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이순신장군상 되살린 '신의 손' 누굴까

조회수 2020. 9. 24. 14:3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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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것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유일한 직업
22년 보존복원전문가 김겸 교수
잃어버린 시간 되돌리고 가치 복원하는 일
직업보다 진로를 꿈꾸는 사회 되길

광화문 이순신 장군상, 백남준 TV로봇, 세월호 희생자 유품, 이한열 열사의 운동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명작과 유물이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김겸(50) 대표의 손을 거쳤다. 22년째 낡거나 망가져 치료가 필요한 조형물과 근·현대 회화·유화 등을 보존복원하고 있다. 1997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 석사를 따고 삼성문화재단 보존연구소에 입사했다. 취직의 기쁨도 잠시, 1년만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이후 일본과 영국에서 보존복원을 공부했다. 2003년 한국에 돌아와 미술이론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11년 연구소를 차렸다. 건국대 미술대학원 회화보존학과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주인공 준세이의 직업도 김 대표와 같았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유화 복원을 공부하던 준세이는 복원사를 ‘시간의 우체부’라 표현한다. 준세이가 그랬듯 김 대표도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린다. 

출처: jobsN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에서 만난 김겸 보존복원전문가. 일부 '복원사'라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복원가' 또는 '보존복원전문가'가 공식 명칭이다.

핵심은 ‘잘 닦고 붙이기’, 허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


보존복원의 핵심은 ‘잘 닦고 붙이기’다. 작품에 묻은 오염물을 닦아내거나 녹이거나 긁거나 털어낸다. 다음 찢기거나 부서진 손상 부위를 잘 붙여야 한다. 화학과 재료학에 대한 지식은 필수다. 유화에 특정 용제를 덧발랐을 때 녹아내린다는 걸 모른다면 몇백년 명작을 망치는 끔찍한 사고를 피할 수 없다.


흔히 보존복원전문가를 의사에 비유한다. 김 대표는 조형물 보존을 전공했다. 국내에 복원 전문가가 없다 보니 근·현대 유물이나 평면 그림을 복원할 기회도 얻었다. “작품을 진단하고 고친다는 측면에서 비슷해요. 병이 가벼우면 약 처방으로 끝나지만, 어떤 작품은 1~2년간 장기입원하면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또 전문의가 되는 과정이 복원가와 유사합니다. 수술하는 집도의가 되려면 5~10년간 수련이 필요하듯 복원가도 오래 수련해야 합니다. ”


다른 곳에서 복원하다 망가진 작품을 다시 복원하기도 한다. 병원을 옮겨 재수술 받는 경우와 비슷하다. “보호자인 작품 소장자가 이곳이 문제라고 해서 왔는데, 검사해보니 다른 곳에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걸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한분이 작품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했는데, 조사해보니 곰팡이가 아닌 물감 튄 자국이더라고요. 병이 아니라 되돌려보냈습니다.”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최근 연구소에서 복원한 문익환 목사 판화. 문익환 목사 기념관인 '통일의 집'에 전시 중인 유품들이다. 피아노와 판화 작품 외 수십점이 있다.

작품·유물 복원의 목적은 ‘가치 복원’이다.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복원하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물건을 물건으로 보면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가치는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말합니다. 100억 짜리 작품이 100억이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작품과 유물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가치를 만듭니다. 금이 간 컵을 새걸로 교환하듯 작품을 바꿀 수 없어요. 작품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아요. 유화를 금고에 아무리 잘 보관해도 뿌옇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건강하기 위해 운동하고 식단 관리를 하듯 작품도 가치를 유지하려면 애를 써야 합니다.”


김 대표는 6월부터 서울시와 함께 종로구와 중구 일대 공공 조형물 600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그가 이미 몇년전 복원했던 이순신 장군상, 청계광장 스프링도 점검 대상이다. “하루 10~15점씩 보고 작품에 대한 건강 진단서를 씁니다. 진단이 끝나면 처치가 필요한 작품을 복원하죠.”


복원 과정은 증상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작품을 복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게 먼저다. “유물은 출토 당시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이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물질 정보가 중요해요. 박물관에서 보면 유물을 붙인 자국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유물 옆에 ‘여기는 새로 메웠다’고 표시가 있습니다. 반면 미술 작품의 목적은 ‘감상’입니다. ‘뭔가 잘못된 거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 감상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완전무결한 외형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이한열 열사 운동화의 복원 전·후 모습. 밑창이 떨어져 나가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다. 김 대표는 밑창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있는 무늬가 달라 복원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2015년 이한열 열사 운동화를 복원할 때 김 대표와 복원을 의뢰한 이한열기념관 사이 의견 차이가 있었다.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운동화 밑창은 절반 이상 바스러져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기념관은 현재 모습 그대로 유지하길 바랐고, 김 대표는 전체 모습을 복원하자 했다.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을 때 밑창이 떨어져 나갔다면 당시 긴박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대로 두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열사의 마지막을 함께했던 온전한 모습을 복원하는 게 취지에 맞다 생각했습니다.”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복원 후 이한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 중인 운동화.

진로 방황하다 만난 보존복원의 세계


어릴 적 산동네에 살았고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김수익 화백이다. “기어 다닐 때 기억이 있어요. 반바지를 입고 이젤 앞에 앉아 그림 그리시는 아버지의 무릎이 기억납니다. 유화 냄새, 아버지가 즐겨 듣던 쇼팽 음악이 익숙해요. 저도 미술계로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 반대로 고등학교 때 이과를 갔어요.”


반대를 무릅쓰고 홍대 예술학과에 들어갔지만, 미래가 불투명해 방황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고민은 늘 ‘뭘 하고 먹고 사나’였다. “비평가·학예사·화가·교수 어느 것도 자신이 없었어요. 외국어 2~3개는 할줄 알아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합니다. 미술전문지 계간미술을 보다 복원전문가라는 직업을 알았지만 뚜렷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정보도 사람도 없었어요. 삼성문화재단에 입사할 때도 대기업에 들어간다는 설렘이 컸지, 보존실이 뭘 하는 곳인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조각파트 연구원으로 일했다. 선배들 어깨너머로 복원을 배웠다. 로댕과 부르델, 권진규 작가의 작품을 복원하면서 조형물 복원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술사나 이론을 배울 때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라캉이다 하는 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조형물 복원은 계속 궁금하고 공부하고 싶었어요.”


꿈을 찾았다 싶은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IMF 여파로 입사 1년만에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다. “회사에서 잘리고 나니 이 일이 더 간절했습니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데 한국에서는 한계가 있었어요. 과거 호암미술관을 방문한 일본 복원가 마키노 다카오 스승님이 떠올랐습니다. 공부하고 싶으면 찾아오라 하셨어요.”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광화문 광장 이순신 장군상 복원 전·후 모습.

일본으로 날아간 그는 동북예술공과대학에서 고전조각수복 연구생 과정을 시작했다. 마키노 교수는 김 대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리포트를 되돌려 줄 땐 어색한 일본어 표현을 꼼꼼히 고쳐줬고, 수업시간엔 김 대표가 옛 사료를 독해하도록 시켰다.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그에게 비중 있는 작업을 맡기기도 했다. 김 대표가 영국으로 가겠다 했을 때, 현지 대학원 정보를 나서서 찾아준 사람도 마키노 교수였다.


영국을 택한 이유는 서양 조각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에서 불상 복원을 공부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쉬움이 있었다. “제가 하고 싶은 분야는 근·현대 조각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배우기는 어려웠어요. 무작정 유학 간 제 탓이었습니다. 고민하다 보니 제가 일본도서관에서 영어책을 보고 있더라고요. 이럴 바엔 책을 쓴 사람의 나라로 가자는 생각에 영국으로 갔습니다.”


학비는 삼성재단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충당했다. 당시 삼성재단은 보존복원분야 인재를 뽑아 장학금을 줬다. 김 대표는 학비와 연구비, 생활비로 2억원을 지원받았다. 장학금을 받은 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일본어도 겨우 마스터한 그에서 영어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아이엘츠(IELTS·영어 능력 시험)는 예상 질문과 답을 달달 외워 겨우 통과했는데, 첫 리포트를 쓰는 건 말도 못하게 어려웠어요. 수업을 못 알아듣는 건 둘째치고, 리포트 한 문단 쓰느라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몇날 며칠 반복하니 스트레스가 극심했습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 리포트 하나를 완성한 후부터는 쓰는 시간이 점차 빨라졌습니다.”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2002년 영국 유학 시절 복원에 참여한 영국 링컨 대성당. 그는 대성당 한쪽 벽면을 맡아 작업했다. 한·일 월드컵 당시 사다리 위에서 BBC라디오를 들으며 우리나라가 골을 넣을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했다.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강사로 일하고 개인 소장 작품을 의뢰받았다. 일본·영국 유학까지 했지만 돈벌이가 시원치는 않았다.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사했다. 사무관급 공무원으로 안정적인 직장에 다녔으나 6년 만에 퇴사했다. “내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과거 정리해고당할 때 제3자가 내 삶을 결정하게 만들지 말자 다짐했어요.”


그는 지금까지 로댕·부르델·올덴버그·뒤샹·세자르·권진규·이성자·김세중 등 수많은 작가의 작품을 복원했다. 이웃집 꼬마의 장난감 로봇, 지인의 할머니가 아끼는 경대도 복원 대상이다. 오랜 기간 일해 온몸에 성한 곳이 없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 근육 힘줄에 염증이 생기는 근초막염에 걸립니다. 10년 전에 왼쪽 팔에 생겨서 오른쪽 손으로 작업하다 보니 이젠 오른쪽도 말썽이에요. 피아노를 즐겨 치는데, 칠 때마다 손마디 마디가 아픕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직업보다 진로 먼저 생각하는 삶 살기를


9년째 겸임교수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국내에서 미술품 보존복원을 가르치는 곳은 건국대 회화보존학과가 유일하다. 그는 화학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해 중요합니다. 작품 복원에 가장 좋은 약품이라도, 인체에 유해한 건 쓰지 않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옻칠 수업을 듣다 옻이 올라 한동안 고생했어요.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수업을 중도 포기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저도 가려워서 수시로 자다 깨 욕조에 뜨거운 물 받아 그속에 앉아 있었어요. 5년간 항히스타민제를 먹느라 간 수치가 올라갔습니다. 체질도 민감하게 변했어요.”

출처: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스틸컷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주인공 준세이의 직업은 미술품 복원가다. 김 대표는 영화 속에 나오는 낭만적인 모습만으로 복원가를 꿈꾸지 말라고 조언했다.

미술품 보존복원전문가는 국내 10명 정도다. 미술학도에게 보존복원은 인기 분야다. 작가들의 관심도 높다. “1시간 강의하고, 질의응답만 하는데 2시간 넘게 걸려요. 다들 이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일자리는 없다. “요즘 자동차 외형복원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사랑하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가 상처 나면 마음이 아프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에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일본만 해도 젊은 작가의 작품을 사서 집에 걸어 놔요. 영국에선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몇파운짜리 작품도 복원소에 맡깁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미술 작품을 재테크 수단이나, 부를 과시하는 용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벤츠 외형 복원하는 데 200만~300만원이 듭니다. 작품에 긁힌 자국을 없애는데 100만~200만원이 든다 하면 안합니다. 한번은 작품 복원에 150만원이 든다 했더니, 소장자가 450만원 주고 샀다며 복원하지 않겠다 했어요. 그럼 제게 그 작품을 팔라고 했죠. 맘을 떠보려는 게 아니고 정말 작품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제서야 소장자가 복원을 맡기겠다 하더라고요." 복원이 끝난 후 소장자는 결국 복원한 작품이 맘에 든다며 감사 인사를 했지만, 작품에 대한 우리나라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출처: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제공
복원 작업 중인 김 대표.

보존복원전문가의 수입은 일당에 작업일수를 곱한 금액이다. “특수용접 하는 분들 정도입니다. 해외에서는 국내 대비 10배 수준입니다. 해외 프로젝트를 가끔 맡는데 그 수준에 맞출 뿐, 터무니 없이 많이 받지는 않습니다.”


김 대표는 청년들이 직업보다 진로를 먼저 생각하길 바란다. “진로는 직업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그림입니다. 저는 마키노 선생님처럼 살고 싶었어요. 그분이 걸어가는 모습, 작업하는 일상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적성에 맞냐’는 질문을 사치스럽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월급만 받으면 성공한 삶이라는 정해진 답 말고, 나 스스로 답을 찾고 판단하길 바랍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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