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최초로 화약 발명해 일본 물리친 '이 사람'

조회수 2020. 1. 24. 11: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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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무선 과학관

[DBR/동아비즈니스리뷰] 고려 말이었던 14세기, 우리나라는 왜구의 침입이 극에 달해 고통을 받았다. 당시 왜구는 항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군대가 이를 지키게 만든 다음 근처 고을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에 왜구가 지나간 곳은 시체가 산과 들을 덮었다고 전해진다. 해전에 익숙지 않던 고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화약을 개발함으로써 고려를 왜구로부터 구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무선이다. 그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화약만이 나라를 왜구로부터 지킬 수 있다"라며 끊임없이 화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우리나라를 빛낸 과학자 28명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는 어떻게 화약을 개발했을까? DBR 30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알아보자.

한국 최초의 화약 발명 '나야 나'

고려 말, 왜구의 침공이 극에 달하자 고려는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이때까지 수백 년 동안 고려는 주로 중국과 만주, 몽골 군대와 싸워왔기 때문에 대규모 해전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물론 본래의 왜구, 즉 소규모 해적 소탕에야 풍부한 경험이 있었지만, 14세기에 고려를 침공한 왜구는 단순한 해적 수준이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정규군의 편제를 갖춘 군대를 배에 싣고 쳐들어오기도 했고, 고려 수군이 보유한 함선 전체보다 많은 전함을 끌고 습격해오기도 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사, 도쿄대 사료 편찬소
왜구도권(倭寇圖卷) 중 한 점

전술, 해전 경험, 병력 모두에서 열세에 몰린 고려는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애타게 찾게 된다. 그때 떠오른 신무기가 화약이었다. 고려군이 화약 무기의 위력을 체험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화약 무기는 중국 송나라 때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원나라 때 크게 발전했다. 1273년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이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제주도의 항파두리 성을 공격할 때, 원나라 군대는 화기를 가져와 사용했다.

다음 해 이 연합 부대는 일본 원정을 떠났는데, 이때도 원나라 군대는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 그중 하나가 도기에 화약과 쇳조각을 넣고 던져서 폭발시키는 진천뢰였다. 오늘날로 치면 수류탄과 클레이모어를 합한 셈인데, 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일본에서 그려진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도 남아 있다.

화약의 위력을 체험한 고려 정부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화약 제공을 요청했으나, 주원장은 거부했다. 상심한 고려는 화약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하지만 최무선은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화약 무기'밖에 없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화약을 제작하기 위한 노력...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출처: 최무선 과학관

그는 고려를 방문하는 중국 상인들을 수소문한 끝에 화약 제조법을 아는 이원(李元)이라는 인물을 찾아내 그 비법을 배워 화약을 만들었다. 하지만 최무선이 화약을 직접 제조한 것은 아니고, 그의 종 몇 명을 시켜 화약 제조법을 익히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화약

그는 당시 최고 의정기구였던 도평의사사로 찾아가 화약 제조술을 알아냈다고 알렸지만 다들 믿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 상황을 "도당(都堂)에 말하여 시험해 보자고 하였으나, 모두 믿지 않고 무선을 속이는 자라 하고 험담까지 하였다. "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최무선은 몇 년을 헛되이 보내야 했는데, 당시 화약 제조는 원료 조달이 너무 어려워 개인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흑색화약은 염초, 숯, 유황을 75:15:10의 비율로 섞어 제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숯의 경우에는 예나 지금이나 쉽게 구할 수 있었으며, 황은 귀했으나 적은 양이 필요했고 염초보다는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출처: 최무선 과학관

가장 많은 양이 필요한 염초(질산칼륨)을 만들기 위한 '흙'을 구하는 것이 난관이었다. 염초를 만들기 위해선 다락이나 대들보에 오랫동안 쌓인 먼지나, 처마 밑의 흙을 구해야만 했다. 이러한 흙에 존재하는 질산염과 잿물(재를 물에 풀은 물)을 섞어 끓이면 '염초(질산칼륨)'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양이 매우 적어 엄청난 양의 흙이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방식이니 염초를 제조할 때 쓰는 원료(흙)의 소비량이 엄청났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조선시대에는 염초를 제조하는데 쓰이는 흙을 수집하기 위한 취토군(取土軍)이란 병과가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이를 정부의 별다른 지원 없이 혼자 조달하려다 보니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화통도감의 탄생과 왜구 격파

출처: 유튜브 캡처

하지만 최무선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설득했고, 고려 우왕 3년 1377년에 화통도감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이곳에서는 화약 제조만이 아니라 각종 화약 무기의 제작 및 화기를 탑재할 전함의 건조와 개량 사업까지 추진했다.



이 사업은 놀랄 정도로 신속하게 진행돼 최무선은 짧은 기간에 18종이 넘는 다양한 화기를 개발해냈다. 이 무기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명칭으로 추정해보면 화포와 같은 공격 무기, 신호용 무기, 화공용 무기 등인 듯하다. 단, 이때의 화포는 지금처럼 폭발하는 포탄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화살을 날리는 포였다.

1380년 나세와 최무선은 화기를 이용해 진포에 상륙한 왜선 300척(또는 500척)을 불태운다. 이 함대는 왜구 침공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로, 그들이 수송해온 육상 부대 역시 고려의 남단을 정복하고 분할하겠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다수의 병력으로 구성된 최정예 군단이었다.

출처: 최무선 과학관

그러나 최무선의 화기 덕분에 고려는 겨우 100척의 전함으로 이 함대를 격멸할 수 있었다. 왜구의 주력군은 상륙해 이미 내륙으로 진격했고, 포구에는 선박을 지키기 위한 수비대만이 남아 있었다. 고려군이 화약 무기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왜구 수비대는 고려 함대가 다가오자 항구에 정박시킨 배를 묶어 해상 방벽을 구축했다. 자신들의 장기인 백병전으로 승부를 내려는 의도였는데, 삼국지의 적벽대전처럼 오히려 치명적인 함정이 되고 말았다.

이후 고려 수군은 해상에서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승리가 오직 화기 덕분만은 아니다. 장수부터 이름 없는 병사까지 왜구에 대항할 전술을 개발하고 노력한 총체적 결과였다. 하지만 화약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컸던 것도 사실이다. 진포 해전을 통해 최무선은 화기의 가치를 증명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출처: 최무선 과학관

쉬운 이야기 같지만,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도전이다. 많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이런 조건이 갖춰져 있다면..."라며 주어진 조건을 탓하고, 현재의 게으름을 변호한다. 하지만 노비 신분이었던 장영실은 끝없는 노력 끝에 위대한 과학자가 되었다. 최무선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집념과 의지 하나로 화약을 개발해냈다. 이처럼 진정한 도전과 자기계발의 승자는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준비하는 사람, 조건을 탓하기 전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걸 기억하자.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30호​

필자 임용한

인터비즈 김연우 장재웅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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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박성래. (1995). 최무선의 생애와 업적 ( The Choi Mu-Sun`s Life and his Achivements ). 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 2(1), 107-121.

김준수, 김지훈, 장미경. (2015). 연구논문 : 천연물을 이용한 조선시대의 염초 제조공정에 관한 연구. 화약발파, 33(2),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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