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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나를 깨운
단 하나의 '이것'

취미이자 일상이지만 때로는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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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작성일자2017.02.28. | 80,503 읽음

음악이 당신을 일으킨 적이 있는가. 그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던 순간, 무기력한 나날 속에서 당신을 깨운 음악이 있었는가. 음악은 도처에 있고 가장 보편적인 취미이자 일상 그 자체일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인생의 변곡점을 찍어준 음악이 있다. 지대넓얕 패널들에게 물어봤다. 

깡선생
말러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

"20대 중반 군대 전역 후 한창 혈기왕성하던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곡. 학비를 벌기 위해 길바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겨울 새벽, 조가비처럼 생긴 은빛 CD플레이어를 귀에 연결하면 거친 새벽바람과 출근길 시민들의 싸늘한 시선으로부터 나만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들었던 클래식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선율을 고르자면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본래 말러 교향곡을 좋아했던 이유는 블록버스터급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웅장함과 극적인 구성 때문이었지만, 들릴 듯 말 듯 잔잔한 현악기 선율에 완전히 반했다. 전반적으로 슬픔과 비통함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틈틈이 새어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에 집중하다보면, 마법의 양탄자 위에 누워서 넓은 초록빛 들판 위를 유유히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동시에 아무리 세상살이가 힘들어도 진정으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던 것 같다. 말러의 제자는 이 곡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아다지에토는 말러의 아내, 알마에 대한 구스타프 말러의 사랑 고백이다! 그는 편지 대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자필 악보를 그녀에게 보냈다.” 청년 시절 나는 말러의 교향곡들을 들으며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것에 대한 사랑을 키웠던 것이다."


김도인
바비빌, <맥주는 술이 아니야>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들은 지대넓얕 방송 중 내가 준비했던 주제들에서 많이 선곡했다. 방송에서 선곡되지 않은 음악 중에서는 바비빌Bobbyville이라는 컨트리 밴드를 좋아한다. 한 곡을 고르자면 2005년도에 발매된 「The Men Of The 3M」 앨범 중에서 <맥주는 술이 아니야>를 추천한다. 이 밴드의 음악은 대부분 가사가 매우 재치 있다.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소소한 일상을 유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점을 많이 배웠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삶을 유연하게 살기 어려워지는 것 같다. 내가 바랐던 삶과 다른 지질한 일상에 치이고, 힘든 일들을 겪어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기만 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인생을 바라보는 시야가 매우 좁아지게 된다. 바비빌의 노래들은 지질한 일상도 즐거운 순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줘서 지치고 힘든 시간 속에서 위안이 됐다. 그래서 숨을 고르고, 그 시간을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독실
쇼팽 발라드 1번

"우연히 한 영화를 접했다. 2003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피아니스트>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나 또한 몇 번이나 돌려본 장면은, 폐허가 된 집 다락에 은신하던 슈필만이 먹을 것을 찾아 내려왔다가 독일군 장교를 만나고 자신을 피아니스트라 소개한 순간. 연주를 해보라는 장교의 말에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한다.


처음 들었던 나의 첫 인상은 ‘장난치는 건가? 반항하는 건가?’였다. 첫 소절에서 양손의 손가락 하나씩으로 동일한 음을 연주하는 것이 익살맞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화음을 쪼개기 시작하면서 숨을 죽이고 들었다. 연주가 끝날 듯, 끝날 듯하면서 반복되는 마지막까지도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에게 물었다. “곧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생애 마지막 곡으로 왜 저 곡을 선택한 거지?” 그때 아내의 대답이 아직도 선명하다. 쇼팽 음악의 정수는 발라드 1번이라고 생각한다고. 발라드는 낭만 음악에서 나타난 장르이고, 피아노는 워낙 낭만 시대에 부각되던 악기라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선택한 것이 딱이었다고.


그 후 쇼팽을 찾아듣기 시작했다. 특히 발라드 1번을 들을 때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슈필만이라면, 피아노 연주가 인생의 전부이던 내가 죽기 전 마지막 한 곡을 연주하는 기회가 왔다면’ 하고 상상하는 거다. 혹은 자신을 피아니스트라고 소개하는 남루한 남자를 반신반의하며 지켜보던 독일군 장교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인터뷰에 의하면 당시 슈필만이 연주했던 음악은 <녹턴 C# minor>였다고 한다. 이 곡은 원래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아내에게 왜 저 곡을 연주했을까 물어보지 않았을 테고 그럼 아내도 쇼팽의 발라드가 쇼팽 음악의 정수라는 대답을 안했을 테고 그럼 난 쇼팽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감독이 설정을 바꾼 덕에 내 인생에서 피아노곡을 찾아 듣게 된 것이다."


채사장
메르세데스 소사, <삶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

"2011년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관성에 따라 날아가던 내 삶은 멈췄다. 많은 것이 변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사고능력과 언어능력이 저하되었다는 판정을 받았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뇌가 사고를 반복해서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목과 다리에 고질적인 통증이 생겼다. 이 통증을 통해서 놀랍게도 비가 올지를 예측하는 능력을 얻었다. 작은 일에도 예민해졌다. 쉽게 화가 났다. 나는 언제나 폭발 직전의 상태였다.


그때 소사를 만났다. 별다른 기대 없이. 가수의 이름도, 노래의 제목도, 앨범 표지에 그려진 검은 머리의 인디오 여성의 얼굴도 모두 낯설었다. 음악을 재생하고 눈을 감았다. 전주는 없었다. 곧바로 소사의 깊고 풍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라시아스 아 라 비다Gracias a la vida(삶에 감사해)’

그리고 이어지는 박수소리와, 그 박수소리를 잠재우는 소사의 목소리. 낯선 스페인어 발음도, 이해할 수 없는 가사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음성은 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직접 호소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소사 : 삶이 뭐라고 생각해요?
환자 : 네?
소사 :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이 세상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는 상태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환자 : 그런 건 아니겠지만, 제가 노력하고 있잖아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먹고 살고, 남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챙기고, 다만 그렇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소사 : 그건 이미 잘하고 있어요. 그렇게 될 거예요.
환자 : 아뇨. 잘하고 있었는데, 노력하고 있었는데, 삶이 제 발을 걸어 넘어뜨렸어요.
소사 : 혹시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불러 세운 것은 아닐까요 ?
환자 : 네?
소사 : 아니면,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아서 불러 세웠을 수도 있지요. 지금 무엇을 가져가고 있나요? 당신 혼자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지키려는 것들은 뒤에 버려진 채 당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의 이상. 모두 뒤에 있는 걸요.
(중략)
소사 : 운 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정말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에요.
-채사장, 《열한 계단》 중에서

채사장에겐 하나의 구원이었고 이독실에겐 새로운 세계였으며, 김도인에겐 유쾌한 위안이었고 깡선생에겐 초록빛 안식이었던 음악들.


그리고 다시 봄이 오고 있다. 뭐든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데 마음은 아직 봄 같지 않다면 지금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채우고 있는 음악들은 잠시 멈추고 곰곰 돌이켜보자. 언젠가, 쓰러져 있던 나를 깨운 음악은 무엇이었는지.

지적 대화를 위한 팟캐스트 방송.
채사장, 이독실, 김도인, 깡선생의 <지대넓얕>

지대넓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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