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생도 출신 '여성'이 '남성 가발' 사업에 뛰어든 이유

조회수 2020. 1. 23.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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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관생도 출신이잖아요. 남자 동기한테 너 대위인데 머리 빠져서 중령 같다, 이런 농담도 서슴없이 했죠. 그 친구가 굉장히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차 싶던 걸요. 사실 생각해보면 그 친구 머리숱 없는 거 빼곤 진짜 멋있는 친구인데 농담에 크게 주눅드는 걸 보고 생각이 많아졌어요.
80년 된 이탈리아의 한 가발가게에서 가발 장인과 제품 개발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반은정 매치 대표(왼쪽)

탈모 남성의 심리를 설명하는 여성 대표라니. 가발을 만드는 스타트업 '매치'를 이끄는 반은정 대표는 흥미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공군사관학교 사관생도 출신으로 군수장교 대위를 거쳐 20대 후반에 전역했다. 사관학교 선배들로부터 안정된 군 생활을 왜 집어치우느냐, 군 출신 나가면 할 거 없다 핀잔을 들으면서도 "사회생활 도전 해보겠다"라고 선선히 대꾸했다.



30대 초반엔 보잉 한국지사서 부품 수급 업무를 맡아서 최연소 임원으로 근무했다. 글로벌 부품 수급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고 외국어 커뮤니케이션도 적극적이어서 승진이 빨랐다. 국적, 성별이 다 핸디캡이었음에도 이룬 성취였다.

반 대표는 빠르게 승진했지만 다시 도전 욕구가 꿈틀거렸다고. 더 올라갈 자리가 보이지 않고 동기부여가 되지 않자 새롭게 도전한 게 바로 사업이었다. 왜 하필 가발이었을까? "제가 남자 심리를 좀 알죠." 반 대표가 웃으며 대답했다.

가발은 왜 20년째 모델이 안 바뀌나요?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

"제가 사관생도가 되기 전 잠시 미용실 알바도 하고 원래 미용에 관심이 많기도 했죠. 해외기업 있다보니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사람 손기술 좋다는 건 제가 알았고, 이걸로 사업 할 게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가발이라는 아이템이 눈에 띄었다. 반 대표는 군 생활과 글로벌 기업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하는 남성 전문직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탈모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이들이 부족한 머리숱을 가리기 위해 손질을 많이 하고, 의식한다는 것도 모를 수 없었다. 사관학교 동기들도 그렇거니와 머리숱 없는 거 빼곤 다 괜찮은 사람들이 머리 하나 때문에 주눅들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출처: 매치 제공
반 대표가 유럽 디지털 마케팅 전문가와 시장 전략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30대 전문직이 쓰고 싶은 가발이 없다는 게 딱 보이던걸요. 그동안 한국 가발회사에서 광고모델로 삼는 게 다 50대잖아요. 수년 째 그래요. 아니, 머리숱만 없을 뿐 진짜 내면부터 업무 능력, 열정 다 멋있는 내 친구들 쓸 가발은 없는 거야? 50대 모델이 쓰는 가발 말고 다른 모델은 없어? 젊은 느낌 없어?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멋있다는 느낌이 드는 가발을 만들어보자는 게 그녀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고객들이 브랜드를 선택할 때의 가치기준은 높아진 만큼 이를 충족할 만한 브랜드를 만들어 볼 순 없을까. 라이프스타일과 관련된 가발 브랜드는 없을까. 한 번 고민을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고객의 가치 기준이 높아지는 건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잖아요. 1등 브랜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고 사랑받는 브랜드를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출처: 매치 제공
이탈리아 현지 바버샵을 찾아 가발에 대한 시장 인식을 체크하는 반 대표.

시장조사를 해보니 흥미로웠다. 한국 가발 시장은 연 1조 5000억 원 정도로 파악되는데, 시장 선두권 업체 두 곳이 차지하는 연 매출 비중은 연간 1000억 원 수준. 대부분은 일반적인 개별 소상공인에게서 구매하는 패턴이 나왔다. 시장 3위 업체마저 뚜렷하지 않았다.



시장에 폭넓게 수요가 형성돼 있는데, 도전하는 업체가 없다니. 대부분 장인들이 혼자서 가게를 꾸려가는 경우는 많아도 규모있는 사업으로 키우려는 시도는 잘 보이지 않았다. 시장 선두 업체들은 가발 공장에서 시작한 업체들이었다.

반 대표는 가발 시장을 새롭게 해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기존에 없던 시각으로 시장을 바라보고 차별화된 가치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패션 스타트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스타트업 특유의 패기 보다는 처음부터 전문성을 중심으로 승부수를 띄웠다고.

"남자에게 머리숱은 자존심이고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여기선 한 번 외면받으면 그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시장이라고요. 저희는 그점에선 스타트업 보단 장인에 가깝게 가야한다고 봤죠. 최고의 기술자를 모으고, 최고 품질 제품으로 승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출처: 매치 제공
매치 디자이너가 모델에게 자사 제품을 적용하는 모습

반 대표는 업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영업 전문가 등을 영입하는 등 사업 시작 전부터 전문가 팀을 꾸렸다. 아예 프리미엄 전략으로 가기로 한 만큼, 최고급 소재를 쓴다는 원칙도 정했다. 중국산이나 영국산이나 별 차이 없어요, 라는 베테랑 직원 말을 듣고도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해서 최고급 소재로만 주문해서 시제품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몇가지는 제가 고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도 했지만, 제 말이 맞는 것도 있었어요. 예컨대 영국산 방직기로 짠 망은 더 촘촘해서 비싼 값을 하던걸요. 헤어도 한번도 화학 처리를 안한 '버진 헤어'를 쓰기로 했죠."

반 대표는 제품 개발 단계에선 남성 가발을 쓰고 다니면서 불편한 점이 없는지 체크했다. 머리와 가발을 연결하는 금속 핀을 플라스틱으로 바꾼 것도 이런 경험이 토대로 돼서 나온 것이다. 눌릴 때마다 아프기도 하거니와 공항 검색대에서 울릴까 걱정하는 마음도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내구성이 떨어질 거라고 안 된다는 말이 많았죠. 그래도 이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플라스틱이 얼마나 좋은데 하면서 실험해봤죠. 결국 내구성되는 플라스틱 소재를 찾았어요. 베테랑들도 이게 되네, 라며 신기해 하더라고요. 제가 업계를 잘 몰라서 남들보다 더 잘 보는 것도 있었어요. 그렇게 조화를 맞춰간 거죠"

가발이라는 명칭 대신에 패션이라는 시각에서 제품에 '헤어수트'라는 명칭을 붙였다. 기존 시장에 없던 브랜드 전략이었다.

"남들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이 더 중요" 메시지

커리어 우먼으로서 승승장구를 이어나가던 반 대표는 확신을 가지고 지난해 말 가발 분야에서 오프라인 매장을 내면서 사업을 시작했다. 시작은 쓰디쓴 실패였다. 매장을 알리기 위해 인근 백화점에 가서 전단지를 돌렸지만, 그런 식으론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만 깨달았다. 개당 150만 원 수준 고가 제품을 전단지를 보고 찾아가진 않는다는 걸 알았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길 옷가게 직원이 매일 전단지를 돌리는 모습을 본 반 대표에게 옷이라도 든든히 입으라며 마네킹에 걸어놓은 옷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도무지 이런 식으론 안 되겠다 싶었어요. 매장 하나씩 로드샵 낸다는 구상은 버렸어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죠."

출처: 매치 공식 유튜브 캡쳐
헤어수트 매치는 바버샵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알린다

애초에 로드샵 보다는 보다 영향력있는 브랜드를 만드는 게 목표였던 만큼 전략 수정도 빨랐다. 반 대표는 올해 초 마제스티라는 바버샵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알리기로 했다. 매치라는 브랜드가 만들어진 것도 이 시점이다.

바버샵 자체가 돈을 쓰는 전문직 남성 고객들을 타겟으로 하는 데다가 머리를 잘라주는 바버와 고객 간 밀착된 상담이 가능하다는 점에 착안했다. 마제스티에 제안을 했고, 마침 사업 확장을 노렸던 바버샵 역시 이에 호응했다. 이를 통해 빠르게 매장수를 청담점, DDP점 등 7개로 늘렸다.

"가발을 사러 로드샵에 들어가는 게 사실 부끄럽고 참담한 경험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프라이버시도 중요한 시장이죠. 반면 바버샵에선 조금 더 진솔한 얘기도 오가고 상담도 더 자연스럽게 이뤄지더라고요. 바버샵을 이용하는 고객은 바버의 말을 신뢰하죠. 이제야 확장이 이뤄지더군요."

출처: 매치 제공
반 대표가 유럽 패션 분야 사업 투자자들에게 매치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시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흥미로운 협업 구조 덕분이었다. 올해 2월 벤처투자사 매쉬업엔젤스에서 첫 투자를 받으면서 시장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투자금을 받자마자 제대로 된 마케팅을 하겠다며 외국인 모델을 섭외해서 광고 영상을 찍었다. 50대 광고 모델을 20, 30대 젊은 모델로 바꾸겠다는 구상을 바로 실현한 것. 고리타분한 이미지를 벗어나려면 비쥬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출처: 매치 제공
한 해외 컨설팅 업체가 한국 스타트업 설명회에 참석해 직접 매치 헤어수트 제품을 착용해보는 모습

반 대표는 앞으로 국내 시장 3위 업체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국내 시장보다는 해외 시장에서 가능성을 더 크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선해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들과의 만남을 가졌는데, 이때 가발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보고 꽤 큰 자극을 받았다고.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들이 밀라노에서 열리는 패션 관련 프로그램에 초청하기도 했다. 패션시장이 큰 유럽조차 큰 가발 브랜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무릎을 쳤다.

"가발 시장도 그동안 제조업 마인드를 못 버리고 있더라고요.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주느냐 보다는 업체들이 저마다 우리가 어떤 제품을 만들었다는 메시지에 주력했죠. 저희는 그걸 바꿔보려고 한 거예요. 남들의 잣대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춰서 스스로를 평가하라고. 그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요. 제 친구들에게도요."

인터비즈 임현석 이다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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