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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임받던 조광조가 결국 사약받은 이유는?

조회수 2020. 1. 22. 09: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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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좋은 리더라면 조직에 개혁이 필요할 때 과감히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리더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뿐 아니라 조직 내부의 저항도 견뎌내야 하기에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이때 중요한 것이 부하의 역할이다.



리더가 옳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조언하고 심리적 부담을 줄여주어야 한다. 조선시대 각각 '위훈삭제'라는 두 번의 중요한 조직 개혁 시도가 있었다. 같은 목적, 같은 명분으로 추진된 개혁이지만 하나는 실패했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다. 차이점이 무엇이었을까. DBR 238호 기사를 요약해 소개한다. 

두 번의 위훈삭제, 대조되는 결말

위훈삭제(僞勳削除)는 거짓된 공훈을 삭제한다는 것으로, 자격도 없이 공신에 봉해진 사람의 작위를 박탈한다는 의미다. 공신으로 봉해진 자들은 부와 권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조정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삭제는 이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위험한 개혁이었다. 하지만 거짓된 공훈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했고 이들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기 위한 국가의 재정 부담도 컸다.

실패로 끝나버린 조광조의 개혁

중종 때 '정국공신'은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이다. 진짜 공신도 있었지만 세력가들의 나눠먹기로 인해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들이 가짜 공신으로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뛰어난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얻고 있던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문제를 인식하고 중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출처: 채널A
중종에게 위훈삭제를 주장하는 조광조

"대저 공신을 지나치게 대우하면 공을 탐내고 이익을 탐내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모두 여기서 말미암습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먼저 이익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현재의 공신 명단은 유자광이 자기 자식과 사돈을 귀하게 하려고 만든 것이니 소인배가 꾸민 것에 불과합니다."


정국공신 선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유자광'은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본인의 일가를 공신에 포함했고 공신에 넣어달라는 청탁도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 조광조는 이 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임금인 중종은 공신을 개정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머뭇거리는 중종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결단할 수 없습니다."라며 계속 압박했다. 결국 중종은 1519년 11월 11일 떠밀리듯 정국공신을 개정하라는 교지를 내린다. 여기까지는 조광조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흘 후인 11월 15일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이 중종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에 의해 숙청되는 '기묘사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11월 21일 중종은 "대신들의 말을 듣건대 다들 개정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또 이미 오래됐으니 개정할 수 없다"라며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결국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았으며 위훈삭제 개혁의 꿈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다.

이이가 추진하고 이준경이 성공시키다

약 50년 후인 1569년 다시 한 번 위훈삭제가 조정의 이슈로 떠올랐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위사공신'이다. 이는 1546년(명종1년)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숙청했던 '을사사화' 후, 윤원형 일파가 사사로이 논공행상을 해놓고는 사직을 보위했다는 명분으로 내렸던 공신 작위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이를 문제 삼아 공론화했으며, 거짓 공훈을 삭제하는 것을 넘어 위사공신 자체를 취소하자고 주장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율곡 이이 초상

하지만 조광조의 사례에서 봤듯 위훈삭제는 쉽지 않다. 심지어 당시 이이는 단순히 거짓 공신 명단을 지우자는 것을 넘어 위사공신 자체를 문제 삼고 있었기에 그 파장은 더 컸다. 위사공신을 취소한다면 이는 곧 임금인 선조가 선왕인 명종이 내린 결정을 부정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은 조광조와 다른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다. 영의정 이준경은 이이를 비롯한 젊은 신하들의 요구를 수용하되 적절히 완급조절을 할 줄 알았다. 그는 위훈삭제가 예민한 사안인 만큼 오래 걸리더라도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분위기를 천천히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조정의 뜻은 위훈삭제를 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합쳐졌고, 결국 8년 후인 1577년 선조는 위훈삭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무엇이 운명을 갈랐나

두 번의 위훈삭제 시도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여건이 복잡하기에 한 마디로 명확하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적어도 '중종은 변덕을 부리는 왕이었고 선조는 8년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왕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조광조는 정국공신 개정을 추진할 당시 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림 세력이 요직을 맡고 있기는 했으나 여전히 공신 세력이 훨씬 더 컸고 뿌리 깊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더 조심하면서 일을 추진해야 했다. 설득을 통해 동조 세력을 확보하고 기득권의 저항을 줄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광조는 급진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였다. 여건을 따지지 않은 채 명분의 올바름만 믿고 거칠게 나아갔다. 이러한 조광조의 급진성은 중립적 위치에 있는 대신들을 멀어지게 했으며, 그를 신뢰했던 임금마저 그에게 염증을 느끼도록 만들어 결국 기묘사화를 불렀다.

출처: 채널A

위사공신 위훈삭제 또한 환경이 좋지는 않았다. 윤원형 일파가 몰락하긴 했지만 어쨌든 선왕의 결정을 무효로 만들어야 했기에 임금의 부담이 큰 사안이었다. 더욱이 선조는 공식적인 후계자 지명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기에 자칫 '정통성 없는 임금이 선왕의 결정까지 바꾸려 든다'라는 비판이 쏟아질 수 있었다.

영의정 이준경은 을사사화로 인해 본인도 고초를 겪었고 가까운 이들을 잃은 바가 있었기에 위훈삭제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갓 즉위한 왕에게 선왕의 결정을 뒤집는 부담을 줄 수 없었고, 명종비인 인순왕후가 아직 살아있어 함부로 명종의 정사에 대해 논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위훈을 삭제하는 것은 곧 상당수 대신들에게 '거짓 공신에 훈공된 자'라는 불명예를 안겨 반발을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준경은 일을 단계적으로 진행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조선시대 신하들의 의견은 왕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우선 위훈삭제를 주장하다 죽음을 맞이한 조광조에게 시호와 관작을 추증하고, 조광조의 숙청을 주도했던 남곤의 관작을 삭탈했다. 조광조의 노력이 정당했음을 밝히고 위훈삭제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그 다음으로는 임금에게 "선왕의 잘못은 그 다음의 왕이 개정해 착한 것만 이어받아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간사한 자들의 허위 훈적을 없애지 않는 것이야말로 선왕이 속임을 당했다는 부끄러움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하며 선왕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효도임을 설명했다. 몇 년에 걸친 차분한 설득과 공론의 형성 과정 덕분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사라져갔고, 이러한 노력은 1572년 이준경이 죽은 뒤에도 다른 신하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졌다.

1575년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고, 2년 뒤 1577년 인종비 인성왕후가 죽음을 앞두자 신하들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인성왕후가 죽기 전에 위훈을 속히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을사사화 당시 죽음을 당한 상당수의 신하가 명종의 선왕인 인종을 모시던 신하들인데, 인종의 부인 인성왕후가 승하하기 전에 이들의 무고한 원한을 달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은 명종의 결정을 뒤집는 것이 곧 인종에게 효를 행하는 길임을 강조했다. 명종비가 죽어 부담이 줄어든 데다 효에 대한 명분까지 생긴 선조는 결국 1577년 위훈삭제를 단행할 수 있었다. 점진적이고 꾸준한 개혁의 노력이 마침내 빛을 본 것이다.


무릇 개혁은 소수의 힘만으로 완수할 수 없다. 기득권과 대결이 필요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흔히 조직 개혁을 강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 중 하나는 대의와 도덕성을 앞세워 어젠다를 독점하고,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세력을 비판 대상으로 모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성공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배제보다 통합의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시켜 자신의 편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 최종 결정권자인 리더를 포함한 조직원들 모두가 이에 동조해줄 수 있다. 두 번의 위훈삭제에서 보듯, 개혁에 있어 명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이 조금은 오래 걸릴지라도 상황을 조성하고, 세력을 모으며, 리더가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성공적인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교훈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238호

필자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김준태

인터비즈 이태희 장재웅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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