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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보이는 콜라병 중에 어떤 것이 그림일까요?

조회수 2020. 9. 24. 23:5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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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 그림일까요? 극사실화 그리는 전숙영 작가
극사실화(hyper reality) 그리는 전숙영 작가
미술 강사 10년, 경력 단절 벽 뚫고 직업 찾아
사람들과 소통하는 극사실화 그림

흰색 캔버스 위에 빨갛고 노란 자두 14개가 놓여있다. 화면에 손이 등장하더니 자두들을 양쪽으로 치워낸다. 자두 두 알은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자두 그림이다.


사물과 똑같은 그림 ‘극사실화’를 그리는 전숙영(36) 작가. 오로지 색연필과 마카로만 그림을 그리는데 실제와 구분이 힘들다. 아예 실제를 하나 더 만드는 듯하다. 드로잉핸즈(drawing hands)라는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 누적 조회수는 1780만건, 구독자수는 26만명을 넘었다.

과일·초콜릿·장난감 같은 사물이나 토르·조커·타노스 등 영화 캐릭터, 연예인 등을 그린다. 워너원·레드벨벳·트와이스 등을 그린 아이돌 실사화는 케이팝 팬들에게 인기가 좋다. 미국·일본·대만·동남아 등에도 독자들이 있다.


2002년 단국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목동에서 10년간 입시미술 강사로 일했다. 결혼 후 경력이 끊겼다가 ‘아튜버(아트+유튜버·Artuber)’라는 새 직업을 찾았다. 미술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편견과 주부는 도전하기 힘들다는 한계를 깼다. 

출처: jobsN
드로잉핸즈 전숙영 작가.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그림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는 모든 과정을 카메라로 찍는다. 크기 27x36cm 캔버스 위에 그림자가 깔리고 입체감이 생기면서 그림은 실제와 같아진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장장 8~9시간. 빨리 감기로 3~5분 남짓한 영상으로 만든다. 전 작가는 시행착오 없이 단번에 그린다. “중간에 지우거나 다시 그리면 영상을 보는 재미가 없습니다. 영상 속에서 전체를 힘있게 끌고 나가는 연출이 중요해요. NG없이 그림을 한번에 그리는 과정에서 보는 사람도 희열을 느낍니다.”


실사화는 윤기·색감·질감·비율 어느 하나 흐트러지면 실제와 멀어진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조명, 카메라 각도가 완벽하게 들어맞아야 한다. “색연필로 그리면 표면이 반짝여요. 또 주변에 어떤 사물이 있느냐에 따라 빛부심이 다릅니다. 아주 작은 오차에도 티가 많이 나요.”


그가 그리는 극사실화는 평면 그림과 3D 그림 두 가지로 나뉜다. 착시효과를 이용한 3D 그림의 경우, 그림을 오히려 왜곡해 그려야 한다. 특정 각도에서만 실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 연출 난이도 역시 올라간다. 카메라 연출에 능한 카메라 감독과 PD도 전 작가의 그림을 촬영하러 왔다가 너무 어려워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출처: '드로잉 핸즈' 영상 캡처.

그릴 대상을 선택하는 기준은 ‘누구나 다 알만하고 특징이 있는 것’이다. 사물이라면 코카콜라나 트윅스처럼 사람들이 브랜드와 모양을 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혹은 자두나 사과처럼 보편적이어서 색이나 모양을 자연스럽게 머릿 속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귀엽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난감도 그림 대상이다. 인물이라면 화제성이 있는 사람 또는 캐릭터를 고른다.


“연출법을 달리해 수십개 영상을 찍습니다. 지인이나 남편에게 보여주고 가장 재밌는 영상을 업로드해요. 캔을 데구르르 굴리기도 하고, 흩어져있는 젤리를 모으기도 하고, 또는 사물 여러개를 손으로 싹 치우기도 해요. 그때 그림이 드러나는 극적 효과를 연출합니다.”  

출처: 유튜브 '드로잉 핸즈' 영상 캡처
트와이스의 쯔위.

그림을 그리기 전 사진을 충분히 관찰한다.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할 땐 모니터에 초고화질 사진을 띄우고 그린다. 인쇄한 사진을 보고 그리진 않는다. “프린터가 모니터를 못 쫓아가요. 집에서 인쇄해보면 미세한 부분이 제대로 인쇄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눈·코·입 부위 마다 몇십배로 확대해 보기 때문에 화질이 좋아야합니다. 아무리 그리고 싶은 인물이 있어도, 사진이 저화질밖에 없다면 포기합니다.”


실사화가 어려운 이유는 전문가가 아닌 대중도 쉽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제와 똑같다’는 걸 표방하는 극사실화 일수록 대중의 판단은 냉정하다. “극사실화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똑같다’ 혹은 ‘똑같지 않다’ 둘중 하나로 판가름납니다. 추상화라면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는 재미가 있겠지만 사실화는 그렇지 않아요. 또 약간의 오차에도 아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콧구멍 크기, 눈의 각도가 미세하게 다르면 실제와 비슷하지, 똑같지는 않다고 보니까요.”


그림은 반복하는 일상 속 탈출구


미술을 전공했지만 전업 작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의상 디자인에 관심 있었어요. 운좋게 디자인 회사에 들어갔는데 제가 생각하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의상 디자인은 옷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저는 옷 그림을 그리고 싶지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잘못된 진로를 생각한 거죠.”


원없이 그림을 그리고, 항상 그림 옆에 있을 수 있는 입시 미술 학원에 입사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전 작가는 ‘이지드로잉’이라는 입시 미술용 스킬을 개발해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동료 강사들에게도 강의법을 가르쳐 학생들이 좀더 쉽고 빠르게 입시 미술을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회화는 연필로 사물의 양감(입체·부피감)을 표현하는 것이 기본이다. 연필로 짧고 가늘게 그리고 또 그려서 ‘양감을 깐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늦게 미술을 시작한 지망생에게는 어려운 방법이었다. “저는 주로 디자인학과 지망생을 가르쳤는데, 디자인과는 실기 시험 때 이젤이 아니라 책상 위에 캔버스를 놓고 그려요. 이젤로 세워서 그릴 때보다 책상 위에서 그리면 연필을 자유자재로 조절하기가 힘듭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다른 방식을 만들어 가르쳤어요.” 

출처: 전숙영 작가 제공
유튜브 '드로잉 핸즈'를 찍기 위한 작업 공간.

제자들을 명문대에 보내면서 강사로 인정 받았다. 아이들의 꿈을 이뤄준다는 보람이 컸다. 연봉도 4000만원 초반대. 이십대 후반 또래들보다 비교적 사회에서 잘 자리잡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복된 일상 속에서 보람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고, 깨닫고 보니 자신에게는 남는 게 없었다.


“제 작업물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작업을 했습니다. 오로지 볼펜으로만 그리기도 했고, 인물 사실화도 그렸습니다. 인체와 머리카락을 섞어서 표현하는 추상화도 그렸어요. 공모전에서 여러번 상을 받긴 했는데, 그것도 일상에 치여 꾸준히 하질 못했습니다. ”


2012년 출산을 앞두고 퇴사했다. 1년 동안 육아에 전념했다. 이 시기를 전환점 삼아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아이를 정말 예뻐하고 좋아해도 육아에만 전념하니 우울감이 깊어졌습니다. 아이는 목도 못가누는 갓난 아기라서 엄마의 모든 걸 희생해서 돌봐야 해요. 또 저도 엄마는 처음 해보니까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너무 힘들었죠.”


UX(User eXperience·사용자 경험) 디자이너인 남편이 실사화를 그려 유튜브에 올려보라고 제안했다. “남편이 해외에 실사화 유튜버를 보고,‘이 정도면 당신도 할 수 있겠다’고 용기를 줬습니다. 색연필로 그리는 건 학창시절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고등학교 때 석고소묘, 석고 수채화, 정물 수채화 등 다양하게 배웠고, 강사로 일했으니 색연필의 특성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첫 모델은 가수 아이유. 준비물은 아이폰과 암막 커튼, 작은 조명 뿐이었다. 촬영 공간에 커튼을 쳐 자연광을 막고, 그림 그리는 과정을 촬영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기대를 안했습니다. 반응이 없으면 실망할까봐요. 댓글도 안보고 영상만 올렸어요. 그러다 차츰 조회수가 1만, 5만, 10만건으로 늘면서 ‘반응이 오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처: MBC '오늘 저녁' 영상 캡처

그림은 반복하는 일상 속 탈출구였다. 자신의 그림을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약속을 지키고자 정기적으로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물 실사화에서 그치지 않고, 좀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기로 했다. 그 콘텐츠가 ‘어떤 것이 그림일까요’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실제 사물과 그림 중에 맞춰보세요’ 라고 문제를 던지는 영상입니다. 그림을 보고 감탄만 하지 않고, 댓글에서 서로 무엇이 진짜인지 이야기 하면서 소통할 수 있어요.”


취미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도전해보길


전 작가는 ‘아직 갈길이 멀었다’고 말한다. “그림자를 보고 구분한다는 분들이 있어요. 그 말을 듣고 ‘에어 브러쉬’를 구입해 사용법을 배웠습니다. 공기압력을 이용해 스프레이처럼 쓰는 도구예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그려서, 많은 분들을 지금보다 더 잘 속이고 싶습니다. 또 숙달된 대로, 하던 대로만 하지 않고 새로운 기법을 고민해 발전하고 싶어요.”


유튜버 수입이 크지 않다. 유튜브 광고 수익은 전 작가의 전체 수입의 5% 정도를 차지한다. 대신 외주 작업 문의가 늘었다. 대부분 유튜브 영상을 보고 의뢰한다. LG전자, 한국마사회에서 의뢰를 받아 광고에 등장할 그림을 그렸다. 영화 오션스8 캐릭터,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주인공인 배우 박보검, 음료 미에로화이바 모델 강소라도 협업해 그렸다. 외주 작업 수입은 천차만별이지만, 실사화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만큼 적게 받진 않는다. 학생반과 성인반 소규모 그룹 과외도 한다. 

출처: 유튜브 '드로잉 핸즈' 영상 캡처
영화 '어벤저스'에 등장하는 타노스를 그렸다.

무엇보다 자신감을 얻었다. 경력 단절의 벽을 뚫고 극사실화 작가로 인정받는다. “주부가 하기에는 힘든 게 사실입니다. 지금 작업할 때도 한번에 하진 못해요. 아이 보다가 그림 그리고, 집안일 하다 그림 그리고, 또 다른 볼일 보고 틈틈이 그립니다. 생방송도 하고 싶은데 지금은 쉽지 않아요. 방송하다 애기가 깨면 바로 달려가야 합니다. 또 밤 9~11시가 황금시간대인데 이 시간에는 아이를 재워야 해요.”


전 작가는 미술 분야와 주부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많아지길 바란다. “그림 그리는 유튜버가 많지 않습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것 같아요. 지금 제가 이 길을 닦아놓으면 후배들이 들어오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업 유튜버가 아니라, 자기 일의 전문성과 범위를 높인다는 생각으로 도전해 보세요. 주부라면 취미를 공유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 전환점 역할을 할겁니다. ”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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