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억원짜리 황소 그림 주인은?

조회수 2020. 9. 23. 11: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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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꿔라. 중간만 이뤄도 대단한, 큰 꿈을 꿔라"
개인사업 망하고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시작
창업해 오랜 숙원 미술관도 설립
영업사원 을(乙)아닌 삶의 성공자될 수 있어
매출 3300억원 회사의 수장. 30년간 모은 미술품을 전시한 미술관 소유.

유니온약품 안병광(61) 회장의 스펙이다. 성공한 부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의 첫 마디는 의외다. 

00년째 영업사원입니다.

첫 인사는 1983년 이후로 한결같다. 작년에는 33년째, 올해는 '34년째 영업사원'이 본인 소개다.


그는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제약회사 오너가 됐다. 1997년 외환위기, 2000년 의약 분업 등 위기도 겪었다. 이런 이력 덕분에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린다.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매출 3300억원짜리 회사 오너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출처: 서울미술관에서 안병광 회장. 오른쪽 그림은 안 회장이 소유한 이중섭의 '황소' 그림이다./잡아라잡, 서울미술관 제공

성공법칙 1: 사람을 잘 만나라

그의 첫출발은 사업이었다. 친구 2명과 1981년 의류 오퍼상(무역회사)을 열었다. 그러나 쫄딱 망했다. 그가 판매한 티셔츠가 물빨래만 하면 쪼그라든 탓이다. 1983년 친구 따라 한 회사에 취업했다. 지금은 사라진 한일약품. 첫 발령은 을중의 을이라는 영업사원이다. “그때는 아무도 영업사원을 안하려 해 맡게 됐습니다.”


그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었다. 영업사원으로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입사 초반, 고객에게 말 한 번 못 붙여보고 하루가 간 적도 있었다. 전체 직원 170명 중 실적은 꼴찌. 사표도 던져봤다.


상사의 반응이 그를 변하게 했다. 

나는 자네를 호랑이새끼라고 봤네. 겨우 고양이새끼였나? 지금 나가면 어디서나 3류 밖에 안될 걸세. 나가려거든 1등 하고 나가게.

9개월 후 영업 실적 1등을 달성했다. 그 후로 4년을 더 다녔다. 사람이 그를 나락의 위기에서 건져낸 것이다.


창업을 한 계기도 사람 때문이다. “실적이 좋으니 회사에서 인정받았어요. 동네 의원에서 준종합병원, 대학병원까지 담당했죠. 당시 사장님이 ‘자네는 사장 될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부터 내 사업을 하겠다고 꿈꿨죠.”


창업 후 닥친 위기 때도 사람 덕을 봤다. 2000년 의약분업을 대비하지 못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매달 70억원씩 벌리던 매출이 19억원으로 쪼그라 들었다. 그 와중에 돈 떼먹고 도망간 거래처가 생겼다. 납품한 약이라도 돌려받으려고 봉고차를 2대 보냈다. 돌아온 차에는 약품대신 사람 16명이 있었다. 

사장이 도망가고 직원들이 남은 거예요. 영업이사가 고용하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직원들이 보물이었어요. 약국 영업을 잘해줘 의약분업 위기를 무사히 넘겼어요.
출처: 승진한 직원들과 함께 한 안병광 회장/유니온약품 제공

성공법칙 2: 꿈→생각→말→행동

제약영업의 꽃이라는 대학병원을 거쳐 1988년 약품도매상을 차렸다. 안 회장을 포함해 직원은 6명, 자본금 7000여만원으로 시작했다. 당시 수중에는 3000만원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영업을 하며 알게 된 고객 두 사람이 투자한 4800만원으로 마련했다. 각자 26년 일해 받은 퇴직금을 모은 돈이었다.


첫해 매출 20억원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영업사원은 안 회장 혼자였다. 큰 제약회사에 있을 때와는 처지가 달랐다. 낙담 대신 “전국이 내 거래처”라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첫해 매출 목표를 달성했다. 사업은 매년 성장했다. 영업직원 수가 100명을 돌파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미 납품한 약품 대금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집이며 건물이며 다 팔았습니다.” 이때 오히려 직원 복지를 늘렸다. 아무리 어려워도 지금 당장은 직원들보다 사장인 자신이 돈이 더 많다는 게 이유였다. 자녀 학자금 지원제도를 만들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죠.

안 회장은 “성공하려면 꿈을 꿔야 한다”고 말했다.

꿈을 어떻게 이룰지 잘 생각하고, 내 꿈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루기 위해서 행동해야 합니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서울미술관’ 대표. 직접 설립했다. 영업사원이 되던 해부터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유난히 이중섭 작품을 좋아해 "이중섭에 미쳤다"는 말을 들었다.


월급 27만원이던 시절, 20만원을 털어 그림을 샀다. “영업만 하다보면 삶이 삭막해질 수 있다”며 그림을 권한 상사 덕이었다. 이중섭을 수집 초기에 알게 됐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액자가게에서 이중섭 화백의 '황소'를 인화한 작품을 7000원 주고 산 게 인연이었다.


'언젠가 ‘황소’ 진품을 사겠다' '미술품을 모아둘 공간을 만들겠다'는 막연한 목표를 세웠다. 안 회장은 2010년 '황소' 진품을 낙찰받았다. 2012년 미술관도 세웠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꿈을 꾸기도 전에 좌절을 먼저 겪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차피 해봤자 안돼”라는 마음을 버리라고 말했다. 

“카페를 차리고 싶으면 카페 인테리어를 슥슥 그려서 붙여 놓는 거지요. 그리고 카페로 성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한 번 얘기를 들어보세요.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꿈을 향해 가다가 멈춰 10%만 달성해도 남부럽지 않을 수 있도록 큰 꿈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출처: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회화 100선’전시장에서 안병광(사진 맨 왼쪽) 유니온약품 회장이 출품작가 유족들에게 이중섭의 ‘황소’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조선DB

성공비결 3: '을(乙)이 아니라 병(丙)'

안 회장은 스스로 “을(乙)이 아니라 병(丙)으로 살았다"고 표현한다. 아직도 점심을 병원에서 먹곤 한다. 의사나 약사 등 고객을 만나기 위해서다. 자주 가는 곳은 병원 구내식당. 갑을 한 분야 전문가로 인정하고 "잘 몰라서 그러니 가르쳐주십시오"란 말도 잘 건넨다.


영업사원 시절 부터 병(丙) 습관이 몸에 뱄다. 다른 영업맨이 한 번 찾아갈 때 두 번, 세 번 갔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만 다녔다.

땀에 흠뻑 젖고, 땀내새도 났지만 고객을 편하게 만나지 않겠다는 제 나름의 정성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도 많았다. 처음 만난 고객이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냅다 던진 적이 있다. 전임자가 일처리를 제대로 해놓고 가지 않은 탓이었다. 다음날 또 찾아갔다. 사무실 앞에 쭈그려 앉아 며칠을 기다렸다. 화장실을 가든, 회의를 하러가든 방에서 들고 날 때마다 인사를 했다. 그는 안회장의 단골 고객이 됐다. 

자존심이 상하다가, '이분을 꼭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서 내 모든 것을 걸었죠.

그는 영업사원의 삶을 인생에 비교했다. 

어제 어려웠다고 해서 오늘 가방 놓지 않고, 시간 약속 잘 지키고, 나보다 상대를 높이고, 뭐든 배우려고 하는 것. 영업사원의 미덕이에요. 잘 보면 어떤 업종이나 자리에서도 필요한 덕목이잖아요. 모두 실천해 보세요.

jobsN 감혜림 기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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