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당하고 자식농사도 망한 '2인자' 황희, 19년간 영의정 지킨 비결?

조회수 2020. 3. 21.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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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문신 황희는 1363년에 태어나 90년 가까이 살았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나타내는 일화는 많다. 전해오는 것 중에는 노비의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술상을 밟아도 그저 웃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는 어느 날 세종이 황희의 집을 방문했는데 검소한 모습에 감동해 새 집을 하사했다는 구담도 전해진다. 이러한 스토리는 사실일까?사람들이 원하는 '정승의 이미지'가 황희에게 투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구전이 신화가 된 것이다. 그가 온화하고 관대했다는 것은 당시의 기록 곳곳에 등장하나,청백리라는 부분은 실제와 먼 얘기다. ☞ 뇌물, 청탁, 비리로 얼룩진 황희가 19년간 영의정으로 지낼 수 있던 비결을 알고싶다면?

황희, 온화했지만 '청렴'하진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의 '영의정부사 황희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에 보면 그는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며 청렴결백한 지조가 모자라 비판받았다. 주로 '청탁'에 관한 내용인데 <태종실록>에는 그가 “친한 사람을 추천하는 등 인사에 공정하지 못했다”고 적혀있다. 특히 좌의정으로 재임하던 세종 9년에는 ‘서달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자신의 사위 서달이 고을 아전을 죽인 사건이었다. 이를 덮기위해 해당 고을 수령에게 청탁했다가 전모가 드러나 투옥했다. 세종 12년에는 관리 소홀로 말 천 마리를 죽게 한 '태석관'의 죄를 낮추기위해 형조에게 사적인 부탁을 했다. 하지만 법을 맡은 사람과 사적으로 청탁을 행한다며 파면됐다.



황희의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의 아들도 하나같이 말썽이었다.황희에게는 4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환희와 여종 사이에서 낳은 서자 황중생이 세자궁의 재물을 훔치다 발각됐다. 조사 과정에서 황보신도 함께 재물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처벌받았다. 이어 황보신의 형인 황치신이 몰수되는 아우의 토지를 자신의 것과 바꿔치다 걸려 파면된다. 막내아들 황수신도 재산 문제로 잡음이 많았다. 그는 세조 때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뇌물이 폭주했으며 한 이랑의 밭이나 한 사람의 노복까지 탐하여 여러 번 대간의 탄핵까지 받았다"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9년간 영의정? 유배되었다 다시 돌아온 이유

그렇다면 문제 많은 황희가 어떻게 태종과 세종의 대우를 받으며 '19년'동안 영의정에 재임할 수 있었을까? 1389년 문과에 급제한 황희는 고려가 망하자 은거했다가 1394년 (태조 3년) 조선 왕조의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번 파직됐지만 이조, 병조, 형조 등 주요 부처의 실무를 두루 맡아 인정받았다. 그가 정치적으로 주목받은 건, 태종의 비서 실장인 '지신사'에 임명되고 난 후부터였다.황희는 비밀리에 태종이 지시한 일을 누설하지 않고 탁월하게 처리했다.이에 태종은 하루라도 그를 보지 못하면 반드시 그를 찾았다.


그 이후 황희는 육조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핵심 요직을 거치며 행정가로서 역량을 키웠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위기를 겪는다. 황희는 세자를 잘 타일렀지만 궁궐담을 넘고 기생을 불러 연회를 여는 등 일탈은 계속됐다. 이를 본 태종이 대노하자 필사적으로 어린 세자를 변호하다 유배됐다. 그러나 황희에 대한 태종의 마음이 아예 떠나진 않는다.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유배 보내며 노모를 모시고 스스로 이동하도록 배려했다. 황희의 죄를 묻는 교서를 내릴 때도 황희의 조카를 보내 전달했다.


4년이 지난 1422년, 상왕이었던 태종은 황희를 다시 불러들인다. 세종의 권력 승계가 안정되어 더 이상 폐세자의 추종 세력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황희를 누구보다 아끼고 그의 뛰어난 행정 능력을 믿기도 했다. 세종의 세자 책봉을 끝까지 반대한 정적이지만 오히려 관직까지 다시 줬으니, 황희의 충성이 세종에게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조정'을 잘해야 오래 살아남는다

이후 황희는 의정부 정이품 벼슬(세종 4년)에 임명됐다. 세종 6년에는 기근이 심했던 강원도에 파견됐다.그곳에서 백성 규휼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그가 임무를 마치고 떠나자 강원도 백성들이 그 공을 기려 소공대(비)를 세웠다고 한다. 

황희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31년(세종 13년), 영의정에 오른다. 영의정으로서의 황희는 조정 능력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여기서 조정의 뜻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종의 이상적인 아이디어를 현실화 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다. 세종이 새로운 제도로 기존과 다른 사업을 추진할 때 황희는 꼼꼼한 피드백을 보냈다. 새 제도가 그 자체로 실현 가능하면 좋지만, 구성원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조직에 큰 피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을 보면 황희는 새 제도에 어떤 점이 문제가 있고, 어떻게 보완할지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 그는 행정 능력과 육조의 책임자를 모두 거친 경험을 바탕으로 '실현 가능성'에 중점을 뒀다.국가의 사업이 안정적이고 매끄럽게 추진되도록 노력했다. 세종의 의견에 대한 견제와 보완을 통해, 새 정책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세종도 이런 황희 말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였다.

다음으로는 '신하들의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한다'는 의미의 조정이다. 황희는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고 차이를 좁혀 합의하는 일에 탁월했다. 영의정으로서 백관을 통솔하며 다양한 의견과 갈등을 조정했다. 이러한 황희의 능력은 세종과 신하사이 대립이 심했던 '불당' 논란에서도 빛을 발했다. 1448년 7월, 세종은 문소전 서북쪽에 불당을 건립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자 승정원과 대간, 육조, 의정부가 연이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유교를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에게 불교는 배척해야 할 이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종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 시기 세종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소진된 상태였다. 아내와 사별하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온 힘을 다하느라 두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을 직감하고 먼저 떠난 가족이 그리워 종교적 안식을 찾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세종은 더 집착했고 임금의 개인적인 바람도 들어주지 못하냐며 화를 냈다.



이 논란은 한 달 가까이 진행됐는데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자 황희가 나섰다. 86세의 고령에다 여러 병이 겹쳐 집에서 요양중이었지만 두 차례에 걸쳐 반대 상소를 올렸다. 특히 두 번째에서는 반대 의견을 개진하면서도 신하들의 단호한 태도에 섭섭해 하던 세종을 다독였다. 그리고 황희는 불당 건립에 반대해 출근을 거부한 집현전 학사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설득했다.

황희의 역할은 오늘날 재벌 2, 3세가 기업CEO를 맡는 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CEO에 오른 재벌 2, 3세들은 상대적으로 현장에 약하다. 주요 직책을 맡으며 실무 수습 기간을 거치지만, 밑바닥부터 시작한 창업자나 평사원부터 수십 년간 경험을 쌓은 사람과 차이가 난다. 따라서 '2인자'의 뒷받침은 중요하다.이 과정에서 2인자가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1인자를 가르치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오늘날의 기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1인자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조직을 위태롭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오랫동안 조직 속에서 성장한 2인자는 기존 관행에만 익숙하고 보수적이다. 반대로 CEO의 자리에 오른 젊은 리더는 현실을 모르고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이 둘 사이의 '건강한 대화'가 중요하다. 특히 2인자는 CEO의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충심 어린 견제와 보완을 통해 올바르게 보좌해야 한다.


황희는 CEO든, 2인자든 기업의 높은 위치에 오를 사람들을 어떻게 훈련하는지의 모범이 됐다. 현재를 사는 우리들과 조직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7호

필자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김준태

인터비즈 조정현 윤현종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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