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에서 주워온 잡동사니 가득한 이곳은 어디?

조회수 2020. 9. 22. 15:1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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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짜리 영상 위해 720개 소리를 만들어내는 남자들
게임 몰입도 높이는 핵심 요소로 ‘사운드’ 부각돼
고물상·폐차장 돌아다니며 사운드 제작 소품 구해
신규 유입 없어서 후임 직접 찾아 나서기도
출처: jobsN
경기도 분당 엔씨소프트 본사 지하 2층에 위치한 폴리 스튜디오. 게임 사운드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다양한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다.

엔씨소프트 지하 2층 사운드실에는 자동차 문짝, 말린 나뭇가지, 깨진 벽돌, 바이올린 활 등이 널브러져 있다. 원룸 단지, 폐차장 등에서 직접 수거해왔다는 이 물건들은 게임 사운드 제작용 소품이다.


엔씨소프트는 국내 게임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폴리 전용 녹음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다. 스튜디오 구석구석에 위치한 다양한 물건들을 활용해서 소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폴리 전용 녹음 스튜디오에서는 마이크 이동이 쉬워야 한다. 성우 더빙 녹음실이나 일반 보이스 녹음실이 마이크를 고정해 놓고 사람이 키를 맞추는 것과 대비된다. 발 구르는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서 폴리 전용 녹음 스튜디오에는 반드시 콘크리트 바닥과 모래 바닥이 설치돼 있어야 한다.


사운드가 게임의 품질을 가르는 핵심 요소로 떠오르자 ‘소리’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한 것이다. 다른 게임 회사들도 10년 전 전체 개발비의 2%에 불과하던 투자 비중을 5~7%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폴리 아티스트(foley artist)’는 방송이나 영화 영상을 보면서 주변 사물을 가지고 여러 가지 소리를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폴리 아티스트가 만든 소리를 녹음하거나 믹싱하는 사람은 ‘폴리 레코디스트(foley recordist)’다. ‘폴리’라는 용어는 무성영화에 처음으로 소리를 입힌 ‘잭 폴리(Jack Foley)’의 이름에서 나왔다.


과거 영화나 방송사에서 활약하던 폴리들이 게임 산업에 진출한 셈이다. 게임 쪽 폴리의 세계는 기존 방송, 영화와 무엇이 다른지 엔씨소프트 사운드실 박준오(37·이하 박) 폴리 아티스트와 이승기(31·이하 이) 폴리 레코디스트에게 물었다. 

게임 영상 ‘실사화’ 되면서 사운드 더욱 중요해져

출처: jobsN
엔씨소프트 사운드실에서 근무하는 이승기 폴리 레코디스트(왼쪽)와 박준오 폴리 아티스트(오른쪽).

-‘폴리 아티스트’와 ‘폴리 레코디스트’의 차이는 뭔가


박: 폴리 아티스트는 도구를 이용해서 직접 소리를 만들고, 폴리 레코디스트가 그 소리를 효과적으로 녹음을 한다. 같이 고민하고 의논하면서 소리를 완성해 나가지만, 폴리 아티스트는 어떤 도구를 가지고 어떻게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지를 주로 고민한다. 폴리 레코디스트는 엔지니어 즉 기술직에 가깝다. 폴리 아티스트가 만들어낸 소리를 어떻게 편집해서 영상에 삽입할지를 연구한다. 게임 산업뿐만 아니라 영화계에서도 폴리 아티스트와 폴리 레코디스트가 2인 1조로 작업을 진행한다.


이: 폴리 레코디스트의 경우 일반적인 녹음 상식을 깨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마이크를 통 속에 넣고 녹음해서 소리를 과장할 때가 있다. 거대한 몬스터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실제 소리를 일부러 왜곡시킨다. 비정상적인 소리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마이크를 땅바닥에 떨어트려 ‘퍽’ 소리가 나면 일반적인 녹음 분야에서는 ‘쓸 수 없는 소리’로 간주하지만, 폴리 분야에서는 새로운 효과음으로 쓸 수도 있다.


-국내 게임 산업에서 ‘폴리’ 분야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건 언제부터인가


박: 북미나 유럽의 콘솔 게임 같은 경우 트레일러 영상(작품을 광고하기 위해 만든 짧은 예고용 단편 영상물)이 거의 영화 수준이다. 게임 영상이 점차 사실적으로 변하면서 사운도도 같이 중요해졌다. 국내에서는 2010년 이후다. ‘폴리 아티스트’ ‘폴리 레코디스트’는 그전에는 게임 산업에서는 없던 직무다.


엔씨소프트는 2013년 사옥을 판교로 옮겨오면서 국내 최초로 폴리 전용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설계 단계부터 지하 스튜디오를 염두에 두고 건물을 지었다. 전에는 폴리 사운드를 활용하고 싶을 때 영화 스튜디오에 외주를 맡겼다.


-영화나 드라마 산업과 게임 산업에서의 폴리 작업은 어떻게 다른가


이: 박준오씨는 원래 영화계에서 폴리 아티스트 일을 했다. 저는 드라마 쪽에서 활동하던 폴리 아티스트다. 둘 다 다른 쪽에서 일하다 게임이 좋아서 이 쪽으로 넘어온 케이스다.


영화나 드라마 산업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의 소리를 만든다. 그래서 소리가 창의적이기 보다는 대중적이어야 한다. 해당 영상을 보고 소리를 들었을 때 누구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임 산업에서는 실제 존재하는 것들의 소리 외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소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게임 캐릭터 자체가 인간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비교해보면 게임 분야에서의 폴리가 더 넓은 스펙트럼의 소리를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다.  

2분짜리 영상 채우기 위해 720개 소리 만들어내기도

-전반적인 폴리 작업 과정을 설명해달라


박: 폴리 아티스트와 폴리 레코디스트가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소리를 제작하는 건 아니다. ‘트레일러 영상’과 ‘인 게임 컷 신(In Game Cut Scene)’을 주로 담당한다.


트레일러 영상은 홍보를 위해서 만들어진 영상이다. 요즘 게임의 트레일러 영상들은 영화와 비슷한 수준의 영상미를 선보인다. 인 게임 컷 신은 게임 중간에 등장하는 스토리가 담긴 연출 영상을 말한다.


해당 게임 영상의 총 플레이 시간이 확정되면 작업을 시작한다. 이미 소리를 만들어서 영상에 입히는 작업까지 완료했는데, 영상 자체가 바뀌어 버리면 폴리 작업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임 픽스 된 영상을 ‘중간 영상’이라고 말하는데, 영상 제작팀으로부터 이 중간 영상을 받아서 제작에 들어간다. 마술을 부릴 때 나오는 소리 등은 ‘효과음 팀’에서 후반 작업을 한다.


-게임 사운드 분야도 여러 갈래로 나뉘나


이: 맞다. ‘폴리’라는 분야는 전체 게임 사운드 디자인 중 하나의 파트일 뿐이다. 기계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서 직접 소리를 만들어내는 거다. 반대로 ‘불꽃 소리’ 등을 표현하는 효과음 파트에서는 상용화돼 있는 사운드 소스를 다시 믹싱하거나 편집해서 사용한다. 캐릭터 대사를 입히는 팀, 배경 음악을 제작하는 팀도 각각 따로 있다.


생각보다 좋은 퀄리티의 사운드 소스를 찾기가 어렵다. 효과음 파트에서 3~4년씩 일을 하다 보면 매번 같은 소리들을 재가공해서 사용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새로운 소리에 대한 목마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 효과음 팀에서 폴리 팀으로 특정 사운드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한다. 프로젝트 작업 외에 시간이 날 때마다 효과음 제작에 활용할 소리들을 미리 만들어 놓기도 한다. 이미 작업해둔 사운드 묶음만 6000개 이상이다.

-보통 작업 시간은 얼마나 걸리나


박: 영상 난이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반나절 밖에 안 걸리는 영상도 있고 2주 이상이 걸리는 영상도 있다. 난이도는 영상의 내용이 결정한다. 가령 액션신이 많거나 액션의 가짓수가 다양할수록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남녀 캐릭터가 서로 눈빛 교환만 하는 애정 신의 경우에는 저희가 작업할 게 별로 없다.


‘블레이드 앤 소울(Blade and soul )’이라는 게임에는 ‘격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격사의 트레일러 영상은 총 2분 20초다. 그 영상을 채우기 위해서 폴리 팀에서 제작한 소리만 총 720개다.


격사 캐릭터는 와이어를 주무기로 사용하는데, 와이어를 발사하거나 감는 소리들이 자극적으로 들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의 도구를 이용해서 소리를 만들지 않고 낚싯대나 바이올린 활 등 여러 가지 도구를 긁어서 만든 소리들을 일일이 합성해서 와이어 소리를 완성했다. 

-어떤 도구를 활용하나

박: 녹음실 안에는 정말 다양한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철제 문 손잡이’는 총 소리를 표현하는데 쓰이는 대표적인 도구다. 실제 총은 집어 들었을 때 별다른 소리가 안 난다. 게임 속에서 캐릭터가 총을 겨누었을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 철제 문고리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소리를 만들어낸다(영상 참조)


거대한 깡통 로봇이 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표현할 때는 중국집 철가방을 활용한다. 샷건 마이크(마이크의 앞쪽의 소리 신호만을 잡는데 특화돼 있어서 후방과 측면에서 발생하는 잡음은 거의 녹음되지 않음)를 철가방 안쪽으로 향하게 한 뒤 손잡이 부분을 걸레 짜듯 비튼다. 그러면 놀랍게도 로봇이 움직일 때 날 법한 삐거덕 거리는 소리가 만들어진다.

-필요한 도구들은 직접 사 오는 건가

이: 사 오는 것도 있지만 고물상이나 폐차장을 돌아다니면서 모으는 경우가 많다. 원룸 단지에는 이사할 때 버려지는 물건들이 많다. 그런 곳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쓸만한 도구들이 제법 있다. 

국내 폴리 아티스트 10명도 채 안돼… 체력 소모 커서 지원 기피 

-폴리 아티스트로서 가장 힘든 점은 뭔가

박: 머릿속엔 표현하고 싶은 소리가 있는데 그걸 못 들려줄 때 너무 답답하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 사람이 된 기분이다. 특히 존재하지 않거나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만들어낼 때 가장 고충이 심하다.


식충식물 캐릭터가 내는 소리를 표현해야 할 때가 있었다. 식물 모습을 가진 몬스터 캐릭터였는데 막상 소리를 만들려고 하니 막막하더라. ‘식물, 5m 남짓한 키, 사람을 잡아먹음, 촉수를 가지고 있음’ 등의 단서를 가지고 상상을 해서 그 식물이 내는 소리를 만들어야 했다.


-폴리 아티스트나 폴리 레코디스트가 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박: 좋아하는 소리를 잘 기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특히 폴리 아티스트의 경우 영상을 보고 ‘어떤 도구를 활용해서 이런 소리를 만들면 좋겠다’는 판단이 빨라야 한다. 각각의 소리에 대해 기억을 잘 하고 있을수록 작업 속도가 빨라진다.


반드시 음향 관련 전공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폴리 아티스트 중에는 작곡을 하다가 이 일을 하시는 분도 있고 전기 전자 분야 일을 하다가 전직하신 분도 있다.


하지만 음향학 공부는 꼭 하시길 추천한다. 폴리 아티스트 작업이란 게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믹싱하시는 분들과의 협업도 중요하기 때문에 전문 용어 등을 이해하고 습득해야 한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폴리 아티스트는 10명이 채 안 된다. 폴리 아티스트를 육성하는 전문 교육기관도 없다. 아직까지는 스튜디오를 찾아가서 도제식으로 배워야 한다.


이: 궁극적으로는 녹음을 담당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폴리 아티스트 경험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폴리 아티스트 일을 해봐야 저 물건에서 대략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실제 녹음 과정에서 2인 1조 협업이 훨씬 수월하다. 제 경우도 2년 동안 방송사에서 폴리 아티스트 일을 해본 것이 귀한 밑거름이 됐다.

출처: jobsN
박준오 폴리 아티스트와 이승기 폴리 레코디스트가 각각 소리 제작 작업을 하고 있다.

-급여나 복지는 만족하나


박: 직접 스튜디오를 차려서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영화 쪽 폴리 아티스트는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월급제가 아닌 프로젝트 건당 급여를 받는다. ‘잘한다’는 입소문이 돌면 일이 한 쪽으로 몰린다. 그런 경우에는 억대 매출을 찍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엔씨소프트로 이직한 후에는 다른 직원들처럼 경력에 따라 연봉제 급여를 받고 있다.


이: 복지도 매우 만족스럽다. 9시에 출근해서 6시 30분쯤이면 일과를 마친다. 이전에 드라마 쪽에 있을 때는 이렇게 규칙적으로 근무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깊이 고민해서 창의적인 소리를 만들기보다는 드라마 방송 일정에 맞춰 녹음했다.


-후임을 직접 찾아 나설 정도로 지원자가 적다고 하던데


박: 이 직무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르다 보니 신규 유입이 제로 수준이다. 알음알음 후배들을 찾아가서 ‘폴리 아티스트 한 번 해볼래’ 하면서 후임을 직접 찾아 나서는 일이 많다. 저 역시 2005년에 재학중이던 대학 교수님의 권유로 처음 폴리 아티스트 분야에 입문했다. 그전에는 폴리 아티스트가 뭔지도 몰랐다.


체력적으로도 힘든 직업이기 때문에 오래 일하는 분이 많지는 않다. 폴리 아티스트는 녹음이 시작되면 숨을 쉬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캐릭터가 30초간 영상에서 뛰면 폴리 아티스트도 계속 뛰어야 한다. 한 번에 녹화가 끝나는 일은 거의 없다. 숨을 참으며 뜀박질을 반복해야 한다.


전문 스튜디오가 없는 사람들은 주로 밤에 녹음을 한다. 잡음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다른 층 입주자들이 모두 퇴근을 한 후에 녹음을 시작하는 거다. 밤샘 근무에 지쳐서 힘들어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이: 하지만 분명히 비전이 있는 직업이라고 확신한다. 해외 사례를 봐도 블리자드 같은 메이저급 회사는 폴리 아티스트를 한 명만 두고 있지 않다. 여러 명의 폴리 아티스트를 총괄하는 슈퍼바이저를 따로 둘 정도다.


국내 게임 업체들도 머지않아 외국 수준의 인력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본다. ‘소리’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도전하기 바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리가 실제로 만들질 때의 쾌감이란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글 jobsN 박가영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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