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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쓰리잡 뛰며..'83년 돼지띠' 동갑내기, 드디어 '일냈다'

조회수 2020. 9. 23. 11:0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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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창작 뮤지컬 '레드북' 탄생 과정과 창작자의 삶
'여보셔'로 데뷔한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콤비
순수 창작 뮤지컬 '레드북' 탄생 과정과 창작자의 삶

2017년 화제 뮤지컬을 꼽으라면 ‘레드북’이 빠지지 않는다. 남성 중심의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 '안나'가 야한 소설을 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제목을 듣고 해외 라이선스인가 싶지만 순수 창작 뮤지컬이다.


창작뮤지컬은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드물다. 라이선스 뮤지컬은 이미 해외에서 검증받았기 때문에 투자를 받거나 스타를 캐스팅하기 쉽다. 하지만 창작뮤지컬은 투자한 만큼 수익을 얻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제작이 힘들다.


험난한 창작뮤지컬계에서 해외 라이선스 작품 못지 않은 토종 뮤지컬을 만든 주인공은 한정석(35) 작가와 이선영(35) 작곡가다. ‘레드북’도 처음에는 투자하겠다는 회사도, 지원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정부사업에 공모해 지원을 받아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레드북’은 첫 공연부터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이후 2017년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현재 세종문화회관에서 재공연 중이다. 뮤지컬 배우 유리아와 아이비가 주인공 안나 역을 맡았다. 한 작가와 이 작곡가에게 레드북 탄생과정과 뮤지컬 창작자의 삶을 들었다. 

출처: jobsN
(왼쪽부터)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

데뷔작 ’여신님이 보고계셔’ 흥행했으나 여전히 신인


두 사람은 2008년 2월 뮤지컬 아카데미 ‘불과 얼음’에서 만났다. 뮤지컬 창작자 지망생들이 매주 파트너를 바꿔 실습하는 수업이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가 잘 통해 금세 친해졌다. 한씨는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이씨는 경원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데뷔도 함께했다. 2013년 1월 창작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가 데뷔작이다. 완성도 높은 짜임새 덕분에 객석 점유율 90%, 관객 평점 9.7를 기록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13 대한민국 국회대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뮤지컬상을 받았다. 뮤지컬 마니아 사이에선 ‘여보셔 신드롬’으로 불린다.


-레드북을 쓴 계기는? 미투 운동이 활발한 시점에서 내용이 딱 들어 맞는데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

(한) “작품을 쓸 때만해도 페미니즘이 이슈가 아니었다. 다만 문제의식은 있었다. 여성 주인공 위주 뮤지컬을 쓰고 싶었다. 사회적 편견에 부딪히는 여성 예술가를 떠올리다 야한 이야기를 쓴다는 설정이 나왔다. 여성이 억압받는 시대를 찾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빅토리아 시대를 떠올렸다.”

(이) “당시 우울하고 무거운 작품이 많았다. 우리도 ‘레드북’ 전에 ‘카인과 아벨’이라는 작품을 작업 중이었는데 어두운 이야기라 힘들었다. 이와 반대로 유쾌하고 발랄한 로맨스였으면 했다.”

출처: PRM 제공
주인공 안나 역을 맡은 아이비.

-데뷔작이 흥행해 투자나 지원을 받기 수월하진 않았나.

(이) “여보셔 이후 삶이 크게 변하진 않았다. 계속 뮤지컬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우린 여전히 신인이었다. 이전 작품이 좋았다고 다음 작품이 흥한다는 법은 없으니 고민은 똑같았다.”

(한) “창작뮤지컬이라해도 대부분 회사가 뮤지컬을 기획하고 작가·작곡가를 섭외해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안정적으로 작품을 쓸 수 있지만 아무래도 제작사 의도나 성향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인이니까 쓰고 싶은 작품부터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두 사람은 우란문화재단에서 멘토링을 받았다. 멘토링을 받는 시기가 끝날 때 즈음 운좋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최하는 2015년 7월 ‘공연예술 창작산실 공모’가 떴다. 두 사람도 레드북 대본을 응모했다. ‘공연예술 창작산실’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제작비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전문가의 멘토링, 홍보·마케팅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출처: jobsN
이선영 작곡가.

맨땅에서 헤딩하듯·· 발전의 발전 거듭해 완성


2017년 12월 심사 결과 최우수작 1편, 우수작 4편 중에서 레드북은 우수작(올해의 신작 후보)으로 뽑혔다. 상금으로 2500만원을 받았다. 30분 동안 시범 공연을 할 기회도 얻었다. 제작비 3000만원과 극장 대관, 스태프 섭외 등을 문예위가 지원했다.


-당시 심사평은 어땠는지.

(이) “사회적 편견을 풍자하는 재치있는 이야기라는 평도 있었지만, ‘이야기가 장황하고 단어가 조야(粗野·천하고 상스러움)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또 대본은 참신하지만 무대에서 어떻게 구체화할지도 문제였다. 공모에서 상을 받았다고 우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좌절은 안했다. 할일이 워낙 많아 ‘이제 다음 단계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다. 곡을 모두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계획한 곡은 24곡이었지만 완성한 건 10곡 뿐이었다.”


한씨가 이야기를 다듬을 때 이씨는 나머지 곡을 썼다. 시범 공연(쇼케이스)은 후보 작품을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냐 없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단계였다. 하지만 30분 안에 그 가능성을 보여줘야 했고 그만큼 창작자의 고민은 컸다. 두 사람은 종일 붙어있진 않아도 하루 2통씩 꼭 전화하며 의견을 나눴다. 스태프들과 동고동락하며 4~5개월을 보냈다.  

출처: PRM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은 뮤지컬·문학·연극·오페라 등 공연예술분야 작품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시범 공연(쇼케이스)-초연(본 공연)-재공연 순으로 3단계에 걸쳐 지원한다. 대본 공모에서 수상하면 시범 공연을 지원하고, 시범 공연에서 우수작으로 뽑히면 초연을 지원한다. 초연을 본 관객 평가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면 재공연까지 지원한다. '올해의 신작 후보'에 뽑힌다고 다음 사업을 지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작품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발전시키고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레드북이 이 모든 과정에서 살아남은 셈이다.

-시범 공연 준비는 어땠나.

(한) “시범 공연 때는 의상도 없고 소품도 몇개 소도구 뿐이었다. 30분 안에 심사위원이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연출도 여러번 바꾸고 노래 순서도 자신있는 곡 위주로 재배치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최악의 가정을 했다.”


-2016년 6월 시범공연 때 우수작(올해의 신작)으로 뽑히고 나선 한시름 덜었겠다.

(이) “160~170분짜리 작품을 완성해야만 했다. 더이상 최악의 가정을 할 수 없었다. 현장 스태프도 40~50명으로 늘어나고, 배우도 캐스팅 해야했다. 너무 힘들어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 일을 크게 벌렸나 싶었다. 하지만 결국 좋은 작품이 나와서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2억원을 지원받아 레드북을 완성했다. 2017년 1월 10일부터 12일 간 초연을 했다. 네이버tv에서 공연 실황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600석 규모의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을 관객으로 다 채웠다. 포털 실시간 검색어 7위, 인터파크 전체 뮤지컬 순위 2위에 올랐다. 레드북은 그해 대상과 작품상을 비롯해 9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아쉽게도 무관이었지만 길이 남을 만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초연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에게 좋은 평가를 받아 '올해의 레퍼토리'로 뽑혔다. 재공연을 할 수 있도록 1억 5000만원을 지원 받았다.

출처: jobsN
한정석 작가.

’창작의 제약’이 주는 상상력


-뮤지컬의 매력은 뭔가.

(이) “창작의 제약이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이야기 속 캐릭터와 상황에 딱 맞는 곡을 만드는 희열이 있다. 조건 없이 곡을 쓰는 것보다 훨씬 많은 영감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몇 십명의 사람들이 함께한다는 매력도 있다. 뮤지컬은 수억개의 약속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음악이 빨리 나오거나, 배우가 대사를 늦게 하면 조명, 오케스트라, 무대 등 모든 약속이 삐그덕거거린다. 그런 약속을 다 이룬다는 희열이 있다.”

(한) “나도 비슷하게 게임이나 퍼즐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춤과 노래, 몸짓으로 이야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1시간 설명해도 이해 못하는 내용을 단 3분 짜리 노래로 설득할 수 있다.”


예술가는 수입이 불규칙적이다. 작가, 작곡가 등 뮤지컬 창작자는 작품별로 계약금을 받는다. 한씨와 이씨는 각자 투잡, 쓰리잡으로 생계를 잇고 작품 활동을 한다. 이씨는 10년 전 뮤지컬 조감독부터 시작해 다른 공연예술 작곡에 참여하고 있다. 연극 ‘커피와 로맹 거리’, 음악극 ‘템페스트’에서도 그의 곡을 들을 수 있었다. 한씨는 극작 수업이나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간헐적이지만 고정 수입을 벌고 있다.


-예술가는 배고파야한다는 인식이 있다.

(한) “그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작업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실패, 스트레스가 두렵진 않다. 하지만 많은 신인이 자신의 작품이 올라간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부당함을 참는다. 창작은 기술노동이라 생각한다. 영감이나 창의성만으로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갖춰야 할 기술이 있다. 그런 기술 전문성을 보장받았으면 한다. 신인이 제작자나 투자사와 거래를 한다는 게 힘들긴 하지만, 부당함을 참을 수만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예술인표준계약서라도 지켰으면 한다. 최저시급처럼 예술분야 신인도 계약할 때 최소 금액을 보장받거나 하는 장치가 생기길 바란다.”


글 jobsN 이연주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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