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허름한 쪽문, 아이폰 수리달인 가게의 비밀

조회수 2020. 9. 22. 11:45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꿈꿉니다
13살부터 시계·텔레비전 고친 ‘꼬마 수리공’
‘공짜 수리’ 받은 주민들 도움으로 고문 받다 방면되기도
본인 아이폰 고친 게 입소문 나 지금까지 5000대 수리

서울 신수동 서강대 앞에는 작은 아이폰 수리점이 있다. 가게 이름은 ‘서강 잡스’. 가게 사장님은 “‘한국의 스티브 잡스’를 꿈꾼다”는 새터민 출신의 김학민(30·서강대 전자공학3)씨다.


김씨는 하루 평균 아이폰 10~20대를 수리한다. 그는 서강대에선 유명인이다. 학내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망가진 아이폰이 ‘서강 잡스’님의 손길로 되살아났다”는 후기가 종종 올라온다.


탈북자인 그가 어떤 과정을 통해 아이폰 수리의 ‘지존’이 됐는지 잡스엔(jobsN)이 찾아가 들어봤다.   

출처: jobsN
서울 신수동에 위치한 서강잡스.

함경북도 온성의 소문난 ‘꼬마 수리공’ 

김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온성. 동네에서 ‘꼬마 수리공’으로 불렸다. 동네 어른들은 13세 어린이에게 망가진 손목시계를 맡겼다. 나중에 커서는 전자제품 원리를 배워 TV까지 고쳤다. 수리 요청이 빗발쳤다.


-전자제품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고 하던데 무슨 계기가 있나


“아버지가 엔지니어였다. 온성군은 탄광 지역인데, 아버지가 거기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셨다. 각종 일본산 전지와 공구들이 항상 집에 널려 있었다. 북한은 학교 수업 마치고 아이들이 놀 거리가 별로 없다. 집에 오면 전자제품 가지고 하루 종일 뜯어보고 조립해 보는 게 취미였다. 타고난 손재주가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한 번은 장난삼아 일본 전지를 과충전했다가 폭발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놀라서 병원으로 데려가셨다. 온갖 파편이 눈에 다 들어갔는데, 실명 안 한 게 정말 다행이었다.”


-시계 수리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한 번은 아버지가 집안 한구석에서 손목시계를 만지고 계셨다. 제가 보면 손목시계를 죄다 뜯어 놓고 망가뜨릴까 봐서 몰래 숨어서 고치고 계셨던 거다. 그때부터 시계에 꽂혔다. 아버지 시계를 샘플로 삼아서 시계 돌아가는 원리를 독학했다.


친구들에게 고장 나서 멈춰 있는 손목시계를 달라고 했다. 어차피 차고 다니지 못할 시계라고 생각해서인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여러 개 부품을 종합해서 가장 괜찮은 모델의 시계를 깨끗하게 고쳐서 차고 다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아버지 친구분들이 반신반의하며 손목시계를 고쳐달라고 맡기기 시작했다. 앉은 자리에서 뚝딱 고쳤다. 북한은 통신이 발달하진 않았지만 대신 ‘입소문’이 발달했다. ‘그 집 아들이 시계 수리를 잘 한다더라’라는 소문이 돌면서 동네 ‘꼬마 수리공’으로 불렸다.”


-15세 때 텔레비전도 수리했다고 들었다


“더 복잡한 전자제품 수리를 하고 싶었는데 반드시 공부를 해야 했다. 레지스터나 콘덴서 같은 부품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마을에 텔레비전을 수리해주는 20대 청년이 있었다. 어린 눈에 그 분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다가가서 ‘전자제품 작동 원리 좀 가르쳐주세요’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고, 수강료로 낼 돈도 없었다. 마음 속에 롤모델로 품으며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손목시계를 고쳐 달라며 찾아왔다. 인생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손목시계를 고쳐주고 나서, 소장하고 있던 손목시계 중에 가장 좋은 걸 그에게 선물했다. 전자제품 수리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받아줬다. 그 후로 매일 그의 집을 찾아가 ‘전자회로 원리’ ‘증폭 원리’ ‘무선 전파의 원리’ 등을 배웠다. 한 6개월 배웠더니 텔레비전 수리를 곧잘 하게 됐다. 그때부터 텔레비전 방문 수리 일을 시작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해 준 ‘공짜 수리’ 선행

1997년 북한에 극심한 기근이 찾아왔다. 굶어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배급 제도가 끊기고 주민들은 알아서 먹고 살아야 했다. 김씨 어머니는 돈을 벌어 오겠다는 쪽지만 남기고 중국으로 떠났다. 아버지 홀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김씨는 텔레비전 수리공 일을 하며,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 싶었다. 

출처: jobsN
지금은 아이폰을 전문으로 수리하고 있지만, 15살 당시에는 동네에서 텔레비전을 수리했다.

-텔레비전 수리를 하면서 가정 형편이 좀 나아졌나

“사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텔레비전 한 대를 수리하면 5000원 정도를 벌었다. 세 가족이 3일 동안 먹을 쌀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수리비를 못 받는 날이 더 많았다.


돈을 못 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찾아가서 수리를 해줬다.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 사람들에게 유일한 낙이었다. 방이 휑한데도 텔레비전을 무슨 가보처럼 모셔 놓고들 살았다.


수리를 마치면 고맙다고 하면서 밥상을 내오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 밥그릇에는 옥수수밥 이런 걸 주면서 제 밥그릇에만 쌀밥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대고 수리비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다 죽으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수리비를 달라고 했더라도 줄 수 없는 여건이라는 걸 서로 알고 있었다.


누군가 도왔다는 마음에 뿌듯했지만,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내가 일을 나가면 벌이가 있을 걸로 생각했다. 많이 대견해 하셨다. 그런 아들이 빈 손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는 섭섭해하시더라. 아버지가 겨우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결국 병에 걸려 내가 16세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누나는 친척 집에 맡겨졌고, 어머니도 없이 홀로 남겨졌다.”

서강 잡스 페이스북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고 하던데


“2008년 경찰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한국 드라마 100여편을 봤다는 이유였다. 온성군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중국 지역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한류 열풍이 강한 곳이어서 한국 드라마를 정기적으로 방영했다. 텔레비전을 만지다 보면 중국 지역 채널이 잡히는 경우가 있다. 처음 접한 한국 드라마는 ‘경찰특공대’였다. 유치원 때부터 ‘남한 사람들은 다 굶어 죽는다’고 세뇌를 받았다. 그런데 드라마 속 남한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다. 특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서로 예우하는 말투가 매력적으로 들렸다. 그때부터 한국 드라마, 영화를 적극적으로 보다가 꼬리가 밟혔다.


며칠 동안 밥도 안 주고 잠도 재우지 않는 고문을 당했다. 발로 짓밟히고 주먹으로 맞기도 했다. 그렇게 교화소로 보내지고 결국 죽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바깥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족도 없는 제가 석방될 수 있도록 동네 주민들이 힘쓰고 있었던 거다. 공짜로 텔레비전 수리를 해줬던 이웃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한다. 아는 경찰들에게 말을 해놓거나 심지어 뒷돈을 주고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 북한에서는 누굴 잡아가면 경찰들이 이웃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다. 붙잡혀간 사람의 평소 행실 등을 묻는 것이다. 당시 저와 동업을 하다가 관계가 틀어진 사람이 있었다. 일부러 안 좋은 얘기를 듣기 위해서 경찰이 그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저를 좋게 얘기해줬다고 한다. 고문을 하다가도 경찰이 ‘사람들이 너에 대해 칭찬을 하더라’하고 말해줬다. 그 소릴 듣고 참 많이 울었다. ‘관대 정책’이란 명분으로 결국 두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 이웃들 덕분이었다.” 

출처: jobsN
방황하던 김 대표를 위해 지인이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선물했다. 그는 이 책을 읽은 후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방황하던 새터민에서 ‘서강 잡스’로 주목받기까지

그로부터 3년 뒤, 김 대표는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넜다. 이미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진짜 모습을 알아버렸는데 북한 정권이 원하는 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살 수 없었다. 바깥 세상에 관심을 보이다가 다시 붙잡히면 이번에는 무조건 죽게 돼 있었다. 북한을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2011년 1월 탈북을 강행했다. 태국을 거쳐 같은 해 3월,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국에 도착해서 1년 동안 방황을 했다고 들었다


“여자친구와 함께 탈북했는데 한국와서 바로 헤어졌다. 아는 사람이 1명도 없는 곳에서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고시원에 처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 저보다 먼저 탈북했던 한 동생이 스티브 잡스 자서전을 선물로 건넸다. ‘오빠 이 책 천천히 읽으시고 스티브 잡스처럼 훌륭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라는 메모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 찬찬히 읽어보니 제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거대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라 더 애정이 갔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스티브 잡스의 철학을 접하고 마음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날로 방황을 접고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첫 해에는 대입에 실패했다. 열심히 한 만큼 실망도 컸지만 금세 추스르고 다음 해 서강대에 합격했다.”

출처: jobsN
스티브 잡스의 철학이 좋아서 애플 제품만 수리한다는 김학민 대표.

-아이폰 수리를 하게 된 계기는 뭔가


“아이폰5로 바꾼 지 한 달도 채 안돼 미용실에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박살이 났다. 수리비가 25만원이었다. 수중에 고칠 돈이 없었다. 하루는 ‘중고나라’라는 사이트에 한 고등학생이 외관은 멀쩡한데 내부 부품이 망가진 아이폰5 기기를 7만원에 내놓은 걸 봤다. 그 기기를 사서 제 아이폰5 액정을 새것처럼 고쳤다. 수리하던 모습을 지켜보던 룸메이트가 매우 놀라워하더라. 그게 입소문이 나서 동아리 친구들이 아이폰 수리 의뢰를 해왔다. 한 친구가 수리 전·후 사진을 찍어서 ‘우리 학교에 스티브 잡스가 있는데 아이폰 수리를 정말 잘 합니다’라며 게시물을 올렸다. 그 후 하루에만 30명의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기숙사 로비에서 ‘보따리상’처럼 수리를 했다고 하던데


“전화가 오면 공구를 들고 기숙사 로비로 내려갔다. 액정 화면은 10분이면 수리가 가능하다. 기숙사생이 아닌 학생들이 로비에 와서 앉아있는 경우가 많아지자 경비원분들이 곤란해 했다. 미안하더라. 제 공간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2016년 2월부터 현재 사무실로 옮겼다.”


-아이폰 수리만 가능한가


“애플 제품은 모두 다룬다. 스티브 잡스와 연관이 있는 제품만 다루고 싶었다. 그 사람의 철학이 좋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하는 일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를 고민했던 사람이다. 기계 자체만을 홍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브랜드들은 그렇지 않다. 누가, 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제품이 대부분이다. 지금껏 아이폰만 5000대 넘게 수리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뭔가


“현재 휴학 중이다. 4학기 남았는데, 직원 2명 정도를 더 뽑고 학업에 집중하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하드웨어 개발 일을 하고 싶다. 한국의 스티브 잡스가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돈보다 명예다. 수리된 아이폰을 들고 환하게 웃는 고객들을 보면 참 뿌듯하다. 누군가의 필요를 채워줬다는 데서 오는 기쁨이랄까.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한 만큼 뜻 깊은 인생을 살고 싶다.”


글 jobsN 박가영

jobarajob@naver.com

잡스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