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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소록도에 몸 바친 치과의사 고백 '나는 나쁜 아빠'

조회수 2018. 11. 5. 10:0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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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슈바이처' 오동찬 진료부장

국립소록도병원에는 인생의 절반을 한센인 진료에 바친 ‘소록도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인물이 있다. 이 병원 사상 최초로 공보의에서 정규직 의사로 전환했고, 의사 출신으로는 역대 최장 근무기간을 이어가고 있다. 현직 보건복지부 최고참 서기관인 치과의사 오동찬(49) 진료부장이다.  


그는 지난 3월 인사혁신처가 주최한 ‘제3회 대한민국 공무원상’ 시상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여년간 한센인을 위해 입술재건수술을 개발하는 등 인술(仁術)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았다. 시상식이 끝난뒤 오씨를 만났다. 수상소감을 묻자 그는 오히려 부끄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90여명의 병원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101년간 소록도 역사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만 상을 받는게 미안합니다.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수 차례 “나만 상을 받아 부끄럽다”던 그를 설득한 끝에 인터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다만 오씨는 “한센인이 아닌 소록도 주민으로 표기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국을 ‘한센병 완치 국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현재 소록도에 거주하는 500여명의 주민들도 완치된 분들이에요. 환자를 의미하는 한센인은 바람직하지 않은 표현이에요. 후유증 등의 이유로 일부가 장애를 갖고 있을 뿐입니다.” 

출처: 소록도병원 제공
국립소록도병원 전경(왼쪽)과 위치

치과계의 ‘슈바이처’가 꿈…아직도 진행형  

조선대 치대 출신인 오씨는 강남성심병원에서 인턴을 마치고 1995년 국립소록도병원에 공중보건의로 부임했다. 공보의는 의사·치과의사·한의사가 현역 복무 대신 3년간 공중보건 업무에 종사하는 일종의 대체복무 제도다. 소록도는 기피 지역 1순위였다. “근무 지역은 추첨을 통해 진행하는데, 인턴 과정까지 마친 치과의사에게는 우선권이 있었습니다. 소록도는 맨 밑바닥에 있었어요. 소록도를 자원하니까 주변에선 ‘미쳤냐’ ‘대신 가줘서 고맙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특히 한센병에 대한 선입견이 강했던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왜 하필 네가 거기를 가야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오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애초에 치대에 진학한 이유가 치과계의 슈바이처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고, 그 목표에 적합한 곳이 소록도였다. “아버지가 소록도 근처에서 오랫동안 교사로 근무하셔서 어릴 적부터 소록도를 잘 알고 있었어요.” 

출처: 국립소록도병원 홈페이지·MBC 캡처
병원 내 사무실의 오동찬씨

“첫 환자를 만나고 너무 기뻤다”는 그의 소록도 근무는 녹록지 않았다. “공보의 월급이 23만원이었어요. 사비를 털어 틀니를 해주고 무료로 수술을 해도 ‘고생하시네요’라는 차가운 반응 뿐이었습니다. 정말 듣기 싫었어요. 영문을 물으니 어차피 떠날 사람인데 정을 주기 싫다고 하더군요.” 공보의들이 모두 1~2년만에 소록도를 떠나는 상황이 반복됐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었다. 격오지로 분류되는 소록도에서 근무한 공보의는 당시 1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는 두달치 월급을 털어 스쿠터를 샀다. 여의도의 1.5배 크기(4.46㎢)정도 되는 소록도에서 매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점차 주민들이 그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초대를 받아 같이 밥도 자주 먹었어요. 아들 같았던 거죠. 지금은 ‘어이 오 부장’ 이런 식으로 가족처럼 대합니다.” 그렇게 알게 된 소록도 현실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호적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오씨는 “아는 분을 통해 치아 연령을 감별해서 나이를 찾아줬다”며 “덕분에 호적에 올라가니 노령 연금 등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출처: KBS 캡처
진료를 하는 오동찬씨

독학으로 수술법 개발…500명 혜택받아  

소록도는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3년간의 공보의 근무가 끝난 1998년 아예 소록도에 눌러 앉았다. 정식 직원이 되겠다고 신청해 보건복지부 사무관이 된 것. 대학 동기들이 월급 300만~400만원을 받을 때 그는 초봉 100만원이 조금 넘는 공무원 월급 명세서를 받았다. 공무원이 된지 햇수로 20년이 된 현재 월급은 500만원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병원 최장 근무 의사인 그는 나이로는 정규직 의사 3명 가운데 막내이다. 소록도 근무를 꺼리기 때문이다. 인력난은 만성적이다.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간호사가 떠난 적도 있다.  


병원에 남은 이들은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다. 오씨의 아내도 소록도병원 간호사 출신이었다. 공보의 시절 아내와 결혼했으며 두 딸(19살·17살) 역시 출생지가 소록도이다. 아내와 결혼할 때는 주민들로부터 “눈물나게 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짓궂은 농담을 들었다. 300원, 500원, 1000원이 담긴 쌈짓돈으로 정성스레 내밀었던 주민들의 축의금 봉투는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가족 같은 소록도 주민을 위해 오씨는 ‘아랫입술 재건술’ 개발에 매달렸다. “아랫 입술이 쳐지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밥을 먹으면 음식이 흘러내리는 거예요. 너무 불편하잖아요. 문헌을 뒤져보니 수술법이 없더군요. 다만 과거 우리나라에 온 벨기에 의사들이 비슷한 수술을 했다는 기록에 착안해 연구를 해서 만든게 아랫입술 재건술입니다.” 아랫입술을 꼬매 턱에 붙이는 일종의 성형수술이다. 그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이 수술법을 통해 500명가량의 주민이 혜택을 입었다. “수술 이후에 밥도, 침도 안 흘린다고 하니 너무 감사했습니다.” 


주민과의 ‘맛집 탐방’도 그의 가욋일 중의 하나다. 가끔씩 차를 타고 소록교를 건너 함께 점심 식사를 한다. 일반적인 점심시간(12시 전후)보다 1~2시간 일찍 출발한다. 제때 가면 손님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씨는 “아직도 편견과 차별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예전엔 아예 밥도 안 줬는데 그나마 나아진 것”이라고 했다. 소록도병원은 ‘사랑방’ 역할도 한다. 주민들이 차를 마시며 오씨와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눈다.

“나는 나쁜 아버지·남편·사위다”

오씨는 “집사람하고 아이들한텐 항상 미안하다”며 “큰 딸이 쓴 일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버지가 소록도에서 떠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불쌍할까라는 내용이 적혀있었어요. 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얘기해요. 너희들은 어머니가 옆에 있지만, 그분들은 자식이 없단다. 얼마나 외롭겠느냐.” 주민들은 오씨의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 등 자기 자식처럼 예뻐해 준다. 올해초 오씨의 첫째딸이 대학에 떨어졌을 때는 섬 전체가 큰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출처: jobsN
오동찬씨가 사용하는 3G 폴더폰. 2010년부터 8년째 사용 중이다. 휴대폰 배경화면은 아내와 두딸

자가 주택이 없는 오씨는 관사(官舍)에서 가족과 함께 산다. 핸드폰은 8년째 3G폰을 쓰고 있다. “소리가 시끄럽지만 아직 잘 돌아간다”는 냉장고는 22년째 쓴다. TV는 아예 없다. 첫째딸이 최근 기숙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교육을 한 번도 시켜본 적이 없었다. 오씨는 “우리 나라의 공교육 제도를 믿은 것”이라고 했다. “장인 장모님한테도 미안하죠. 치과의사한테 시집보내 놨더니 지금까지 정장 한벌 못 사드린 걸요.”  


근검절약하는 이유는 2005년부터 자비를 들여 시작한 해외봉사 때문이다. 소록도 의료 수요가 안정된 시기와 맞물린다. 매달 월급의 10분의 1 정도를 따로 모은다. 1년이면 600만원 정도 된다. 이 돈으로 연간 두 차례 해외 진료를 떠난다. 3년전 성천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1억원은 전액 복지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출처: 중외학술복지재단 홈페이지
2014년 성천상 시상식에서 상금 1억원을 받은 오동찬씨. 이 돈 전부를 복지단체에 기부했다

해외 봉사는 4인 가족이 함께한다. 주로 베트남·몽골·필리핀 등 의료 환경이 열악한 나라의 빈민촌이나 한센인 마을만 다닌다. 아내는 바이탈 체크(혈압과 호흡,체온 측정하는 것), 큰딸은 소독, 둘째딸은 의료기구 운반 등 각자 맡은 업무가 있다. 한번 갈때마다 70~80명 정도 진료를 본다. 처음엔 "왜 이런 곳만 가야하느냐” 불평을 터뜨렸던 두 딸은 지금은 안 쓰는 문구나 옷을 챙겨가는 등 적극적으로 봉사를 돕는다. 오씨는 “가진걸 다 나눠주다 보니 애들이 거지가 다 됐다”며 “평생 보고 배운 게 아버지가 하는 일이다 보니 두 딸 모두 꿈이 의사”라고 했다. 

 

“불쌍한 사람만 보다 보니까 그런 길을 가려는 거예요. 저는 반대했어요.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요. 아이들 보고 ‘너희도 그렇게 살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좀 더 편한 길을 가길 바라는 게 부모 심정이잖아요. 하지만 그게 안 되네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집안이다.  

정년 이후엔 해외로 떠날 것

그는 동창회에 나가면 대화가 안 통할 정도로 평균적인 치과의사의 삶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골프나 건물 이야기를 나누는 대부분 서울 강남에 거주하는 개업의 틈바구니에서 오씨만 공무원이다. ‘좋은 일’ ‘선행’의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불편해 하는 기색까지 느껴질 정도다. 삶에 후회는 없을까.  


“각자의 삶이 있는 거예요. 어떤 삶이 옳고 그르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분들이 성과급이나 승진에 있어서 뒷전인 것은 좀 아쉬워요. 인력도 항상 부족하고요. 그러나 ‘현실적인 부분’만 계산적으로 따졌다면 지금의 제가 없을 겁니다. 밥은 먹고 살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잖아요. 그거면 됐죠.” 


그러면서 오씨는 소록도 주민 얘기를 꺼냈다. “손도 불편한데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고구마 튀김 만들어오는 아주머니, 커피 사와서 함께 한잔 마시는 어르신…. 누구보다도 소중한 분들입니다. 힘들게 살아온 소록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지금은 즐겁게 사십니다. 너무 행복해요. 사지 멀쩡한 제가 괜한 짜증을 내면서 살지는 않았는지도 돌이켜보게 됩니다.”

출처: 오동찬씨 제공
소록도 주민은 오씨에게 가족이나 다름없다

“매일 매일이 감사하다”는 그는 정년 은퇴(60세) 이후 해외의 한센인 마을로 떠나 여생을 보낼 계획이다. “거의 사라진 국내와 달리 외국에는 아직도 한센인이 많아요. 중국에 6000만, 인도에 1억명이라는 추산이 있습니다. 은퇴하면 집사람과 함께 떠날 계획이에요.  


해외 진료를 많이 가는 추세지만 한센인 마을은 잘 안 가더군요. 그래서 제가 갈 생각입니다. 연금 생활을 하면서 환자도 돌보는 겁니다. 20년 후쯤엔 지금 소록도에서 살듯이, 외국에서 아픈 이들을 돌보며 살고 있지 않을까요?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놀러오세요.” 


글 jobsN 오유교 

jobarajob@naver.com 

잡스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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