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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 나와 막노동→36세 변호사 변신 왜?

"막노동하며 동네 '홍반장' 역할 만족하던 그에게 이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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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포기하고 막노동 하던 '동네 형'
마음 다잡고 로스쿨 갔지만 잇달아 불합격
결핵 이겨내고 이젠 동네 변호사 꿈꿔
2015년 4월 10일 서울 상봉동의 주상복합 듀오트리스 공사현장. 30층 높이 곤돌라 위에 선 임지호씨의 눈은 계속 휴대폰 화면을 향해 있었다. 속은 바싹바싹 탔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 있던 사수는 ‘도대체 뭐 하는 거냐’며 타박을 줬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선 ‘휴’하는 한숨이 나왔다. 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는다고 ‘터미네이터’라 불리던 그는 그렇게 변호사가 됐다.

2013년 4월, 임지호(당시 34)씨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 방황 끝에 로스쿨을 졸업했고, 변호사 시험 합격도 눈앞에 온 것 같았다. 평생을 약속한 예비 신부도 곁에 있었다. 그녀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합격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시 시작한 수험생활, 복잡한 상황 속에 공부는 지지부진했다. 2014년 1월 아들이 태어났고, 4월 재도전에서 다시 쓴맛을 봤다. 몸도 마음도 무너졌다. 결핵까지 찾아왔다. 갓난아기와 함께 결핵약을 먹기 시작했다.

막노동을 하던 시절 임지호씨. 2015년 변호사시험 발표를 앞두고 일하러 다니던 서울 상봉동 주상복합 현장.

출처jobsN

막노동이냐, 변호사냐

정말 답답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 때문에 애까지 독한 약을 먹는 걸 보는 게 너무 힘들었죠. 고 3 이후로 가장 독하게 공부했을 거에요. 도시락을 2개씩 들고 다니면서 도서관을 다녔어요. 생활비는 아내가 마이너스 대출을 냈고요. 애가 태어난 뒤로는 집에서도 한 달에 100만원씩 받았어요.

합격하고서도 막노동을 계속 하셨다고요?

시험 끝나고 1주일 뒤부터 현장에 나갔어요. 합격하고 나서도 쭉 갔죠. 변협에서 하는 연수가 있는 날엔 오후에 나갔고요. 하루 일당이 13만원 정도였는데, 여름 야간에는 절반만 일해도 하루치를 줬어요. 울산까지 2박3일로 등짐을 지러 가기도 했어요. 갚아야 할 빚도 많고, 아기 분유 값도 벌어야 했거든요.

임지호 변호사

출처jobsN

독한 말씀도 들으셨다던데요.

제 교육을 담당하던 변호사님이 제 아내에게 ‘네 남편 막노동꾼이 되든지,변호사가 되든지 선택을 해야 한다. 뭔가 착각을 하는 거 같다’고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 뒤로는 막노동은 그만두고 열심히 실무 수습을 받았어요.

요즘도 같이 일(공사장) 가자는 연락이 온다고요?

네, 형님들께는 변호사 됐다는 얘기는 안 드렸어요. 그저 그만두게 됐다고 하니 ‘일당 얼마냐, 여기보다 많으냐’고 농담하셨죠. 원래 거기는 구체적으로 물어보지는 않는 분위기에요.

동네 형, 변호사의 꿈을 꾸다

20대 후반 임씨는 그야말로 ‘동네 형’이었다.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직업은 없었다. 돈을 안 벌어도, 안 쓰면 된다는 식이었다. 정 돈이 필요할 땐 막노동을 했다. 


동네 애들을 모아서 야구를 하러 다니는 게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조손가정 아이들의 멘토를 하고,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좋게 말하면 동네 해결사 ‘홍반장’ 정도의 생활이었다.

해병대 시절 임지호씨(둘째줄 오른쪽 둘째). 그는 "회사에 가서도 조직 논리에 빠지는 거 아닐까 두려웠다"고 말했다.

출처jobsN

명문대(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선 집에서 놀았습니다. 무슨 생각이셨나요?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요. 4학년 때 몇 군데 넣은 걸 빼고선 원서를 낸 적도 없고요. 금융권이나 대기업에 먼저 들어간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회사 생활을 할 자신이 없어졌어요. 그렇게 몇 년 지나다 보니 나이 때문이라도 정상적인 취업은 어려워졌고요.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2006년 가을 졸업을 하고선 두 달 정도 인도를 갔어요. 돈은 막노동으로 모았죠. 테레사수녀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일하면서, 똥 기저귀도 빨고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요. 제 눈 앞에 사람이 죽는 것도 많이 보고요. 거기서 '의연함'이랄까 그런 걸 배운 거 같아요.

변호사를 결심하게 한 일이 있었다고요. 

멘토를 하던 중2 아이가 학교를 안 간다고 할머니가 전화를 주셨어요. 아이가 울면서 하는 얘기가 선생님이 자기 얘기는 안 듣는다는 거에요. ‘형이 학교에 가겠다’고 해도 그것도 부끄럽다고 하고요. 그때 ‘내게도 당당하게 억울한 걸 얘기할 수 있는 합법적인 지위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연하게 로스쿨을 생각하긴 했지만, 변호사를 꼭 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때였어요.

임 변호사는 부인 채인숙(오른쪽) 변호사를 영남대 로스쿨 동기로 만났다. 임 변호사는 "처음 만난 날 강의실 복도에서 3~4시간씩 서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서로 잘 맞았다"고 했다.

출처jobsN

부부 변호사, 동네 변호사를 꿈꾸다

임 변호사는 올 6월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을 나와 7월부터 인천검찰청 근처 한 작은 상가에 20평 남짓한 사무실을 열었다. 부인인 채인숙 변호사와 함께다. 인천 주안동으로 이사온지 1년 만이다. 

왜 인천인가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서울에 살다가 전세를 너무 올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마침 처형도 인천에 계셔서 근처로 옮긴 거죠. 요즘은 애 어린이집이 4시에 끝나면 처형이 봐주세요.

이력을 보면 아무래도 사회적 약자에 관심이 많을 것 같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는데 법을 몰라서 당하는 분들을 돕고 싶어요. 얼마 전에 노동일 하시는 의뢰인의 500만원짜리 채권채무소송을 맡은 적이 있어요. 조정으로 가서 이자까지 받아 드렸는데 수억, 수십억짜리보다 오히려 그런 소송이 더 보람 있더라고요.

동네 변호사라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사실 사무실도 집 근처로 구하고 동네 분들 한테 법률상담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무실은 법원 주변에 냈지만, 자주 동네에서 형님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해요.

임 변호사는 인터뷰 내내 ‘저 같은 사람도 기사를 쓸 게 있을까요? ’라며 머뭇거렸다. 누구보다 힘겨운 20대 후반, 30대 초·중반을 보낸 그에게 취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저희 또래가 아마 88만원 세대의 시작일 거에요. 저는 학비와 생활비 벌려고 1학년 때부터 막노동을 했어요. 현실을 비집고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걸 많이 느꼈죠. 저는 제가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겨우 사람 구실을 한 것도 이제 1년 남짓이에요. 다만 저 같은 사람도 제 몫하고 산다는 걸 보시고, 힘을 내셨으면 좋겠어요.

jobsN 조재희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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