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40만원, 고속도로 노점에서 숨구멍이 트였습니다"

조회수 2020. 9. 23. 10: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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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에 가면 그림 그리는 '한과 아씨'를 만날 수 있다
장인의 마음으로 한과를 빚는 김순주·이현영 모녀

충남 서산은 우리나라 생강 생산량의 40%를 차지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생강을 갈아 넣은 조청으로 한과를 만드는 모녀가 있다. ‘김순주 생강한과’의 김순주 장인과 그의 딸 이현영 실장이다. 모녀는 직접 농사지은 우리 쌀과 콩, 생강을 넣어 전통 한과를 만들고 있다.


“제가 서산으로 시집올 때만 해도 생강이 잘 팔렸어요. 100kg에 50만~60만 원 할 때니까 쌀농사도 짓고 해서 먹고살 만했죠. 그러다가 1990년대 초반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으로 외국산 농산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산지 가격이 5분의 1로 떨어졌어요.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죠. 또 무리하게 생강을 키우다 보니 연작 피해로 한 해 농사를 망친 적도 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었죠. 농사를 지으면서도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걸 찾던 중에 가공을 떠올렸고, 한과를 시작하게 됐습니다.”(김순주)


서산 생강은 다른 지역의 생강이나 외래종보다 향이 짙고 육질이 단단해 상품성에서 인정받는다. 서산 생강한과는 1997년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촌여성일감갖기 사업으로 생강 한과를 보급하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서산의 특산물로 자리 잡았다. 여성 농민들이 부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지역의 주요 사업으로 발전한 보기 드문 사례다.


김순주 대표는 스물두 살에 농촌으로 시집와 젊은 날을 생강 농사와 한과에 바쳤다. 그때만 해도 동네 부녀자들 누구나 만들어 먹던 음식 중 하나가 한과였다. 김 대표도 시어머니에게 한과 만드는 법을 배웠다. 2002년 ‘시골 한과’로 상표 등록해 2010년 ‘김순주 생강한과’로 이름을 바꿨다. 16년의 세월을 한과 만드는 일에 바치는 동안 생강만큼이나 매운 인생사를 맛봐야 했다. 그때를 떠올리는 모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온다.


“생강 가격이 내려가니 남편을 돕겠다고 한과 사업을 시작했는데 마을 사람과 동업해 크게 실패했어요. 자괴감이 들었죠. 2년을 쉬며 아득바득 준비했습니다. 현영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라 교육비도 필요하고 뭐라도 해야 했습니다. 농업인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교육을 쫓아다녔고 2002년 25평 자그마한 가게에서 한과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사업장은 열었지만 판로가 문제였다. 그는 무작정 농협이 운영하는 행담도 휴게소 로컬 푸드 판매장에 한과를 들고 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대로 돌아설 수 없어 휴일에 한과를 한 상자 풀어놓고 휴게소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식을 권했어요. 생강을 넣은 한과라고 하니 반응이 좋아 구름떼처럼 손님이 몰려들었죠. 판매장 직원이 한입 맛보더니 한번 가져와 보라더군요. 사실 생강만큼 한과와 어울리는 재료도 없어요. 기름에 튀긴 한과의 느끼한 맛을 맵고 진한 생강 향이 잡아주니 감칠맛이 나죠.”


김순주 대표는 한과뿐만 아니라 생강을 얇게 썰어 설탕에 묻힌 편강도 준비했다. 수입산 편강보다 토종 생강으로 만든 것은 섬유질이 부드럽고 향과 맛이 으뜸이다.


또 하나의 판로는 인근 안면도에서 뚫었다.


“안면도에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어요. 도로 옆에 천막을 치고 노점상을 열었습니다. 첫 주 토요일에 13만 원, 일요일에는 27만 원어치를 팔았어요. 주말 이틀 동안 판 것 치곤 꽤 큰돈이었죠. 빛이 보였습니다. 주말이면 무조건 나갔어요. 봉지나 상자 형태로 판매했는데, 한과 1kg에 1만 5000원에 팔았으니 일주일이면 돈 백 벌었죠. 그걸로 아이들 학비 대고 숨구멍이 트였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불법 노점 단속 때마다 장사를 접고 도망 다니듯 자리를 피해야 했고, 길에서 동창과 동네 사람들이 알아볼 때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곤 했다. 오로지 자식들만 생각하며 버텨온 시간이었다.


미미한 시작이었지만, 길에서 한과를 사 간 고객들이 택배로 재주문을 하며 단골이 늘어났다. 발로 뛴 노력이 결실로 다가왔다. 10여 년 만에 사업장을 4배 이상으로 불렸다.


화가에서 ‘한과 아씨’로

“당시 저는 천안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예술고등학교에 다녀서 엄마가 고생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어요. 예고 보낼 형편도 아닌데 어머니는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셨죠. 저를 아끼고 지지하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그 부분이 가장 고맙죠. 내 꿈을 지켜줬다는 게. 가끔 눈물 나요.”(이현영)


‘한과 아씨’ 이현영 실장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밖에 나가 놀기보다는 집에서 달력 뒷면에 그림 그리는 게 좋았다. 묘사에 탁월해 세밀화를 잘 그렸다고 한다. 미술을 배운 적도 없는데 대회만 나가면 상을 받았다. 그런 그를 어머니는 묵묵히 응원했다.


“선생님들이 예고 진학을 권했어요. 두 달 준비해 천안에 있는 예고에 진학할 수 있었고, 단국대 공예과에 입학해 화가의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대학까지는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무탈하게 진학했지만 순수예술 분야라 취업이 쉽지 않았다. 쉬고만 있을 수 없어 일반 회사 사무직에 입사해 3년여를 다녔지만, 돈은 모이지 않고 서울 생활은 팍팍하기만 했다. 월세방에서 문득 어머니와 한과를 떠올렸다. 마침 한과 판매가 늘어 일손이 부족할 때라 어머니는 딸에게 귀향을 권했다.


“서산이 워낙 시골이다 보니 막연히 서울을 동경했어요. 지금은 서울보다 이곳이 훨씬 좋아요. 공기 좋고 물 좋고. 서산에서도 부석면은 청정마을로 유명해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물이 깨끗하죠. 엄마 품 같은 마을입니다. 한과를 만들기에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어요.”


‘한과 아씨’는 이현영 실장이 고향으로 내려오면서부터 쓴 별칭이다. 마을 사람들이나 일터에서 부르기 쉬우라고 지은 이름인데 아씨라는 호칭이 친근감이 있어 반응도 좋고, 한과를 알리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이현영 실장은 2013년 본격적으로 사업에 참여하면서 홍보를 맡았다. 이를 위해 농업기술센터에서 SNS나 블로그 관리 교육을 받았다. 포장 상자에 들어가는 문구부터 포장지 디자인이나 판매가 이뤄지는 블로그, 홈페이지 관리 등에 그의 미적감각을 접목했더니 효과가 배가 됐다. 특히 소소하게 올리는 농장 이야기가 소비자들의 환심을 샀다.


“한과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를 농사로 해결해요. 쌀이나 생강, 콩 모두 아버지를 도와 우리 네 식구가 직접 농사짓죠. 평소 농사짓는 가족의 모습을 모두 보여주니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 제품을 사 가더군요. 정서적으로 다가갔습니다. 블로그의 영향으로 젊은 고객들도 유입됐어요. 젊은 엄마들이 아이를 위해 쌀 과자를 주문하기도 해요.”


‘한과 아씨’의 활약으로 매출은 2배 이상 뛰었다.


한과는 발효식품

한과는 발효에서 시작한다. 찹쌀을 물에 불려 1~2주 정도 발효시키고 건져 말린 다음에 곱게 가루 내 콩물을 넣어 반죽한다. 반죽을 시루에 찐 다음 다시 말려 잘게 썰어서 튀기면 우리가 아는 한과의 틀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조청을 바르고 튀밥을 입히면 완성이다.


“한과에 들어가는 생강조청은 어머니가 직접 쌀을 고아서 만듭니다. 물엿은 너무 달고 딱딱해 이에 들러붙는 데 반해 쌀엿은 식감이 부드럽고 단맛이 적당하죠. 여기에 생강을 갈아 넣으면 맵고 쓴맛이 쌀엿의 단맛과 어우러져 독특한 생강조청이 만들어집니다. 조청만 따로 팔아달라는 문의가 오지만 한과 만드는 데도 여력이 없어 못 팔아요.”

모녀는 생강조청이 맛있어 매일 한과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일이 많아 살찔 틈이 없다며 웃는다.


“7, 8월 삼복더위 때 말고는 쉬는 날이 없어요. 매해 1월이면 설 준비로 바쁘고, 3월에는 쌀 파종을 합니다. 4000평 남짓한 논에 네 식구가 달려들어 파종하고 모심기를 해요. 4월에 파종해서 5월에 모심고 6월에 콩 심으면 곧 여름이죠. 9월에는 추석을 준비하고 10월은 생강 수확기라 정신없어요. 수확과 동시에 생강을 썰어 편강을 만드는데, 샛노란 빛깔이 참 고아요. 이때를 놓치면 색이 탁해지죠. 나머지는 갈아서 1년 치 한과 재료를 준비합니다. 그러고 돌아서면 다시 설이죠. 명절에는 포장 상자나 보자기부터 시작해 잘 말린 쌀 반죽을 튀겨내는 일 등 일손이 많이 가요.”


바쁜 틈에도 이현영 실장은 그림을 그린다. 섬세한 면이 있어 생동감 있는 인물을 세밀하게 잘 그려내는데, 주변에서 부탁이 종종 들어온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농협미래농업지원센터에서 열린 시화전에 참가해 ‘농부의 꿈’을 주제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살려 앞으로 농부 그림이 담긴 패키지를 제작할 계획이다.


“시골에 들어온 지 5년 차라 일에 적응하느라 바빠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아요. 앞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농산물을 그려 패키지에 넣는 작업을 의뢰받아서 해보려고요. 물론 우리 제품부터 시작해야죠.” 온종일 모녀가 함께 일하다 보면 종종 마찰도 있을 터. 하지만 모녀는 서로의 감정에 더 마음이 머문다. 젊은 시절 한과 사업을 이끄느라 고생했을 엄마를 생각하며, 또 믿고 따라와 주는 딸을 보며 서로 어깨를 다독이고 묵묵히 한길을 향해 나아간다.


“어머니는 16년간 한과의 길을 이끌어 오셨잖아요. 저는 젊은 사람의 감각으로 한과의 구성이라든가 모양, 디자인, 소비자 주문 방식 등에서 좀 더 나은, 편리한 방식을 제안하죠. 그 안에서도 어머니가 지켜온 틀을 존중해야 합니다. 천천히 협의해 바꿔가야 하겠죠.”

어머니 김순주 대표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책임감, 추진력은 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딸에게 항상 ‘일단 해보자. 잘못해도 다시 되돌아오면 된다’고 말해요. 실패하더라도 도전하는 것이 인생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시작할 때부터 그랬어요.”


‘딸이 웃어른에게 공손하면서도 자기 일에 대해 중심을 가지고 끝까지 밀고 가는 능력이 있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그다. 어머니 김순주 대표는 화끈한 성격이라 바로바로 실행에 옮긴다면 딸 현영 씨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차분하게 방향을 제시한다.


“한과는 쌀을 발효해 만드는 간식이에요. 그렇기에 흡수와 소화가 잘 되죠. 차와 함께 늘 곁에 두고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우리 전통 먹거리로 한과를 지켜가고 싶습니다.”


글·사진 jobsN 서경리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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