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수석 졸업생 인생 확 바꾼 결정적 사건 하나

조회수 2020. 9. 24. 01: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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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키즈는 행복하지 않았다"..카이스트 수석 졸업→여행 작가 꿈꾸는 청년 박성호씨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수석 졸업
1년간 6대륙 20개국 돌며 세계 일주
11월 말 여행 에세이집 출간 예정

서울 개포동에서 태어나 사교육 1번지 ‘대치동 키즈’로 자란 박성호(25)씨는 2017년 2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30여명의 졸업생 동기들은 대부분 석·박사 학위를 따는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거나 대기업 디자인팀에 취업했다. 박씨는 완전히 다른 길을 선택했다. ‘여행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행복해지고 싶어서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를 비롯한 주변 어른들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행복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박씨가 경험한 사회는 완전 딴 판이었다.

출처: 박성호씨 제공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여행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박성호(25)씨.

2010년 인재들만 모인다는 카이스트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3명의 학우가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중 한 명은 박씨와 가까운 동기였다. 도망치듯 입대한 군대에서 박씨는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고 한다. ‘행복’에 대한 고민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군 제대 후 단 1000만원만 수중에 들고 1년간 6대륙 20개국을 돌아다녔다.


아프리카에서는 택시 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도 넘겼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그의 가치관과 생각의 방향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11월 말 여행 에세이집 출간도 앞두고 있다. 열흘에 한 번씩 강연도 다닌다. ‘행복 전도사’가 된 박성호씨를 직접 만나 그가 정의하는 행복이 뭔지 들어봤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은 행복의 충분조건이 아니었다

-‘대치동 키즈’ 시절 일상생활은 어땠나


“전형적인 ‘대치동 키즈’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국영수 중심으로 2~3개 학원을 다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는 다니는 학원이 6개로 늘었다. 수학 학원 2군데, 수학 과외, 영어 학원, 국어 학원, 과학 학원은 기본이고 실기 시험이 있을 때마다 체육이나 음악 과목을 위해 단기 과외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을 버티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등학교에 입학 했다. 울산에 위치한 현대청운고였다. 자립형 사립학교로 전교생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지방 기숙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학원 뺑뺑이를 하고 싶지 않아서다.


입학 후 첫 번째 시험을 치렀다. 180명 중 135등을 했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 탓이었다. 부모님은 강남 쪽 일반고로 전학을 오라고 거듭 회유했지만 오기를 갖고 울산에 머물렀다. 졸업할 땐 전교 15등까지 성적을 올려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카이스트 ‘차등 수업료 징수제’가 시행되고 학우 3명을 잃었다던데

“1학년 때는 무(無)학과로 입학해서 최종적으로는 산업디자인학과를 전공했다. 당시 카이스트는 ‘차등 수업료 징수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4.3점 만점 기준으로 평점이 3.3점 이상이면 수업료 전액 면제, 3.29점부터 3.0점까지는 150만원을 냈다. 3.0점 밑으로는 0.01점당 6만3000원씩 수업료를 받았다. 2.0점 이하가 되면 700만원 수준의 수업료를 내도록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쟤는 700만원 내는 애’ ‘쟤는 안 내는 애’ 이런 식으로 구분이 생겼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실패자’가 되는 분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학우 3명이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다. 자살한 학우 중 한 명은 가까운 동기였다. 특목고 출신이었는데 공부를 더 잘해서 그 친구에게 과외를 받기도 했다. 그 동기는 주변 친구들에게 자살을 예고했다. 하지만 모두 무시했다. 과제에 떠밀려 너무 바빴던 거다. 학교 전체가 장례식장 분위기였다. 도망치듯 군에 입대했다.”

출처: 박성호씨 제공
세계 일주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호주 바나나 농장으로 들어간 박성호씨. 100일간 농장일을 하며 살이 10kg 빠졌다. 가운데 사진은 그가 묵었던 컨테이너 박스. 거친 농장일을 하며 손도 많이 상했다.

 ‘대치동 키즈’ 진짜 행복을 꿈꾸다


-세계 일주 계기는 뭔가


“2014년 군 제대를 하고 학교로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악착같이 공부해서 복학 후 두 학기 연달아 과 수석을 했다. 더 큰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원래 공부하던 분야에서 최고가 한 번 돼 보고 싶었다.


2015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1년을 잡고 출발했던 게 세계 일주로 확장된 거다. 호주에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뉴질랜드로 여행을 다녀온 게 계기가 됐다. 20대 청춘 시절에 호주에만 1년을 머무는 게 아까웠다. 뉴질랜드 여행을 마치자마자 호주 바나나 농장 지역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 저녁에 직접 만든 파스타만 먹었다. 사람들을 만나면 돈을 써야 하니까 컨테이너 박스에서 혼자 지냈다. 외로워 미칠 것 같더라.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세계 일주’라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버텨냈다. 그렇게 100일이 지나자 한국 돈으로 1000만원가량이 모였다. 6대륙 20개국을 횡단하는 본격적인 세계 일주가 시작됐다.”


-가장 인상 깊었던 세계 일주 순간이 있나


“필리핀, 태국,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로 들어갔다. 도요타 랜드크루저를 타고 세렝게티 초원을 마음껏 달리기도 했고 기린과 코뿔소 사이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러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택시 강도를 만난 거다. 50여만원을 빼앗긴 뒤에야 달리는 택시에서 내던져지며 풀려날 수 있었다.”

출처: 박성호씨 제공
박성호씨는 1년간 6대륙 20개국을 횡단하고 돌아왔다.

꿈에서 다시 현실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치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기도 했던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까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현실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 자신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대자연 앞에 인간은 얼마나 작은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동기들처럼 대학원에 가서 교수가 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 임원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반드시 그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도 낙오자가 되는 건 아니란 확신도 얻었다.


문제는 부모님의 기대를 쉽게 져버리긴 어려웠다는 것이다. 타협한 결과는 치의학전문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전문직을 가져서 3~4일은 페이 닥터로 일하고 나머지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살 수 있을 거라고 합리화했다. 졸업전시회 작품으로 프로그래밍화된 칫솔을 제작해서 ‘교내 우수 졸업 작품상’과 ‘아우디 최고 혁신상’도 수상했다. 치의전 입학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포트폴리오에 담아내기에 좋은 결과물들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여행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1월 말에는 에세이집까지 출간된다던데


“2017년 5월쯤 마음을 굳혔다. 원고 마감중이다. 부모님은 강경하게 반대하셨다. 전공을 살리거나, 남들처럼 안정적인 취업하길 바라셨다. 작가가 되는 일이 대학에서 배운 내용과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디자인도 대중의 니즈를 파악해서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않나. 책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 사람들은 분명 행복하고 싶지만 행복이 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모르고 떠밀려서 산다. 내가 꿈꾸는 여행 작가 개념은 기행문을 담아내는 건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통해 각 문화권과 개별 국가 사람들이 정의하는 행복, 삶의 이유 등을 정리하고 싶다.”


-사람들이 박성호씨의 삶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생각하나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지금은 원고 마감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이전까지는 한 달에 세 번 정도 강연을 다녔다. 카이스트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적도 있다. 강연 주제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나를 찾고, 행복해지자’다.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인정은 하지만 자기 스스로 혹은 자녀들이 그렇게 살겠다고 나서면 앞날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몰라도 일단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 사람이기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응원한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신다.


욕도 많이 먹는다. 행복이나 여행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 운운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시더라. 부모님의 경제력이 받쳐줬기 때문에 학원도 많이 다닐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학교도 국민 세금으로 다녔다.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들과 ‘행복’을 논하고 싶다.


각자가 규정하는 행복은 천차만별이다. 그걸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풍요로움만을 기준으로 정의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행복은 고민하는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나의 행복은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 삶을 위해 한 발짝씩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글 jobsN 박가영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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