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간 10명의 한국 대통령 연설문을 번역한 한국인

조회수 2020. 9. 24. 14:4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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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대통령 연설문 번역 감수'..훈장 받은 귀화 공무원
한국에 온 걸 후회하지 않아요
41년 6개월간 해외공보관 근무
대통령 10명의 연설문 영번역 감수

"에리자벳 지 크랲트(Elizabeth G. Kraft·78·이하 에리자벳)"


지난 6월 29일 2018년 상반기 문화체육관광부 퇴임식장. 도종환 장관이 외국 이름을 불렀다. 짧은 갈색 머리 백인 할머니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도 장관은 그에게 ‘국정 해외홍보 유공’ 분야 국민훈장 모란장을 건넸다.  

출처: 에리자벳씨 제공
퇴임식장에서의 도종환 장관(왼)과 에리자벳씨(오), 퇴임식장에서 받은 훈장증

에리자벳씨는 사실 한국 사람이다. 귀화하며 자신의 영어 이름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등록했다. 그는 공무원이던 남편 이하우(79세·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씨를 따라 1977년부터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현 해외문화홍보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2018년 6월 29일 퇴임할 때까지 대통령의 주요 연설문·남북정상회담 발표문·정부부처의 정책보도 등 수많은 정부 자료 영어 번역 감수를 맡았다.


-영어 번역 감수는 보통 생각하는 번역과는 다르다고

"해외문화홍보원에 있는 번역가들은 대통령 연설문·정상회담 발표문·대통령 친서와 같은 자료를 영어로 번역한다. 그러면 내가 다시 읽고 어색한 부분은 수정하고,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다시 썼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면 꼭 거치는 과정이다."


-번역한 걸 영어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한국어와 영어는 서로 많이 다른 언어다. 동서양 문화 차이도 크다. 그래서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옮기기 힘들었다. 한국어로는 듣기 좋았던 연설도 영어로는 이상할 수 있다.


처음 만난 번역가는 한국어 단어를 영어 단어로 바꿔놓고 번역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한 글은 의미를 제대로 전할 수 없다. 그런 글은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워 수정하기도 힘들었다.


또 한국어엔 ‘한’처럼 외국인이 이해할 수 없는 표현도 많다. 이런 경우에는 오랫동안 번역가들과 이야기를 해서 내가 먼저 이해해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가가 유능한 사람일 때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박정희부터 문재인까지 10명의 대통령의 연설 번역을 감수했는데 사람마다 다른 말투는 어떻게 살렸나

"솔직히 말하면 말투가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려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의 연설은 애국가 제창처럼 행사마다 의무적으로 하는 의식(ritual ceremony)같았다. 그래서 대통령마다 뚜렷한 특징이 없어 열 명의 연설문을 이름을 가리고 봐도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은 시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해 전임자들과 좀 달랐다. 그래서 가끔 그 느낌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출처: 에리자벳씨 제공
1962년 한국에 처음 와 태화 기독교 사회 복지관에서 일하던 에리자벳씨(가운데), 1969년 6월 남편 이하우씨와의 결혼사진

국제 관계에 대해 공부하던 에리자벳씨는 워싱턴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남편 이하우씨를 처음 만났다. 에리자벳씨와 이하우씨는 각각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은 1969년 결혼했다. 그리고 부부는 한국에 정착하기로 하고 당시 4살이던 딸과 한국에 들어왔다.


-그럼 결혼하고 한국에 온 게 처음이었나

"1962년에 평화 봉사단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22살 때 선교단과 한국에 와서 인사동의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에서 3년동안 일했다. 서양식 건물에 기와지붕을 올린 건물이었는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새로운 모험을 해보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었다. 덕분에 미국보다 더 넓고 다양한 세상이 있고, 미국이 절대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계속 미국에 살았다면 내가 편협하다는 걸 몰랐을 거다."


-그리고 다시 미국에 돌아갔다고

"석사 과정을 위해 다시 미국에 돌아가 공부했다. 그러다 워싱턴에서 열린 동아시아 관련 세미나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1969년 결혼해 한국에 돌아왔다. 남편이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힘들지 않았는지

"서울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 한국에 오기로 결정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족·친구들과 멀리 떨어지는 게 힘들긴 했지만, 한국에도 친구가 있어 괜찮았다. 한국은 친절한 사람들이 많아 살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늘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활기찬 나라다. 특히 국제관계와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더 흥미로운 나라다."

출처: 에리자벳씨 제공
네덜란드 상원 부의장의 아내(오)와 악수를 나누는 에리자벳씨(왼), 알제리 IOC 위원의 아내(왼)와 악수를 나누는 에리자벳씨(오)

에리자벳씨가 일하던 초기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이 드물었다. 그래서 번역한 자료를 외국인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감수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그는 한국 사회나 문화와 관련한 소식을 전할 때는 관련 서적을 찾아보며 외국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애썼다. 그는 한국의 현대사를 외국인의 시선으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41년간 한국의 현대사를 지켜보며 인상 깊었던 일이 있다면

"1985년 첫 이산가족 상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워커힐 호텔에 마련한 프레스 센터에 있었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남북에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처음으로 다시 만나는 것을 봤던 때의 흥분이 아직 생생하다.


최근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은 당연히 남북정상회담이다. 판문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보도 내용을 전달받기 위해 일산 프레스 센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생중계로 김정은이 국경을 넘어 내려왔다가 문재인 대통령과 다시 북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출처: jobsN
에리자벳씨

-오랫동안 일하다 퇴임했는데 기분이 어떤지

"6월에 은퇴하긴 했지만 십년쯤은 더 일하고 싶었다. 매년 1월에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했는데 올해 1월에는 6개월 계약하고 퇴임하는 거로 일을 마무리하자고 했다. 현 정부가 비정규직을 없애고 있는데 내가 나이가 많으니 정규직으로 계약하기는 어려웠다. 아직 많이 아쉽고 일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영역 감수를 맡아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감사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훈장을 받아 정말 즐거웠다. 그 일이 기사화돼서 관심도 많이 받았다. 다 가족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지금은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왕립아세아학회’ 한국지부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의 문화·역사를 연구해 100년 넘게 외국인에게 알려온 곳이다. 여기서 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어서다. 한국 전문가들이 강의하기도 하고, 영어로 된 한국 관련 학술지를 만들기도 하니까 많은 공부가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일도 7월 안에 끝난다."


-그렇다면 앞으로 뭘 할 계획인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어를 잘 못해 번역가로 일할 수는 없다. 프리랜서로 감수 일을 하는 걸 생각해 봤는데, 워낙 이상한 번역이 많아서 그걸 감수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유명한 번역가조차 이상하게 번역해놓고 돈을 받는 경우가 있더라. 일종의 사기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한국어를 잘 못하니까 손대기가 힘들다. 지금은 가족들과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


글 jobsN 주윤규 인턴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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