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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에 배트맨 그리던 꼬마는 커서 '마블 아티스트'가 됩니다

조회수 2020. 9. 24. 23:4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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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코믹스 히어로부터 아이돌 워너원까지..아트 디렉터 이지형씨
이지형 넷마블몬스터 아트 디렉터
마블코믹스가 인정한 일러스트레이터
적성 찾아 돌고 돌아 '행복한 직업' 찾기까지

신경질적인 미간 주름과 날카로운 눈매를 한 데드풀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쌍칼을 휘두를 것 같다. 마블 대표 악동 데드풀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이 그림은 이지형(34)씨의 작품이다. 게임 개발사 넷마블몬스터의 아트 디렉터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이지형 작가가 그린 마블의 데드풀.

이씨는 모바일 액션 RPG(역할수행게임) ‘마블 퓨처파이트’에 등장하는 캐릭터를 그리고 전체적인 연출을 한다. 마블 퓨처파이트는 한국 게임 회사 넷마블이 미국 출판사 마블코믹스의 지적재산권(IP)을 활용해 만든 게임이다. 아이언맨·헐크·토르·캡틴아메리카·닥터 스트레인지 등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슈퍼히어로는 마블코믹스를 통해 세상에 등장했다.


이씨에게는 ‘마블 아티스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마블에서 의뢰받아 마블 히어로를 그린다. 최근에는 아이돌 워너원 아트웍(온라인 홍보용 포스터)을 그려 화제였다. 남녀노소 세계인의 우상인 마블 히어로와 국내 최고 인기 아이돌 등 잘 나가는 캐릭터만 그렸다. 

출처: jobsN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넷마블 사옥에서 만난 이지형 디렉터.

이씨는 지금 아트 디렉터로 인정받지만 과거에는 적성을 찾지 못해 방황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지만, 미래가 불투명해 한때 그림을 손에서 놓은 적도 있다. 이십대 후반에 게임 원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가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을 들었다.


마블 캐릭터 잘 이해해야···캐릭터 만들어낼 기회도


이씨는 오전 10시 출근하면 마블에서 보낸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 밤낮이 달라 의사소통에도 시차가 있다.


지금 게임 속 캐릭터는 영웅과 악당을 합쳐 300명이 넘는다. 아트 부서 팀원들이 그리는 캐릭터와 분야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미세하게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씨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배경과 효과, 3D 형상을 만드는 3D 모델링, 애니메이션 등 게임 속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확인한다.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일하기 위해서다. 일종의 미술 감독인 셈이다. 


“‘디렉터’라는 직무 때문에 관리 감독을 할 것 같지만 제가 하는 일은 실무에 가깝습니다. 저도 팀원 중 한명입니다. 다만 게임 아트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위화감이 들지 않도록 결과물을 통일하는 일을 합니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마블 퓨처파이트 일러스트.

이씨는 2D 원화가다. 지하철 광고면에 걸리는 포스터, 홍보용 배너 등에 들어가는 캐릭터도 그린다. “마블 퓨처파이트 캐릭터를 그리는 건 순수 창작은 아닙니다. 마블만의 감성과 세계관을 고려해야 합니다. 동시에 팬들이 좋아하는 히어로의 특징도 살려야 하죠.” 


마블 아티스트는 공식 명칭은 아니다. 마블코믹스와 계약한 작가를 마블 아티스트라고 한다. 이들은 전세계에 포진해있다. 주로 마블코믹스 표지 삽화를 그린다. 특정 계약 기간은 없다. 작가의 능력을 고려해 마블 내부 평가에 따라 계약건 별로 금액을 책정한다. 작업 진행 과정과 결과물 수준에 따라 대금이 올라간다. “전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분들이 마블 히어로를 그립니다. 한국에도 저말고 여러분이 있어요. 저는 벌써 6년째인데, 훌륭한 분들과 함께 마블 히어로를 그릴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마블 코믹스는 미국 회사다. 나라별로 선호하는 그림체가 다르다. 한국 작가로서 북미 감성을 표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제가 존경하는 애덤 휴스(Adam Hughes)작가의 그림을 보고 공부했는데, 아무래도 그 느낌이 북미쪽과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북미체는 어떻다’고 정의 내릴 수는 없어요. 다만 북미 그림이 익살스럽고, 과감하다고 느낍니다. 채색도 선명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과장과 왜곡이 있습니다. 캐릭터가 강해요.”


그의 그림은 역동적이다.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상상합니다. 이왕이면 그냥 가만히 있기보다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릴 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그려요.”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이지형 디렉터가 애착이 가는 캐릭터로 말한 샤론 로저스와 루나 스노우. 마블 퓨처파이트를 위해 마블 측과 협의해 새로 만든 캐릭터다. “샤론 로저스는 캡틴 아메리카 탄생 75주년을 맞아 태어난 캐릭터입니다. 마블 코믹스 세계관에는 지구가 여러개예요. 평행세계, 평행우주라고도 하는데 지구와 똑같은 인물들이 사는 또다른 지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캡틴 아메리카는 페기 카터와 사랑을 이루지 못해요. 하지만 다른 지구에서는 페기 카터와 결혼을 해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샤론 로저스입니다. 루나 스노우는 한국 케이팝 가수인데, 사고로 신기술 냉각 에너지에 노출돼 냉동 원소를 다루는 초능력을 얻은 캐릭터입니다. 마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라 다들 부담이 컸습니다. 공을 많이 들인 만큼 반응이 좋았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완성한 후 마블에서 캐릭터에 구체적인 스토리도 만들었어요. 샤론 로저스의 경우, 단행본도 나왔습니다.”

한때 그림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도


2009년 상명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관련 학과를 전공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방황했다. “산업 디자인에서는 제품의 기능성과 실현 가능성이 중요합니다. 작가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엔 한계가 있었어요. 학교를 다니는 내내 재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과제를 내면 항상 ‘유치하다’, ‘현실 가능성이 없다’고 지적받았죠. 세상에 없는, 영화에 나올 법한 제품을 그렸거든요.”


졸업 후 편집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지만 한달 만에 퇴사했다. 그림 그리는 일보다 문서를 작업하거나 도면을 설계하는 일이 많았다. 가구 회사 디자인팀에 입사했지만 역시 얼마 못가 그만뒀다. 입시미술학원에 취직해 강사로도 일해봤지만 또다시 나와야 했다. “학원 강사는 그림만 잘 그려선 안되고, 좋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야 합니다. 저는 입시 스킬도 없고,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여기까지 이르자 ‘그림이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에 학을 뗐어요. 많은 등록금을 들여 오랜 시간 공부했는데 이 일로 벌어먹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크게 낙담했습니다.”


그림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기도 했다. 대형마트 인력 파견 업체에 입사해 인사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느날 책상에 앉아 있는데, 노트에 한가득 히어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게임 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일러스트레이터에게는 기본인 포토샵도 다룰 줄 몰랐어요. 다시 공부해야 했습니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인력 회사에 있을 때 그렸던 낙서들.

고민 끝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퇴사했다. 포토샵 기초 서적과 저가 태블릿을 구입해 독학했다. 8개월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 집에서 그림만 그렸다. 더이상 잃을 게 없었다. 마지막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살면서 가장 많이 그림을 그린 시기였다.


원화가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배경을 그리는 원화가와 캐릭터를 그리는 원화가다. 이씨는 캐릭터 원화가를 꿈꿨다. 구인구직사이트에서 채용 공고가 뜬 게임회사란 회사는 모두 찾아내 지원했다. 하지만 그를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포트폴리오였어요. 캐릭터 원화가 포트폴리오에 석고 데생 그림을 넣었으니까요. 준비가 미흡했지만 일단 시작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간절했어요. 게임에 등장하는 풀이나 돌멩이라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한 회사 면접에서는 면접관이 ‘어떻게 이런 포트폴리오를 낼 생각을 했냐’며 대놓고 망신을 주기까지 했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어릴 적 그림일기에 그린 배트맨과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후 그린 배트맨.

2011년 우여곡절 끝에 피처폰 게임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했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배경, UI(User Interface·아이콘이나 화면 구성 등) 등 이것저것 다양하게 그렸다. 이때쯤 SNS와 카페에 그림을 올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작업한 프로젝트와 개인 습작을 올렸다. 


“히어로 그림 반응이 특히 좋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영웅이나 초인에 매력을 느꼈어요. 일곱살 때 영화관에 닌자 거북이를 보러 갔다가, 예고편으로 잠깐 본 배트맨이 더 기억에 남았어요. 외국 캐릭터뿐만 아니라 우뢰매 같은 한국 초인 캐릭터도 좋아했어요.”


2013년 마블코믹스와 한국 작가를 연결해주는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마블코믹스 표지를 그려달라는 연락을 받고 처음엔 ‘사기 아닐까’ 의심했어요. 알고 보니 국내에 이미 몇몇 분이 활동 중이었습니다. 평소 동경하던 곳이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첫 작업은 미국 어린이 아동병원에 걸릴 아이언맨 그림이었다. 이후 약 10권 정도의 마블 코믹스 표지를 그렸다. 마블 게임 부문 총괄 디렉터인 빌 로즈만(Bill Rosemann)은 이씨를 ‘마블과 함께 일하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아티스트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마블과 처음 작업한 그림. 마블이 어린이병동에 기부한 한정판 코믹북 표지다.

돌고 돌아왔지만···‘결국 하고 싶은 일이 정답’


2015년 1월 넷마블몬스터로 이직했다. 팀원들과 함께 마블 퓨처파이트 캐릭터를 그리고 화풍을 다듬었다. 이전부터 마블에서 의뢰받아 그림을 그리고 좋은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는 끊이지 않았다.


“마블 측에서 저희가 해석해 그린 그림을 보고 연신 ‘이게 아니다’라는 피드백을 보냈어요. 마블은 일방적으로 지시하지 않고, 감상을 말하는 편이에요. 헐크의 감성을 살려서, 또는 캡틴 아메리카는 더 정의감 있게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이면 하루만에 될 것을 당시에는 2주 동안 고전했어요. 자신감은 금세 무너졌죠. 이제는 접점을 찾아서 빠르게 의사소통하는 편입니다. ‘수정’이란 단어는 듣기만 해도 괴로운 단어예요. 하지만 꼭 필요합니다. 수정을 거듭해 완성본에 마침표를 찍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2015년 4월 모습을 드러난 마블 퓨처파이트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일본 등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전세계 누적 이용자수는 8600만명이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이지형 디렉터가 그린 워너원 캐릭터.

캐릭터를 그리기 전 다양한 자료를 참고한다. “사전 조사를 많이 할수록 좀더 짜임새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워너원 멤버들을 그릴 때는 각종 포털사이트에서 사진도 찾아보고, 노래도 들었습니다. 팬들이 좋아하는 특징은 무엇인지도 조사했어요. 이대휘씨가 왼쪽 눈에만 쌍커풀이 있는데, 이런 포인트를 되도록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올해 책 출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집필은 끝났다. 포토샵을 다루지 못했을 때 그린 그림부터 최근 작업물을 담은 일러스트집이다.


“책까지 낸다면 평생의 꿈을 다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며칠 전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제 우상이었던 애덤 휴스를 만났어요. 악수한 손을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영광이었습니다. 같이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Two monsters’라는 댓글이 달렸어요. 감격이었죠. 제가 애덤 휴스와는 비교도 안되지만, 제가 평소 존경하던 분과 나란히 서는 작가가 됐다는 생각에 벅차올랐습니다.”

출처: 이지형 디렉터 제공
샌디에이고 코믹콘에서 애덤 휴스, 김정기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두 사람 모두 만화, 일러스트계에서 세계 굴지 인물로 손꼽힌다.

이젠 그를 보며 원화가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 히어로를 꿈꾸던 청년이 이젠 원화가 지망생들의 히어로가 됐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정답인 것 같습니다. 나이가 많아서라든지, 여태까지 배운 게 달라서라든지 그런 머뭇거림은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하면 일부분이라 생각해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해서 행복합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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