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대 연봉 포기→트럭 모는 정신과 의사의 속사정

조회수 2020. 9. 24. 00: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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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행복을 키우는 게 내 꿈이고, 그 꿈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내 행복"
트럭을 몰며 무료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
임재영 의왕시정신건강복지센터장

과 의사가 있다. 자신의 전신사진과 ‘찾아가는 고민상담소, 마음의 때를 씻어요’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흰색 트럭을 몰고 다니는 임재영 씨다.


의대 공부와 공중보건의사,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정신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16년. 드디어 병원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는 3년 만에 거리로 나왔다.


요즘 그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상담, 강연, 방송 출연, 집필 등 다각도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일에 대해 ‘행복을 키우는 사회활동가’라는 이름도 붙였다. 의왕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만났을 때 임재영 씨는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1주일의 1.5일은 이곳에서 센터장으로 일합니다. 이전에 근무했던 병원의 원장님이 무작정 밖으로 나가려는 저를 걱정해 이 자리를 주선해주셨죠. 다른 일들과 병행할 수 있고, 지역 주민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일이라 감사히 맡았습니다.”


연봉을 물어보니 이전의 6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는 그가 어떤 절박함 때문에 높은 연봉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면 증세가 상당히 나빠진 환자만 만나게 됩니다. ‘상태가 악화되기 전에 치료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루 평균 37명이 자살하는, 세계적으로도 손꼽히게 자살률이 높은 나라입니다. 자살자의 심리 부검을 해보면 80~90%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이 중 한 번이라도 병원을 찾은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우울증에 걸려도 선입견이나 편견 때문에 치료받지 못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거지요. ‘훌륭한 선생님들이 치료를 잘하고 계시니, 나는 정신 건강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 중증 정신질환으로 진전되지 않도록 조기 진단하고 예방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의로 일한 지 1년 반 쯤부터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3년 후인 2016년 봄, 의왕시정신건강복지센터 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트럭을 몰고 거리로 나갔다. 어디에서 상담하면 좋을까 고민하다 문득 푸드트럭이 떠올랐고, ‘트럭을 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비 1200여만 원을 털어 트럭을 사고 내부를 아늑한 상담 공간으로 꾸몄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신과 전문의가 무료 상담을 해준다는 데도 선뜻 트럭에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주변 시선이나 ‘다른 목적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 때문에 꺼리는 사람이 많아 네다섯 시간을 기다려 한 명 상담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이게 현실이구나. 원장님과 선배들이 왜 그렇게 걱정했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막막했다.


“석 달여 제가 허탕 치고 다니는 모습을 지켜본 의왕시정신건강복지센터 동료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우리도 같이 할까요?’라고 했어요. 그들의 부담을 늘리는 일인데도 그렇게 말해주어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때부터 매주 목요일 의왕시 곳곳을 다니면서 트럭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동사무소들이 홍보에 나서주어서 한결 수월해졌죠. 하지만 의왕시를 벗어나면 바뀐 게 없었습니다.”


그들이 트럭에 오르는 이유 

2016년 10월 그의 사연이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학교와 청소년 단체, 노인복지관, 구치소 등에서의 상담과 강연 요청, 방송 출연 요청이 이어지고, 전국 곳곳에서 그를 불렀다. 이제 그의 트럭에 오르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 블로그를 통해 시간과 장소를 공지하면서 상담 예약을 받고 있다.


“트럭에서는 한 사람당 40분에서 1시간 정도 만나 이야기를 나눕니다. 중1 학생부터 88세 어르신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만나자마자 우는 분, 저와 상담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받고 힘을 내는 분도 있어요. ‘이런 이야기는 태어나서 처음 해본다’, ‘내 이야기를 끊지 않고 이렇게 집중해서 들어준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운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도 속 이야기를 할 사람이 없고, 그만큼 외로운 거예요. 그들에게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게 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담 목적이 치료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기 발견과 조기 개입이 목적으로, 상담자의 상태에 따라 정신건강복지센터나 병원, 상담센터에서 치료받도록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왜 그렇게 마음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마음을 앓았던 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중3 때 이야기를 꺼냈다.


“‘과학자나 공학자가 되어 인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중3 때 과학고에 가려고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졸릴까봐 저녁밥도 먹지 않고, 하루에 3시간 자면서 공부했죠. 그러고도 시험에 떨어지자 바보가 된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해도 안 됐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또다시 실패할까봐 노력하기가 두려워졌죠. 의대에 간 것도 사실은 제 상처를 보상받고 싶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돈도 잘 버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의대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아 내 길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그만두지도 못했습니다. 걸핏하면 결석하고 술만 마시다 유급을 당하고, 열등생으로 꾸역꾸역 학교에 다녔죠.”


그러다 정신과 수업을 들으면서 길이 보이는 것 같았고, 우선 자신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스스로가 해결되지 않으면 누구를 도울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니 보듬어주고 싶어졌다. 처음으로 의대 수업이 재미있었다.


“의대에 다닐 때 저 역시 경증 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정신과 공부에서 답을 찾으면서 ‘정신과 의사가 되어 나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다. 말은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으면서 술로 푸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폐쇄 병동에서 만난 환자들 

폐쇄 병동에 들어가 처음 정신분열증 환자를 접할 때는 그 역시 두려웠다. 하지만 그들의 천사 같고 아기 같은 모습에 한 방 맞은 듯했다. 그저 너무 순수하고 심약한 사람들이었다. 편견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에 시달리거나 환청을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자 그들도 마음을 열었다. 알코올중독 환자들과 함께 주말에 봉사활동을 나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경험을 통해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의대 성적이 나빠 우여곡절 끝에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치고 드디어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을 때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 기쁘지는 않아 의아했다”고 말한다.


“그때 ‘행복이란 무엇인지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긍정성연구회에 들어가 공부하고, 책을 보면서 연구했죠. 그러다 내린 결론이 행복은 성취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이었어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서 점점 성장해가는 게 행복인 거죠. 사람들의 행복을 키우는 게 제 꿈이고, 그 꿈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제게는 행복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행키(행복을 키우는)샘’으로 불러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마음 아픈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키(hanky, 손수건)도 되고 싶다고 한다. 그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게 있다.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불안정한 길로 들어섰으니 과연 가족도 만족하느냐는 의문이다.


“아내를 설득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저의 절실함이 느껴졌는지 ‘못하게 했다가는 평생 원망 듣겠다’면서 허락해주었죠. 아내 허락 없이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없어요. 돈을 많이 가져다주지는 못하지만, 집에서는 아이들과 놀아주고 집안일도 같이 하면서 아내 말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해요. 가족의 행복을 내팽개치고 내 행복만 챙길 수는 없으니까요.”


글 jobsN 이선주 조선뉴스프레스 객원기자, 사진 김선아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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