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제가 28년간 아침·점심·저녁에 뭘 먹었는지 쓰는 이유는요..

조회수 2020. 9. 22. 21:13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괴짜 같은 잡식가의 기록' 시노다 나오키씨
28년 동안 삼시세끼를 기록한 직장인
소소한 일상·문화의 변화·이색음식 보는 재미
시노다 나오키씨 '괴짜 같은 잡식가의 기록'

일본 여행사 영업 부장 시노다 나오키(篠田 直樹·56)씨는 1990년 8월부터 자신이 먹은 삼시세끼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단 하루도 기록하지 않고 넘어간 적이 없다. 27년 10개월 동안 3만 400끼 이상을 빠짐없이 기록한 셈이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눈과 혀, 코, 위장 등 감각의 기억만으로 식사일기를 썼다. 보통 식사를 기록하는 ‘식기(食記)’와 외식을 기록하는 ‘찬기(餐記)’를 합해 지금까지 쌓인 노트가 51권을 넘었다. 

출처: jobsN
한국에 방문했을 때 만난 시노다 나오키씨. 한국에는 10년 만에 5번 째로 방문했다.

시노다씨의 식사일기에서 그의 인생사와 삶의 애환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습관을 두고 ‘대단치 않은 괴짜 같은 짓’이라 말한다. 하지만 오히려 평범한 직장인의 기록이기에 흥미롭다. 혼인신고 후 먹은 튀김 소바, 야구를 보며 마셨던 생맥주, 파리 출장 때 먹었던 에클레어 등 소소한 일상이 담겨있다.


2012년 일본 NHN에서 그를 소개한 후 ‘시노다 나오키 과장의 삼시세끼’라는 책을 냈다. 당시 책을 낼 때만 해도 과장이었던 그는 부장으로 승진했다. 2013년 10월부터 요미우리신문에 식당 소개 칼럼을 연재 중이다. 얼마 전 두번째 책 ‘샐러리맨 시노다 부장의 식사 일지’를 내고 한국을 찾아 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음식을 똑같이 재현하기보다 감상 위주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서재에 있는 책상 앞에 앉는다. 늘 똑같은 고쿠요 캠퍼스노트를 펼친다. 검은색 수성펜으로 접시부터 그린다. 접시 위에 음식을 담아내듯 그린다. 연필이나 샤프로 그려 수정하지 않고 단번에 그린다. 밑그림을 그린 다음 22색 마커펜으로 색을 칠한다. 하루 20분 정도면 충분하다. 그림 옆에 음식을 먹었을 때 감상, 당시 유행이나 사회적 이슈를 함께 적는다. 

출처: 앨리스 제공
'샐러리맨 시노다 부장의 식사 일지'에 나오는 식사 그림 일부.

“과거에는 스케치를 한 다음 문장을 쓰고, 주말에 색을 칠했습니다. 그런데 한번에 몰아서 색을 칠하니까 뭐가 뭔지 헷갈렸어요. 지금은 그림은 그날 다 완성하고, 주말에 기억을 찬찬히 더듬으며 문장을 씁니다.”


노트의 반절 분량인 17줄을 꽉 채워 한끼를 그린다. “대부분 접시는 동그란 모양이 많기 때문에 원을 얼마나 잘 그리냐가 그날 그림을 결정합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맛없다’는 소리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 한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관혼상제에서 먹은 음식의 경우에는 감상을 적지 않는다. “‘맛없다’는 표현보다는 ‘맛이 있지 않다’고 하는 편입니다. 저도 주말에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는데, 누가 평가를 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정말 맛없는 음식을 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나름 그리는 재미가 있어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맛이 없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거꾸로 두근거리기까지 하죠.” 

출처: 앨리스 제공
'시노다 나오키 과장의 삼시세끼' 편에 나오는 100엔 스시도감. 출장을 가서 그림을 그리기 여의치 않을 때는 일주일치 식사를 한 페이지에 몰아서 그리기도 한다. 회진스시집에서 먹은 스시를 두 페이지에 모두 담아 ‘스시 도감’ 그리거나, 각종 체인점을 비교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다.

실제 음식을 똑같이 그리기보다, 음식을 먹었을 때 느낌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제 그림을 보면 왜곡이 많습니다. 뚜껑을 손톱만 하게 그릴 때가 있는데, ‘뚜껑이 있었다’는 사실만 그린 겁니다. 그릇에 비해 새우튀김이 훨씬 클 때도 있어요. 저에게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배가 부를 때 느낌을 살리기 위해 음식을 어떻게 볼륨감 있게 그릴까 고민하기도 해요.”


그는 좋아하는 음식이라면 몇번이고 반복해서 먹는 '덕후력'도 발휘한다. 제일 많이 간 식당은 330번을 갔고, 지금까지 292번을 들러 올해 300번을 채울 예정인 식당도 있다.


식사일기에 담긴 일상과 생각


30년 가까이 식사일기를 쓰면서 일본 직장인들의 식사 문화도 조금씩 변했다. “버블경제시대 때는 다들 윤택한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디플레이션 시대부터는 직장인들이 ‘싸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락, 규동이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 음식을 예전보다 자주 먹습니다. 또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줄고 대형 체인점이 늘었습니다. 저도 간단한 음식을 먹기는 하지만, 점심을 그걸로만 때우기에는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출처: 시노다 나오키씨 블로그
3~4년 전부터 블로그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2번 정도 시노다씨의 아내가 노트를 스캔해 글을 올린다. (왼쪽부터)새우튀김과 홍콩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

점심시간은 직장인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시노다씨에게도 점심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중학교 때부터 급식을 먹었습니다. 급식의 질이 중요했습니다. 급식 맛이 없어서 선생님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급식제도가 빈부와 관계없이 같은 밥을 먹어 평등을 유지하도록 만든 중요한 제도이긴 하지만, 점심이 식사 시간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아쉽기는 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직장문화는 위계질서가 뚜렷하다. 일본 신입사원도 상사와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메뉴를 고를 권한이 없다. 설령 신입사원이 의견을 내서 먹으러 간다 해도 신입사원은 상사에게 ‘맛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전전긍긍해야 한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사와 함께 일을 했을 때가 있는데요. 저는 항상 먹고 싶은 메뉴가 확실해서, 상사가 뭘 먹고 싶냐고 물으면 먹고 싶은 음식을 말했어요. 하지만 늘 제가 말한 것과 다른 음식을 먹으러 갔습니다. 차라리 묻지 않길 바랐죠. 일본은 상사와 밥을 먹더라도 늘 각자 냅니다. 커피까지 더치페이를 하죠.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더치페이까지 하니 그때는 그림 그리는 게 좀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에는 멧돼지 회, 비둘기 고기, 아귀 간 등 이색 음식을 보는 재미도 있다. 여행사 직원답게 각국의 음식을 볼 수 있다. 30년 가까이 식사일기를 쓰다 보니 나름 맛집을 찾는 요령도 생겼다. 하지만 미쉐린에서 별을 받았다는 음식점만 찾진 않는다. 오히려 피한다.


“저는 미식가가 아니라 잡식가입니다. 유행을 따라 먹는다거나, 음식 비평을 위해 맛집만 골라 다니지 않습니다. 줄 서서 기다려 먹는 법도 없어요. 물론 회사 근처 새로운 식당이 생기면 꼭 가봅니다. 오로지 저를 위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출처: 시노다 나오키씨 제공
방한 일정 중에 한국에서 먹은 식사를 기록한 그림들 일부. 5월 14일 밤 서울식품, 5 월15일 아침 신라스테이 순이다. "우선 밥이 맛있었습니다. 찌는 형식으로 만드는 밥이 제 취향이었어요. 국물은 투명하지만 깊이가 있고 깔끔했습니다. 일본에는 탁한 국물이 대부분인데, 한국에는 맑은 국물도 많더군요. 제대로 육수를 내는 곳이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 일기를 추천하는 이유


그가 과거를 기록하는 이유는 오늘과 내일을 위해서다. 과거 노트를 다시 보는 일은 거의 없다. “과거의 영광이랄 것도 없고, 과거를 잘 돌아보는 편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을 때와 그림을 그리는 순간이 즐겁습니다. 제게는 앞으로 무엇을 그릴지가 중요합니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혹 과거 이야기만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보다는 앞날을 바라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제는 식사일기를 쓰지 않고서는 못 베긴다. 식사일기 덕분에 방송 출연을 하고 책을 냈지만 인생의 큰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지난 28년 동안 계속 기록했다는 건, 그만큼 제가 병치레 없이 건강하다는 뜻이겠지요.”


오히려 별거 아닌 일이기 때문에 식사 그림일기를 써보라 조언한다. “그림을 그릴 때 자유로울 수 있어요. 강조하고 싶으면 크게 그리면 됩니다.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내가 먹은 대로 그려도 되죠. 그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