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 인생 평가하는 사람? "덴마크에선 쓰레기 취급"

조회수 2020. 10. 23. 07: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 인터비즈에서는 점심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고 싶어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분들을 모시고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12~13시) '​이시한의 점심약속 LIVE'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글 하단 링크로 들어가시면 지난 회차들의 풀영상, VOD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시한의 점심약속 16회

인간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이 확고한 신념이 만약 허상에 불과하다면 어떨까요? 이번 이시한의 점심약속에서는 행복에 대한 통찰력을 얻기 위해 서은국 연세대 교수를 모셨습니다. 서 교수는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바꾸는 이야기,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이시한의 점심약속

- 행복이라는 것이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나?


행복이라는 토픽 자체는 고대 철학자들부터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인류는 항상 행복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러나 생물학자가 세포를 분석하듯, 행복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구체적인 연구는 심리학 중에서도 성격심리학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성격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하다가 1980년대 쯤, 외향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감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행복의 어원은 행운(fortune)이다. 성격심리학자들이 연구로 밝혀내기 전까지 행복은 내가 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우연히 생기는 행운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외적인 우연 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성격적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연구자들에게 패러다임 변화를 줬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행복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 행복은 타고난다고 볼 수 있나?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뭔가를 ‘타고 난다’는 것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다. 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운동을 전혀 안 한 사람이 운동을 꾸준히 해왔던 사람보다 달리기가 빠를 수 있다. 물론 '변화'는 또 다른 문제다. 원래 선천적으로 운동을 잘하던 못하던, 두 사람 모두 노력을 하면 운동을 안했을 때보단 빨리 뛸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을 안 했을 때도 더 빨랐던 사람이, 동일한 양의 운동을 했을 때도 여전히 더 빠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을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본다.


- 행복전도사 중에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행복은 노력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봐야 하나?


두 사람의 예시를 들어보자. 한 사람은 담배를 끊고, 한 사람은 담배를 못 끊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아주 짧은 생각을 한다. 담배를 끊은 사람은 의지가 강한 사람, 담배를 못 끊은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어떤 사람은 니코틴이 뇌에 들어갔을 때 느끼는 쾌감의 정도가 17이고, 어떤 사람은 4밖에 안 될 수도 있다. 당연히 똑같은 노력을 기울였을 때 4밖에 보상이 없던 사람이 쉽게 끊을 수밖에 없다. 이런 기질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야 한다. 


노력이라는 것도 어떤 방향인지가 중요하다. 행복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안다고 해서 절대 행복해지진 않는다. 책을 읽고 방송을 듣는다고 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이 인터뷰를 보거나, 내 책을 읽는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지식 습득이 아니라, 행동과 환경을 변화시켜야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많은 일반인들에게 ‘행복’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궁극적인 삶의 목표'다. 돈을 많이 벌고,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내고... 이렇게 해야만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행복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은 우리의 오리지널한 생각이 아니다. 이런 생각의 원조는 아리스토텔레스다.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20여년 전부터 지진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가 생겼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하다. 그러나 생물학적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떤 지구상의 생명체도 정신 상태를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경우는 없다. 인간도 결국 동물이다. 우리도 정신적인 상태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의 숙제인 '생존과 유전자 재생산'을 위해 사는 것이다. 뇌는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감정은 크게 따지고 보면 두 가지밖에 없다. ‘쾌’ 아니면 ‘불쾌’ 다. 쾌와 불쾌는 뇌가 만들어내는 일종의 교통 신호다. ‘쾌’라는 감정은 긍정적이고 ‘불쾌’는 무언가를 기피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본능적으로 배가 고파서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다. 사자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도망가야 생존할 수 있다.


- 정녕 모든 쾌감이 생존을 위해 유리한 것인가?


평균적으로는 그렇지만, 변화가 빠른 현시대에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나. 호모사피엔스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굶주림을 느끼며 살아왔다.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존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 성인병을 일으킨다. 오히려 단 맛에 끌리는 마음을 막고, 건강을 신경써야 하는 시대다. 물론 단 맛에 끌리는 것이 원래부터 성인병을 일으키기 위해 생긴 것은 아니다. 한 때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했고 기능적이었던 것들이 급변하는 21세기에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 


- 인정욕구도 행복감을 느끼는 기재인가?


절대적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은 ‘쾌감을 자주 느끼고 싶다’, ‘긍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끼고 싶다’는 뜻이다. 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어떤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한가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지 역추적 할 수 있다. 


인간은 오랜 기간 동안 먹이사슬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결론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능력을 가장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했다. 인간은 여럿이 있으면 맘모스도 잡을 수 있었지만, 혼자 있으면 아무 힘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 불쾌와 쾌가 모두 생존을 위함이라면, 불쾌함을 피하는 것과 쾌를 발생시키는 것은 큰 틀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나?


이는 행복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큰 걱정이 없는 삶이 행복이다’ 라는 생각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어 살던 시대의 전근대적인 컨셉이다. '무탈하고 안정적인 삶' 이런 생각은 우리가 세끼를 못 먹던 시기에 추구하던 사고다. 지금은 잉여의 시대다.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패러다임이 완전 바뀌었다. 


우리가 이제 고민해야 할 문제는 결핍을 어떻게 없애는지가 아니라, 잉여자원을 어떻게 쓰느냐다. 불행을 없애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반드시 권태가 온다. 행복은 절대 정적으로 살면 오지 않는다. 한국은 극도의 안전 지향적 사회다. 요즘 초등학생들의 꿈이 공무원이라고 하는데 이유가 가관이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다. 행복은 무언가를 추구하고 목표 지향적으로 도전할 때 생긴다. 불행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생기지 않는다. 


- 한국과 일본은 왜 GNP 수준에 비해 불행한가?


경제적인 수준 대비 행복하지 않은 국가들이 있다. 한국, 일본, 싱가폴이 대표적이다. 이유는 위계적이고, 초집단적인 문화다. 행복하기로 유명한 덴마크를 들여다보자. 사람들은 덴마크가 사회복지시설도 잘 돼있고, GNP가 높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덴마크의 학자들은 이러한 의견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일본은 덴마크와 비슷한 수준의 GNP를 가지고 있지만 행복은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덴마크가 행복한 이유는, 개인주의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런데 그 하고 싶은 일이 집단의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 어느 쪽에 손을 들어주느냐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문화를 결정한다. 우리나라는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 생각한다. 디폴트가 집단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항상 집단보다 개인의 결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집단주의의 장점도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속도를 따라올 나라가 없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은, 개인의 자유가 없다. 개인이 뭔가를 하려고 하면 가족이 개입하고, 친구가 개입하고, 회사가 개입하고, 국가가 개입한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끊임없이 스스로 검열을 한다. 그것도 엄청 엄격하게 한다. 결국 아무것도 못한다. 개인의 심리적 자유도가 없다는 의미다. 


몇 년 전에 덴마크 학회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덴마크 사람들에게 일상에서 가장 혐오하는 인간상이 뭔지 물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한국이 왜 경제력에 비해 불행한 사회인지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사람’을 쓰레기로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이런 류의 인간을 가장 하등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아예 상종하기 싫어한다고 했다. 한국과 덴마크의 극명한 차이가 아닐까.

인터비즈 조현우 정리
inter-biz@naver.com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