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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개그맨→쇼핑호스트→국숫집 사장님 변신

조회수 2020. 9. 18. 15: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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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던 시절 이겨낸 비결은요…

'클놈'으로 유명한 개그맨 염경환氏

사업 실패 후, 쇼호스트·음식점 운영하며 재기

베트남 사업 진출도 꿈꾸는 중 

개그맨 염경환씨

염경환(47)은 잊혀져 가는 개그맨이었다.


1996년 강원래·구준엽의 ‘클론’을 패러디 해 개그맨 지상렬과 ‘클놈’을 결성,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001년 클놈 해체 후, 슬럼프가 찾아왔다.


2004년에는 성급히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수억원을 날렸다. 인천 제물포고 동창인 김구라와 지상렬이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예상치 못한 내리막에 움츠러들었다. 공중파 방송 출연 횟수가 조금씩 줄었다.


연예인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빚을 갚고, 재기를 위해 ‘쇼 호스트’라는 새로운 영역에 진출했다. 

개그맨 염경환씨

참고 견디자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0여년 만에 홈쇼핑 업계 ‘블루칩’으로 떠오른 것이다. 올 들어 한달 평균 20~30회 홈쇼핑에 출연할 정도다. 3년 전 시작한 음식점 앞에서 점심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그가 운영하는 경기도 일산의 음식점에서 그간의 악전고투와 최근의 결실에 대해 들었다. 위기의 염경환은 일어서기 위해 5가지 원칙을 지켰다고 한다.


①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무엇이든 시도하라

10여년 전만해도 홈쇼핑은 연예인의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분야였다. 이른바 '모양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홈쇼핑보다는 방송 프로그램 출연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염경환도 개그맨으로 ‘날리던’ 시절의 영광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당장 사업 실패로 진 5억원의 빚을 갚아야 했다. 생활비도 급했다.

출처: 염경환씨 제공
쇼호스트로 활동하는 염경환씨

앞뒤 재지 않고 홈쇼핑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첫 방송은 탈모 레이저 빗을 판매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홈쇼핑에 계속 출연하다 보니 물건을 판매하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작하고 얼마 안돼서 바로 자리를 잡았어요. 곧 방송 출연으로 버는 수입보다 쇼호스트하면서 버는 돈이 더 많아졌죠. 간혹 후배들 보면, 방송에 큰 미련을 두고 지나치게 매달리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개인 선택이겠지만, 아니다 싶을 때는 다른 길을 모색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요. 다양하게 시도를 해봐야만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할 수 있고, 활기도 찾을 수 있어요.”

출처: 염경환씨 제공
쇼호스트로 활동중인 염경환씨

처음 몇 년은 한 달 평균 4~5회 홈쇼핑 방송을 했지만, 요즘은 30회까지도 한다. 최근에는 ‘염경환의 쇼핑을 부탁해’라는 고정 프로그램을 맡을 만큼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②작은 일이라도 혼(魂)을 담아서

염경환은 쇼 호스트로서 자신의 가장 큰 무기로 ‘가성비’를 꼽는다. 다른 연예인보다 출연료는 30~40% 이상 낮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열심히 판매한다.


“솔직히 업체들이 저를 많이 써주는 건 비용 부담이 적어서죠. 저는 출연료에 욕심부리지 않아요. 홈쇼핑에 납품하는 곳들이 대부분 중소기업이니까, 잘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처음에는 적게 받을테니, 나중에 제품이 히트치고 롱런하면 올려달라고 계약할 때부터 말을 해요.


그리고 생방송 끝나는 순간까지 1개라도 더 팔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요. 이게 선순환인게, 홈쇼핑은 무조건 많이 해야 늘어요. 그런데 제가 출연료를 적게 받으니까 당연히 일이 많이 들어오고 그래서 제가 짧은 시간에 판매 노하우가 많이 쌓인 점도 있어요.”


제품 판매에 열과 성을 다할 수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홈쇼핑 ‘납품 업체’ 대표였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2004년 필리핀 유명 회사와 독점 계약을 맺고, 처음으로 홈쇼핑에서 ‘코코넛 오일’을 팔기 시작했다.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갖고 은행 대출과 지인 투자를 받아서 추진한 사업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곧 문을 닫았다.


“제품을 만드는 분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1시간 판매량에 따라서 그 회사의 직원과 가족들 주머니 사정이 결정됩니다. 제가 인생의 쓴 맛을 봤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작은 물건이라도 혼을 담아서 판매합니다.”


그가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느끼고 보답하겠다는 기업도 있다. 한 블랙박스 업체는 염경환의 열정적인 판매에 대한 보답으로 출연료를 올려주겠다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③좋아하는 일을 하라, 돈이 전부가 아니다

염경환은 어려서부터 ‘면(麵)’ 매니아였다. 대학 때부터 면 맛집을 찾아서 전국을 누볐다. 언젠가 꼭 ‘면 요리 음식점을 내겠다’는 꿈이 있었다.


2014년 일을 저질렀다. 수십 년 단골집이던 인천의 세숫대야 냉면집 할머니에게 비법을 전수받아 경기도 일산에 같은 이름의 가게를 냈다. 평일 점심 시간과 주말에는 줄을 설 만큼 장사가 잘 됐지만 음식점이 ‘내 브랜드가 아니다’라는 아쉬움이 있었다. 

출처: jobsN
자신의 메밀 가게에서 면을 삶고 있는 염경환씨

냉면집을 권리금 받고 팔고 올해 3월 일산 킨텍스 근처에 ‘청사초롱 since1970’이라는 메밀집을 차렸다.


'since1970'을 넣은 이유는 청사초롱이라는 상호명이 너무 많아서 숫자나 다른 글자를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1970은 염경환의 출생연도다. 이번에도 청라신도시에서 면 맛집을 운영하는 대표에게 3개월 가량 교육을 받았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금세 자리를 잡았다. 지난달 매출이 8000만원을 넘었다.


“솔직히 방송에 집중하는 것이 수입 올리기는 편합니다. 식당 운영에는 품도 많이 들고, 나가는 돈이 많아서요. 하지만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큰 돈을 날려본 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음식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면이 좋기 때문입니다.

출처: jobsN
경기도 일산에서 염경환씨가 운영하는 메밀집

면이 너무 좋아서 면 만드는 법을 배울 때도 행복했고, 지금도 좋아요. 돈만 생각해서 시작한 장사는 아녜요. 지금도 가게 나와서 꼭 면 요리를 먹어요. 면 먹는 것도 좋아하고, 직접 만드는 것도 좋아해요. 창업 생각하시는 분들 업종 선택하실 때 꼭 이런 부분을 고려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인터뷰 내내 메밀 육수(쯔유)를 우려내는 작업을 하느라 수시로 주방을 드나들었다.


④진취적인 마인드로 늘 도전하라

염경환은 향후 5년 안에 베트남에 진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14년 지인 결혼식 사회를 보러 베트남에 갔다가 그 나라의 잠재력에 놀랐다. 1억에 가까운 인구, 높은 경제 성장률, 인구 대부분이 20~30대인 젊고 역동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것도 큰 기회였다.


결국 2016년 9월 부인과 2명의 아들을 모두 베트남으로 보냈다. 아이들에게 영어뿐 아니라 베트남어도 배우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베트남에서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다. 현지인 대상 한국어 교육사업과 한국 상품들을 판매하는 ‘코리안 샵’을 운영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지금은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저는 베트남의 성장 잠재력을 믿어요.”

출처: 염경환씨 제공
베트남에서 가족들과 함께. 왼쪽부터 부인 서현정씨, 장남 은률이, 염경환씨

⑤가족이 행복하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

그를 지탱해준 건 가족이었다. 염경환은 방송이 뜸해 힘들었던 시절, 아내 서현정씨와 아들 은률(12)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어려움을 뚫고 나갈 돌파구를 만들어 준 것도 사실은 가족이었다. 2009년 SBS 인기 예능프로그램이었던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에 은률이와 함께 나와서 부자(父子) 찰떡 호흡을 과시했다. 귀여운 외모의 은률이는 당시 엉뚱한 매력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염씨의 인기도 같이 올라갔다. 3년 전에는 둘째 아들 은우(3)가 태어났다. 

출처: 염경환씨 제공
과거 SBS 붕어빵에 출연했던 염경환씨와 아들 은률이

그는 의사 결정에 가족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한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것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5~6회 현지 답사를 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베트남을 저보다 오히려 아내와 아이들이 더 좋아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싫다고 했으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잘 나가도 가족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습니다.”


그의 스마트폰 메신저에는 ‘사랑하는 우리 가족. 아빠가 열심히 해서 ♡우주를 줄게♡’라고 쓰여있다.


글 jobsN 김지섭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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