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 검색어 입력폼

세계챔피언 탈북녀 뒤흔든 말 "북에나 있지 왜 와서 XX이야"

조회수 2020. 9. 23. 23:59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북한 체육엘리트→탈북→3체급 챔피언 석권..목표는 도쿄 올림픽 금메달
세계 여자 복싱 챔피언, 최현미
김철주 사범대 체육관 권투 엘리트 출신
목표는 "권투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지도자"

WBA 페더급(57.15kg 이하) 챔피언·슈퍼 페더급(58.97kg급) 챔피언, WBF 슈퍼 페더급 챔피언


한 번도 지지 않았다. 프로 전적 13전 12승 1무. 무패 기록의 주인공은 WBA, WBF 통합 세계 챔피언 최현미(27). 그녀는 탈북민이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었다.

출처: 최현미 인스타그램 캡처
최현미 선수

권투 신동 ‘김철주 사범대’ 스카우트


평양에 살던 그녀는 어렸을 때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권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체육을 좋아할 뿐이었다. 체육 시간에 꼬마 최현미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체육 선생님이 권투해볼 생각이 없냐고 먼저 물었다. 집까지 찾아왔다. 부모님이 '여자애가 무슨 권투냐'고 반대하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설득했다.


-부모님이 허락하셨나요.

"선생님께서 '이제 찾아오지 않을 테니 체육관에 한 번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갔더니 또래 여자 친구들이 샌드백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제가 그 친구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다음날부터 아코디언을 메고 체육관에 갔습니다. 그렇게 부모님 몰래 3개월 동안 체육관을 다녔어요."


최현미는 권투에 재능을 보였다. 3개월 배워, 권투 3년 차 언니를 이겼다. 관장이 스파링 영상을 찍어 부모님에게 보여줬다. 다음 날 술을 거하게 마신 아버지는 '올림픽에서 금메달 딸 자신 있니? 중간에 그만둔다고 할 거면 시작도 하지말라'고 했다. 그렇게 '김철주사범대학 체육관'에서 합숙을 시작했다.

출처: 조선 DB
어린 최현미 선수

"김철주사범대학 체육관은 운동선수 엘리트 집단이에요. 운동에 소질 있는 아이들을 데려다가 올림픽 등 국제대회를 목표로 키우죠. 하지만 모든 훈련과정과 북한에서 치르는 시합은 비밀리에 진행합니다. 저를 포함해 북한 곳곳에서 권투에 재능을 보인 약 20명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체육관에서 훈련받는 아이들에게 월급과 쌀을 지급합니다. 지방에서 온 아이들은 그것을 가족에게 보내요. 사실상 소녀 가장인 셈이죠. 그런데 합숙 중간중간 평가를 해서 성적이 낮은 사람은 자릅니다. 마지막에 남는 사람은 5명 정도예요. 생존이 걸려있는 만큼 다들 훈련에 죽기 살기로 임합니다."


중국→베트남→한국 4개월에 걸친 탈북


2년 동안 '눈 뜨면 경쟁'인 훈련을 계속하던 중 방학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회령에 있는 할머니한테 놀러 가자고 했다. 회령은 함경북도에 위치해 중국 국경과 가깝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리고 최현미. 네 가족이 기차에 몸을 실었다. 회령에 도착한 가족은 6시간 넘게 걸어 중국에 도착했다. 탈북이었다. 하지만 어린 최현미는 그때까지만 해도 탈북인 줄 몰랐다.


중국 도착 후,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베트남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한국에 간다고 말해주셨습니다. 북한에선 한국을 남조선이라고 배웁니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다른 나라가 있는 줄 알고 좋다고 했죠."


-베트남에서 바로 한국에 왔나요.

"호텔에 도착했는데 정 장입은 사람들이 와서 아버지를 데려갔습니다. 그 뒤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다른 호텔로 갔던 오빠도 연락이 끊겼죠. 엄마와 저는 좁은 방에 창문 하나 있는 방에 묵었어요. 식사시간에 맞춰 문으로 밥을 가져다줬습니다. 탈북자 신분이었기에 밖에도 못 나갔어요. 아빠와 오빠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4개월을 갇혀 있다가 2004년 7월 27일,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던 건가요.

"국정원에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북한에서 무역업을 하셨어요. 국제 무역회사 종합지도원 총괄을 맡던 고위급이었습니다. 한국과 연락하면서 탈북 계획을 오랫동안 세웠어요. 원래는 국정원에서 가족 모두를 한국으로 데려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서도 고위급이 내려오는 게 흔치 않았죠. 국정원에서 의심이 들어 아버지만 데려가서 몇 달간 취조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저희를 부른 것입니다."


"왜 한국에 와서 XX이야" 한마디에 다시 시작한 운동


한국 학교생활이 궁금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학교부터 다녔다. 권투는 그만뒀다. 적응이 어렵진 않았다. '평양에서 온 최현미라고 해'라고 소개했다. 친구들이 더 관심을 갖고 다가왔다. 오히려 공부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북한에서 1,2등을 다퉜는데, 한국에선 성적이 바닥이었다. 그 즈음 운동을 다시 시작한 계기가 생겼다.


"화장실을 갔다가 어떤 학생과 어깨가 부딪쳤습니다. 상대방이 욕을 하기 시작 했어요. '북한에나 있지 왜 와서 XX이야' 그때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님은 일거리를 찾아다니시고, 오빠는 대학 입시로 힘들어했습니다. 저라도 빨리 성공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습니다. 권투였습니다."

출처: 조선 DB
최현미 선수가 링 위에서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는 모습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생활체육 대회에 출전했다. 나가는 대회마다 금메달이었다. 고등학교 가서도 운동을 계속했다. 57kg급과 60kg급을 오가며 17전 16 KO승 1패의 기록을 이뤘다. 2007년, 프로로 전향했다. 1년 만에 WBA 여자 페더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3체급 세계 챔피언, 목표는 후배 양성


2008년, WBA 여자 페더급 세계 정상에 오른 후 2013년 7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챔피언 벨트를 반납했다.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 하고 싶었다. 슈퍼 페더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같은 해 5월, WBF(세계복싱연맹) 슈퍼 페더급 결정전을 치렀다. 결과는 심판전원일치 판정승. WBA·WBF 통합 챔피언을 달성했다. 3개월 후엔 푸진 라이카 선수를 상대로 WBA 슈퍼 페더급 세계 챔피언에 도전해 승리했다. 통합 챔피언에 이어 3체급 챔피언에 오른 순간이었다.

출처: 조선 DB
최 선수는 프로 전향 이후 한 번도 패한적이 없다.

여성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르면 4000만원 정도의 파이트 머니를 받는다. 최현미는 총 13번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누적 파이트 머니가 억대다. 하지만 후원사와 수요에 따라 파이트머니가 달라진다고 한다. 권투협회 한 관계자는 "권투가 인기 많던 시절엔 챔피언들이 아파트 살 정도의 파이트 머니를 받았지만, 요즘은 아니다"라며 "수요가 많으면 후원사 측에서 제공하는 파이트 머니도 오르는데 요즘엔 인기가 없어서 후원사를 찾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챔피언 결정전이나 타이틀 방어전은 후원사를 통해 열린다. 그 후 협회의 승인을 받아 진행된다. 최현미 선수 역시 페더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 획득 후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후원사를 구하지 못해 약 7개월 동안 링 위에 오르지 못했다.


"1차 방어전을 치러야 하는데 후원사가 없었습니다. 링 위에 서보지도 못하고 챔피언 벨트를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어요. 당시 노원구에서 제 사연을 듣고 직접 체육회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노원구가 후원하고 노원구체육회와 한국권투위원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챔피언 방어전를 열어줬습니다."

출처: 최현미 인스타그램 캡처, jobsN
2차 방어전 당시 무한도전과 함께한 최현미 선수와 jobsN 인터뷰 모습

이후에도 후원사를 찾지 못했다. 사연을 들은 MBC 무한도전 팀이 2차 방어전을 후원했다. 한일전이었다. 판정승을 이끌어내며 2차 방어도 성공했다. 비인기 종목을 업으로 하는 프로권투선수의 어려운 현실도 알렸다. 사람들은 TV에 나온 최현미 선수를 알아봤다. 인기를 얻었지만 현실은 똑같았다. 아직도 후원사를 찾기 어렵다. 방어전을 위해 직접 후원사를 찾아다닌다.


이런 현실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는다. 오는 10월 15일, WBA 슈퍼 페더급 5차 방어전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는 더 크다. "이제 프로 선수도 올림픽 출전이 가능합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과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복싱을 시작할 때 가졌던 꿈이기도 합니다. 아마 은퇴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은퇴 후엔 제 노하우로 권투 꿈나무들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석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박사학위까지 딸 겁니다. 나중엔 교수로서 후배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글 jobsN 이승아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