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매출 10억' 대박 떡집 비결 멘사와 장인?

조회수 2020. 9. 24. 14:1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망원동 경기떡집 명절 하루 매출 천만원 넘기도
부부와 아들 네 명이 함께 운영하는 떡집
사기 당해 빚 1억원 독촉 시달리기도
3년 동안 하루에 4시간 자면서 떡 연구

지난 9일 새벽 1시. 서울 망원역 부근 한 주택가 골목. 주변 상점은 이미 문을 닫았거나 장사를 정리할 즈음, 한 가게가 조용히 불을 켠다. 불을 따라 들어간 가게 안은 ‘윙윙’ 기계 소리로 가득 찼다.

 

아버지, 오늘은 뭐부터 시작할까요?

인절미부터 시작하자.

아들이 어젯밤 미리 불린 쌀을 제분기에 넣는다. 이내 배출구 앞 대야로 곱게 빻인 흰 가루가 쏟아진다.

'경기떡집' 최길선씨가 인절미를 썰고 있다. /경기떡집 제공

서울 망원동 '경기떡집'에서 매일 새벽 벌어지는 풍경이다. 주인은 23년 째 떡 장사를 하고 있는 최길선(64)·김영애(59) 부부. 여기에 아들 4명이 부부를 돕는다.


가족이 함께 하는 40여평 규모의 이 떡집은 특유의 쫄깃한 맛으로 전국에 정평이 났다. 전라도·경상도 등 전국 각지는 물론이고, 해외 교포들이 전화로 택배를 부탁할 정도다. 너무 멀어 택배를 받지 못하자 직접 날아와 떡맛을 보고 간 스위스 교포 부부도 있다.


이렇게 떡을 팔아 올리는 매출이 연간 10억원을 넘는다. 경기떡집 최씨 가족을 만났다.

최씨 부부가 매입한 건물. 1층에는 경기 떡집이 있다. /잡아라잡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경기 떡집의 시작은 아버지의 최길선 씨다. 그는 17살 때 서울 종로의 한 제분소 종업원으로 취업해 10년 간 일했다.

사장님 어깨 너머로 제분과 면뽑는 기술을 배웠다.

 제분소 사장이 어느날 사업 정리 의사를 비쳤다. 최씨는 10년간 모은 돈으로 제분소에 국수 공장 까지 넘겨받았다. 짜장면을 먹고 싶어도 꾹 참고 모은 돈이다.

 

월세를 내고 제분소와 국수 공장을 운영하면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결혼 후 최씨 부부는 매일 새벽 2시 가게 문을 열었다. 부부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덕분에 금세 입소문이 났다. 종로의 유명 떡집이 제분 작업을 맡겼고, 청와대에서 면 주문이 들어 왔다.


최씨는 “”고 했다.

당시 회사원 평균 월급이 13만원 정도였는데, 우리 가게 매출이 130만원이었다/. 종업원 3명 두고 일했는데, 여섯 식구가 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최길선(64)·김영애(59) 부부 /경기떡집 제공

그러다 믿었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빚 1억원이 생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재개발로 가게를 옮겨야 했다. 제분소와 국수 공장을 정리할 수 밖에 없던 상황. 이때가 1995년이다.


최씨 부부는 지하철 2호선 합정역 근처로 터를 옮겼다. 업종도 돈이 덜 들어가는 떡집으로 바꿨다. 매일 종로 떡집에 찾아가 기술을 배워, 지금의 상호인 '경기 떡집' 간판을 내걸었다.

 

빚 때문에 종업원을 쓸 여유가 없었다. 부부는 하루 4시간만 자며 매달렸다. 어느날 남편 최씨가 떡 반죽 기계를 만지던 중 손가락이 부러졌다. 하지만 깁스를 할 수 없었다. 깁스를 하면 손가락이 안움직여 정밀한 떡 작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꼬박 3년을 이 악물고 버텼더니 빚이 사라졌다.

경기 떡집에서 만들고 있는 떡 /잡아라잡

연세대·멘사 회원 첫째 아들, 최연소 떡 명장 셋째 아들

경기떡집의 현재 하루 평균 매출은 300만~400만원. 설 ·추석 연휴가 최고 대목이다. 선물용 떡 세트 주문이 밀려 들면서 하루에만 수천만 원을 번다.


때때로 대형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얼마 전 한 제약 회사가 2억원 치 떡 주문을 넣었다. 이런 식으로 연 매출은 10억 원이 넘고, 2008년 시세 25억의 4층 건물(약 80평)을 장만했다.

 

성공 비결을 묻자 부부는 주저하지 않고 '아들 4형제'라고 했다. 4형제 모두 직간접적으로 이 가게의 일원이다.


아이큐 높은 사람 모임 '멘사(Mensa)'회원인 장남 최대로(34)씨는 연세대에서 아동가족학과 법학을 복수 전공했다. 어려서부터 좋은 머리로 소문이 났다. 아버지는 늘 말했다.



“아빠가 하는 일을 절대 하지 마라.

장남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법고시를 2년 정도 준비하다가 군대를 다녀온 뒤 생각이 바뀌었다.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다. 장남은 현재 홍보와 물류 업무를 맡고 있다.

둘째 최대현(31)씨는 회사원이다. 퇴근 후 시간 등을 활용해 경기떡집의 회계 업무를 봐 주고 있다. 

(맨 왼쪽부터) 셋째 최대한씨, 첫째 최대로씨, 막내 최대웅씨 /조선DB

셋째 최대한(29)씨는 우리나라 최연소 떡 명장이다. 2011년 열린 대한민국 떡명장대회에 처음 출전해 명장 대상을 거머쥐었다. 올림픽에 첫 출전한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건 셈이다.


셋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떡을 만들었다.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 아버지가 시키는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떡을 배웠다. 셋째는 “고 했다.

떡 만들기는 따로 레시피가 없다. 모든 것이 아버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이고, 10년 넘게 아버지 곁에서 지켜보며 내 것으로 만들었다.

막내 아들 최대웅(28)씨도 마찬가지다. 17살 때부터 형들과 함께 아버지를 도왔다. 아버지 최씨는 “10시간 넘게 앉아 경단 옮기는 작업을 도와줄 만큼 막내가 착하다”고 했다. 

셋째 최대한씨가 가래떡을 만들고 있다. /조선DB

맛있는 쌀 찾기 위해 전국 돌아다녀 

부부는 틈만 나면 좋은 재료를 구하기 위해 돌아 다닌다. 최씨는 “생쌀만 먹어봐도 딱 안다”고 했다. 새벽에 떡을 만들고, 저녁에 '감칠맛'나는 쌀을 찾기 위해 지방을 찾는 날이 잦다.


경기 떡집이 만든 떡의 유통 기한은 '1일'이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여 만들지만, 당일 팔리지 않으면 바로 버린다.

 

최씨 부부는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조언했다.  

목숨 걸고 덤벼들어야합니다. 편한 직장만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세상에 편한 일은 없어요. 한 분야에서 최소 5년은 일해야 성공이 보입니다.

jobsN 금상준 인턴기자

jobarajob@naver.com

잡아라잡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