지는 앞서 계신 분이세요. 바라보는 시각이 높고 넓죠. 처음 농사를 시작하며 제가 ‘터덕터덕’ 거릴 때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어요. ‘나부터 여기부터 지금부터’. 미루지 말고 지금부터 열심히 하라는 말이죠. 아버지가 일궈놓은 터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요. 아버지가 쌓은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농부 이누리’의 선택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씨앗의 염원은 피어나고 피워내는 생명에 있다. 알차게 옹근 이누리 씨의 꿈이 아버지라는 태양 밑에서 싹을 틔우고 있다.


글·사진 jobsN 서경리 조선뉴스프레스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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