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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심' 그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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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다니엘'이 전한 과거사 소식,
부러워한 분들 많으셨죠?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한 것이
공과를 기억하려는 문화 때문일 겁니다.

오늘은 좋은 측면에서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일본의 양심'
그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비정상회담' 다니엘 "독일 94세 노인 뒤늦게 나치전범 기소"

이날 다니엘은 "독일의 한 94세 남성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3,000명 정도의 살인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소송을 당했다"며 "살인 방조죄 최고형에 해당하는 15년 형을 받게 된다. 아직도 나치 전범을 색출 중이다"고 말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

"日 우경화 행보 막고 평화 지키려 60년 가까이 써 온 소설 이젠 절필"

"20대부터 60년 가까이 소설을 써왔지만 소설은 이제 그만 쓰겠다. 앞으로 평화문제, 삶의 문제 등에 대해 쓰며 평화를 지켜가겠다"고 말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원로작가가 평생의 존재 방식이었던 소설까지 포기하며 아베 신조 정권의 우경화 행보에 제동을 걸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오에 겐자부로·김영호 교수 특별대담

김 : "선생은 시에서 '나는 삶을 다시 고쳐살 수 없지만, 우리는 삶을 고쳐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 의지에 의한 인간의 낙관적 미래를 그렸습니다. 선생의 소설 <불타오르는 녹색의 나무> 제일 마지막이 '조이풀'이라는 말과 함께 끝나는데, 선생이 평화이고 조이풀(joyfu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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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 "아닙니다. 인간 자체가 바로 평화입니다."

그가 결성한 '9조회'는

: 2004년 일본 우익의 헌법 개정을 막기 위한 호헌파 지식인 주도로 결성된 모임. 평화헌법 9조 수호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개헌에 반대하는 한·일 정치인, 시민단체와 연대, 협력. 현재 발기인 9명 중 4명 사망.

"日 '9조회'·다카쓰 노벨평화상 후보로"

"① 국권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무력 행사를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영구히 포기한다. ②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을 보유하지 않고, 국가의 교전권(交戰權)을 인정하지 않는다."(일본국헌법 제2장 전쟁의 포기, 제9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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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기인 9명에는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오쿠다이라 야스히로(奧平康弘) 도쿄대 명예교수, 평론가 쓰루미 ?스케(鶴見俊輔)씨 등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 포함됐다. 9인은 대부분 고령으로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전 총리의 아내이자 사회활동가였던 미키 무쓰코(三木睦子)씨 등 4명은 사망했다.

[이부영 특별기고] '9조회' '다카스 나오미' 노벨평화상에 공동 추천하면서

일본 정치인들과 시민사회 대표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수록 일본과 한국 사회는 공동의 가치를 누리고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바로 민주주의와 평화였다. 한국의 군사독재시기에 일본인들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사회에도 한국처럼 민주화운동이 필요한 분야가 많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분단 속에 갇힌 가혹한 군사독재 아래 민주화-평화통일운동을 벌이는 한국의 운동이 지난날 일제 치하의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일본인 학자들과 젊은이들이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위안부 위령비에 머리 숙여야"

--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일반 일본인의 인식은 어떤 상태라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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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그것(교육 부족)이 문제다. (우익성향의 잡지를 가리키며) 일찍이 이렇게 주간지가 이 문제를 거론한 일은 없었다. 전체적으로 한국을 싫어하고 박 대통령을 미워하도록 매번 박근혜 대통령의 사진을 싣고 이렇게 저렇게 공격하고 있다. 이런 이상한 상태가 됐다.<br><br>(...) 일본이 사죄의 돈을 냈다고 하지만 (수령자가) 300∼400명 정도 이하다. 더 많은 사람이 있었고 죽은 사람도 많았다. 위령비를 만드는 것도 당연하다. 위령비를 만드는 사람이 있으면, 위령비가 생기면 꽃을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 위령비에 대해 일본인으로서 취할 태도를 머리를 숙이는 것이지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와다 하루키 칼럼] 일본은 독도·북방4도 영유권 고집 버려라

일본은 북방 4도와 독도에 대해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주장을 철회해 역사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은 영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다. 이를 위해선 쌍방의 입장을 고려해 서로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해결책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76)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다. 도쿄대에서 서양사학을 전공한 와다 교수는 러시아 역사와 한국 현대사를 주로 연구했다. 1998년 명예교수직에 오르기 전까지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 활동을 해왔다. 그는 사료를 바탕으로 북한과 김일성에 대해 비교적 객관적인 연구를 해왔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일성과 민주항일전쟁>, <한국전쟁>,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등 한국에도 알려진 저서들을 펴냈다. 와다 교수는 일본 아시아여성기금에서 전무이사로 일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도 적극 나섰다. 현재 고령의 나이에도 한·일 양국을 오가며 연구 및 저술, 사회참여 활동을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 300만명 죽게 한 전쟁 일으켜 이웃나라들에 분노의 앙금 남겨"

"일본의 역사는 (종교와 민족 문제가 얽힌) 복잡한 중동이나 중부 유럽과 달리 간단하다"고 말했다. 즉, "제국주의 시대 일본이 지배당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스스로 제국주의를 흉내 냈다. 결과적으로 3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쟁을 벌여, 원자폭탄을 두 발이나 맞는 결과가 나왔다. (이에 대한) 이웃나라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해결됐다 해도 이것이 마음의 앙금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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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그는 "세계적인 무질서는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그런 시기에 아베 총리가 말하는 것은 너무 간단하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조금 더 복잡한 것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때 평화헌법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헌법은 지켜가야만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2014년 아카데미 공로상 수상 소감

My wife tells me that I’m a very lucky man. (...) Another fact of luck is that my country has not been at war for the fifty years that I have been making films. Of course, we’ve profited from wars, but we’re very fortunate that we’ve not had to go to war our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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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는 저를 행운아라고 합니다. (...) 다른 이유는, 우리나라가 제가 작업을 해 온 50여 년간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쟁을 통해 얻은 것도 있었지만, 우리 자신이 전쟁에 나가지 않은 것은 무척 다행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와타나베 미나 '여성을 위한 전쟁과 평화 자료관' 사무국장

"아베 '사과'라는 말 쓴 적 없어" 日인권운동가 정면 비판

미나 국장은 "아베 정권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유엔 기구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지난 2012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내각이 제출한 보고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특히 사과와 반성(remorse)이라는 표현이 삭제되고 '깊이 고통을 느낀다'(deeply pained)라는 어정쩡한 말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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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국장은 이어 "아베 정권은 집요하리만큼 위안부 문제에 부인(否認)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이는 그 자체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전 세계 여성들의 권리를 향상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쓰면서 어떻게 위안부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는 사실, 일본만 모른다"

그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점, 위안소가 군의 관리 하에 운영됐다는 점 등은 피해자 증언, 군의 문서 등 역사적 증거로 명확히 밝혀진 사실이라는 것이 고문방지위 위원들의 견해였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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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 구제 조치를 하지 않는 것은 '현재 진행중인 인권침해'라는 사실과 피해자들에게는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고,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일본 정부는 모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파원 리포트] 와타나베 미나와 일본의 힘

도대체 와타나베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는 "위안부 존재를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일본군의 가해 실태와 피해자들의 고통을 일본 내는 물론 세계에 널리 알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br><br>지난 3월9일 미국 뉴저지주의 위안부 기림비를 찾은 뒤 한국 언론에도 이를 밝혔다. "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미국 시민사회를 통한 역사 알리기 노력이 필요하다. 미 시민사회를 통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 역사를 인정하도록 압박하는 게 효과적이다."

저널리스트 故 마쓰이 야요리

도쿄 한복판에 위안부 전시실 건립

도쿄 한복판에 2005년 성노예 전시실이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작고한 아사히(朝日)신문 기자 출신 시민운동가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씨 등 양심적 일본인들의 헌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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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씨는 2000년 도쿄에서 개최한 '일본군 성노예제를 단죄하는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을 통해 수집한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관련 자료들을 전시할 곳을 찾았다. NHK 프로듀서로 위안부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이케다 관장은 "당시 국제 전범 법정에서 수많은 증언과 자료가 확보됐지만, 일본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면서 "이를 안타깝게 여긴 마쓰이씨가 2002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과 관련 자료를 기부했고 시민 모금 운동을 통해 전시실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일부 극우파가 매춘부 전시관, 매국 시설 등이라고 비난을 퍼붓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특파원 리포트] 국가주의의 성채와 '야요리 정신'

1961년 아사히신문 입사 후 싱가포르 특파원 등을 거쳐 1994년까지 아시아 여성 및 환경 문제 등을 취재해온 기자 야요리를. 정년퇴직 후 '자유를 찾았다'며 아시아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 '아시아여성자료센터'를 세우고 2000년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열어 덴노(天皇)를 유죄로 단죄한 그를 말이다.

마이클 혼다 미 하원의원

혼다 의원 "위안부 문제, 백악관에 이메일 보내자" 제안

혼다 의원은 아베신조 일본 총리가 위안부 강제 연행 내용이 담긴 미국 교과서를 문제삼은 것에 대해 교과서 수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박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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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혼다/미 하원 의원 : 이건 미국에서 노예제가 없었다고 쓰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받아들여질까요? 아니죠.]

[특파원리포트] 영혼이 맑은 마이클 혼다 의원

애칭 '마이크'로 더 알려진 혼다 의원에 대해 한 인사는 "영혼이 맑은 정치인"이라고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정확한 설명은 없을 것 같다. 그는 일본계 2세 정치인이면서도 누구보다 앞장서 역사를 외면하는 일본을 질타하고 있다. 부모의 모국인 일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는 일본이 역사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반성할 때만이 진정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야시 히로후미 간토학원대 교수

위안부 강제연행 자료 발굴 日역사학자

→우익 정치권의 주장이 일본 사회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렇게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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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쇠퇴기를 지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과거가 좋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일본인의 의식과 한국·중국인 등에 대한 차별의식 등이 뒤섞여 사실을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는 현상이 생겼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위안부는 어느 나라에도 있었다'든가, '위안부 중에서는 자원한 사람도 있었다'는 등 일본을 변호하려고 한다. 위안부 문제뿐 아니라 일본 전반적으로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사회'가 됐다.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가 재일 조선인이 특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프랑스인 여성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사례 최초 공개

하야시 교수는 "1993년 고노담화가 발표된 후 위안부 문제에 관한 500여건 이상의 문서들이 발견되며 연구 성과가 축적돼왔지만, 일본정부와 언론들이 이를 무시하고 연구 결과에 대한 보도마저 통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故 마루야마 마사오 전 도쿄대 교수

파시즘과 군국주의 비판한 사상가

다시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는 일본을 보고 있노라면 탁월한 정치학자이자 사상가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ㆍ1914~96).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국을 식민지로 점령하고 마침내 미국과도 일전을 불사하며 온나라를 전쟁의 광기 속으로 몰아간 한가운데서 일본의 파시즘과 군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을 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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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는 살아 있을 때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마루야마 텐노(天皇)'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이 일왕에 비견될 정도로 탁월하다는 뜻이었다. 그가 타계했을 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추모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루야마 선생이 일본의 다양한 전문 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전공투, 자네들은 나치보다 나쁘다네" 일갈한 日 지식인

일본 패망과 함께 그는 대학으로 복귀했다. 원폭 투하 이후 참상을 목격하는 등 군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46년 '세계' 5월호에 발표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라는 글에서 그는 파시즘과 군국주의 체제의 메커니즘, 그리고 그 속으로 저항 없이 빨려들어 버린 일본인의 심리 상태를 분석했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책임, 양심을 가진 '주체'라는 시각에서 그 반대편에 있는 '전체주의 국가 일본'을 비판했다. 이후 그는 군국주의 파시즘 일본과 우익 운동에 대한 정신사적 분석을 시도하는 한편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과 안보 투쟁 등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활약했다.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

"이것은 새로운 매카시즘..허용하면 학문, 사상의 자유 썩게 된다"

1980~1990년대 <아사히신문>에서 위안부 문제를 보도했던 전직 기자들을 겨냥한 일본 우익들의 노골적인 협박이 이어지자, 이를 막으려는 일본의 양심들이 본격적으로 나섰다. 강상중 세이가쿠인대학 총장, 고바야시 세쓰 게이오대학 명예교수,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등 일본의 저명 학자, 언론인, 법률가 등 43명은 6일 '지지마라, 호쿠세이의 모임'을 결성해 대학을 상대로 한 일본 우익들의 노골적인 협박과 테러 공세에 맞서기로 했다.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고모리 교수는 평화헌법 조항으로 지칭되는 일본국헌법 9조(전쟁 포기, 군대 안 갖기)를 지키자는 시민운동단체 '9조회'의 전국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는 등 이른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1985년 세이조(成城)대학 교수를 거쳐 1992년부터 도쿄대학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및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故 사카모토 요시카즈 도쿄대 명예교수

평생 '평화일본' 꿈꾸다 떠난 리얼리스트(2014.10)

그는 59년 '일본 진보진영의 성채'인 이와나미서점이 발행하는 월간지 <세카이>에 '중립일본의 방위구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일본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논문에서 사카모토는 일본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립국의 군대로 구성된 유엔 경찰군이 일본에 주둔하고 자위대도 이 경찰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제창했다. 도쿄대 교수 시절인 66년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주장한 '일본 외교에 대한 제언'으로 '제1회 요시노 사쿠조 상'을 받았다. <아사히신문>은 그에 대해 "학문적 성과를 세상에 제언하는 방식으로 전후 일본의 평화사상 정착에 공헌했다"고 평가했다.

[김영희 칼럼] 세 번의 이별

지난달 일본의 국제정치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사카모토 요시카즈 선생이 숨졌다. 직접 딱 한 번 만났고 이메일과 편지를 주고받은 게 고작이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우연히 접한 그의 책과 논문들은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사회엔 현실 대안에 약한 이상주의밖에 없다는 내 선입견을 깨부쉈고 논문의 주제가 됐다.
<br><br>그는 1950년대부터 중립국 일본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70년대 일찍이 동서냉전에 숨은 남북의 불균등 발전을 국제정치의 근본적 모순으로 봤다. 일본의 평화주의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절대화해 자국 중심이 되는 것을 그는 끊임없이 경계했다.
<br><br>몇 년 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지식인에겐 두 가지 축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현상에 대한 비판력, 또 하나는 잘못된 현상을 넘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구상하는 구상력"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본의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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