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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야 하나요?

채사장, 이독실, 김도인, 깡선생이 직접 전해온 답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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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넓얕 작성일자2016.12.09. | 16,753 읽음

2016년 12월, 800여 명과 함께한 세 번째 정모.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관해 토론하고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죽음을 이야기하기에 두 시간은 짧았다.

그래서 채 답변되지 않은 질문에 채사장, 이독실, 김도인, 깡선생이 직접 전해온 답변을 담았다.


채사장


경험하지 못한 것을 인간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관찰하고 측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죽음이나 영혼, 사후세계, 신 등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합리적이지 못한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하지요. 


비트겐슈타인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명제를 토대로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말할 수는 없지만 ‘보여질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나 도덕과 같은 형이상학적 대상들은 논박되지는 않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결국 우리를 깊은 이해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닫힌 문을 보고 문 뒤에 있을 공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막상 문을 열었을 때, 그곳은 상상과는 전혀 다른 공간일 수도 있고, 혹은 실제로는 열리지 않는 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까지 어떤 추측도 검증할 수 없다고 해서, 그 추측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반드시 그 문을 열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많은 추측이 허용될 것입니다.


죽음이 누구나 피할 수 없이 열어야만 하는 닫힌 문이라 할 때, 우리의 추측과 대화는 우리를 대비하게 하고 현재의 공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과 무의미한 죽음의 기준은 무엇인가?

질문을 바꿔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의미’란 무엇이고,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요?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텍스트의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설명해주는 개념입니다. 해석학적 순환에 따르면 어떤 텍스트의 전체 의미는 그 텍스트의 부분들의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분들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될까요? 그것은 텍스트 전체의 의미를 이해한 것으로부터 도출됩니다. 전체와 부분의 의미는 순환의 과정을 통해 정립되어 간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24부작 드라마를 본다고 가정했을 때 3회에서 발생한 주인공의 사고, 12회에서 발생한 사건들, 19회에서 발생한 갈등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24부가 끝났을 때의 결론을 미리 앞서 예측했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24회가 끝나는 그 순간에 모든 의미가 확정되는 것이지요. 부분의 의미는 전체의 의미로부터, 전체의 의미는 부분의 의미로부터 규정됩니다.

이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의 삶이라는 하나의 텍스트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요? 20대에, 40대에, 70대에 나의 삶의 의미는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끝을 예측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죽음이라는 끝에 도달하게 되는 순간 삶 전체의 의미가 확정될 것입니다.


의미 있는 죽음과 무의미한 죽음의 기준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삶의 의미는 죽음으로부터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이독실


죽음은 형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안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통념적으로 깨끗함, 순수함, 순결함을 상징하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들이 죽어가는 부조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삶을 축복이자 기쁨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삶 자체는 고난의 연속이며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삶의 형태가 어떠한지와 별개로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어도 제가 가지고 싶은 태도는 삶은 기회이자 축복이며, 죽음은 그 삶을 정리하고 안식에 들어가는 피할 수 없는 이벤트라는 것입니다.


자의식이 발현된 존재는 죽음을 인식하게 된 후, 필연적으로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사실 자의식 여부와 관계없이 진화 과정에서 죽음을 피하려고 시도한 개체가 생존 가능성이 높았기에, 모든 생명체에는 유전자 수준의 각인이 있으리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자의식을 지닌 종들이 깨달은 것은,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있는 우리도 결국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이 도래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삶이 시작되면 끝이 있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통용됩니다. 즉, 죽음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는 것은 부조리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의문이 생겨납니다. 삶이 끝나는 것을 왜 슬퍼해야 할까요? 당연히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왜 슬퍼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내 존재’의 단절, 소멸에 대한 두려움은 있지만 결국 그 일이 닥칠 거라면, 그것이 나뿐만 아니라 모두 필연적으로 겪을 일이라면, 왜 우리는 죽음을 슬퍼할까요?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며, 결국 내가 겪은 경험의 폭이 넓어질수록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험은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아무리 오래 산다 하더라도, 결코 불가능한 경우도 있지요. 삶이 오래 지속되었다고 삶의 경험에 대한 아쉬움이 적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했던 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기에 미래의 그리움을 슬픔으로 발현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죽은 자를 위한 슬픔이라기보다는 남은 자들을 위한 애통해 하는 마음이거나, 어쩌면 자기 연민일지도 모릅니다.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어린아이들의 죽음을 어른의 죽음에 비해 더 큰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가슴으로 통감하나, 머리로는 문득 왜 이렇게 슬퍼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구체적 사례로 피할 수 있던 억울한 죽음, 고통스러웠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애통한 마음은 자연스럽지만, ‘피상적 존재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 슬픔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유전적, 혹은 사회문화적 장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작은 위로가 되는 부분은 자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영유아뿐 아니라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큰 두려움을 가지지 않은 채 순수하게, 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죽기 싫어 발버둥 치고 죽음의 두려움에 숨이 막혀오는 것은 더 많이 경험했고 더 많은 것을 가졌던 미련 많고 죄 많은 어른일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깨끗하고 순결한 존재들만 할 수 있는 특권인가 봅니다.



김도인


흔히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하루가 죽기 전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열심히 살라고 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내가 평생 노력했던 것들, 마음을 썼던 것들, 소중히 해왔던 것들을 모두 상실하는 순간인 죽음이라는 사건은 결국 가장 중요한 나 자신마저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죽음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사실에 대해서 느끼는 허무함은 기본적으로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뿐만 아니라 누구나 겪는 고통스러운 일들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늙고 병들어 가는 과정,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들, 평생에 걸쳐서 일궈온 재산, 지위, 명예, 인간관계가 허물어지는 일들은 모두 내가 노력하고 마음을 썼던 것들이 좌절되는 경험들입니다.


죽기 때문에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심히 산다고 해도 결국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죽음에 대한 고통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고통을 해결하는 것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혹은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나 자신조차도 생명이 끝나는 순간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 슬퍼하기는커녕 장례식 때 기뻐 춤을 추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양철학 안에서 장자가 바라보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질문하신 내용은 [지락] 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혜자가 조문하러 갔던 일입니다. 조문을 간 혜자는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장자에게 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죽음에 왜 슬퍼하지 않는지를 묻습니다.

장자는 처음에는 나도 아내의 죽음을 슬퍼했는데,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죽음은 당사자나 주변인이나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죽음을 어떤 행복한 사건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오해를 많이 하게 됩니다. 장자의 이야기도 장자가 죽음에 개의치 않았다거나, 죽음으로부터 초월한 자세를 보였다는 식으로 많이 읽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는 우리가 느끼는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 평정한 상태입니다. 장자의 이야기는 결국 생로병사와 같은 인생의 변화를 자연의 순환처럼 인정하는 순간 죽음 앞에서도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해줍니다. 기쁘고 즐거운 기분도 늘 변하는데, 이러한 마음이 영원하길 원하면 고통이 됩니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가 아니라 충분히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상실을 인정한 후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깡선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을 고통스럽다고 여기거나 그것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 또한 죽음을 끔찍이 여기거나 미지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의 에피쿠로스학파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즉, 죽음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에 따르면 죽음의 본질은 ‘無’입니다.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죽음이라는 사건은 물질의 해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통은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발생합니다. 인간이 죽을 경우 육체가 소멸하고 감각이 사라지므로 고통도 느낄 수 없습니다. 죽은 후에는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죽은 뒤 완전한 ‘無’로 돌아간다고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혹시 당신이 에피쿠로스학파처럼 유물론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죽음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영적 존재로 거듭나는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 나지 않게 처신해왔고, 소중한 사람들을 정성껏 보살펴 왔으며, 정직하고 책임감 있게 인생을 살아왔다면, 하느님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거나, 더 나은 존재로의 윤회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에서 정말 두려운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입니다.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지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 이겨낼 수 있지만, 내가 아끼는 사람의 죽음은 그런 식으로 대처하기 어렵습니다.


상대의 상실에서 오는 슬픔, 관계의 영원한 단절에서 오는 좌절감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나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지만, 그 누구도 타인의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고인을 위해 기도하고, 추모하고, 장례를 정성껏 치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죽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살아있을 때 후회 없이 사랑해주고, 여유가 있을 때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또 그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스스로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것.


이 정도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죽음을 극복하는 비법은 생각보다 가까운 데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패널들은 다양한 접근으로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을 전했다.

어쩌면 죽음은 젊은이에게 먼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이 숙명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죽음의 의미가 나의 삶을 이해하게 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멀다고 하기에는 가깝고, 두려워 하기에는 너무도 필연적인 목적지다.

지적 대화를 위한 팟캐스트 방송.
채사장, 이덕실, 김도인, 깡선생의 <지대넓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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