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기술: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절대로 오늘 하지 마라

조회수 2020. 1. 19. 11:00 수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다양한 분야의 재밌고 유익한 콘텐츠를 카카오 플랫폼 곳곳에서 발견하고, 공감하고, 공유해보세요.

고등학교 때 나는 문과생이었다. 수학을 못하거나 싫어하는 학생들이 가는 문과.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이게도 문과에선 수학을 조금만 잘하면 성적을 올리기가 쉬워진다. 그래서 항상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시작할 때 수학 공부부터 해야 한다. 중요한 일부터 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매일 공부를 시작할 때가 되면 고민이 생겼다. 잠깐 다른 공부를 해서 머리를 풀고 수학을 시작하면 안될까. 자신 있는 과목부터 빨리 끝내 버리고 수학 공부를 하면 어떨까. 수학 공부가 하기 싫으니까 온갖 핑계거리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좋아하는 영어와 국어 공부를 먼저 했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수학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 그렇게 매일 나의 수학 공부 시간은 조금씩 줄어갔다. 전적으로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난 결국 삼수를 하고도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대학을 졸업하고 신문 기자가 됐다. 좋아하던 국어와 영어 공부를 매일 할 수 있게 됐다. 기자에게 언어는 무기나 다름 없으니까 국어와 영어를 좋아한 게 도움이 많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사 쓰는 게 고민이 됐다. 선배들은 쓸 기사가 많을 때는 무조건 큰 기사부터 쓰고 작은 기사는 나중에 쓰라고 가르쳤다.



큰 기사는 중요하기 때문에 차장과 부장이 손도 많이 봐야 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쓰게 되는 일도 생기곤 했다. 중요한 기사부터 쓰라는 당연한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가끔 2개 이상 써야 할 기사가 생기는 날이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작은 기사부터 썼다. 일단 쉬운 일부터 끝마치고 중요한 것에 집중을 하자는 취지였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너무도 많았다. 시험을 앞두고 책상 정리를 하다가 밤을 새서 방 전체를 정리하는가 하면 중요한 리포트를 앞두고는 꼭 집안 청소를 했다. 숙제를 하다 말고 손톱을 깎기도 한다. 회사에 큰 프로젝트가 있으면 프로젝트를 하는데 거치적거릴 만한 사소한 일부터 해치운다. 오늘 마감할 일이 있으면 밀린 e메일 답장부터 하곤 했다.

출처: 워크맨출판사 홈페이지 캡처
존 페리 교수가 쓴 '미루기의 기술'

책을 읽어보니 페리 교수는 나와 매우 비슷한 사람이었다. 그가 스탠포드대 기숙사 사감으로 있을 때 일이다. 그는 강의 준비를 하고 리포트 채점도 해야 했다. 하지만 중요한 할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기숙사에 가서 학생들과 탁구를 치거나 라운지에 앉아 신문을 읽곤 했다. 중요한 일을 미루고 논 셈이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는 교수 중 드물게 학부생들과 교류를 하는 쿨한 교수라는 평판을 얻게 된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미루던 그가 깨달은 건 중요한 일을 미루는 습관이 있는 사람들은 그 와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조금 덜 중요한 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정작 중요한 일은 하지 않지만 어떻게라도 조금씩은 뭔가를 한다는 얘기다. 이왕 할 바에는 이렇게 하게 되는 덜 중요한 일의 질을 조금 높이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런 미루기의 기술을 그는 ‘체계적인 미루기(Structured Procrastination)’라고 이름 붙였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페리 교수가 할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걸 찬양하는 건 아니다. 일을 늦게 하는 건 정말 나쁜 습관이다. 자신에도 안 좋을뿐더러 협업의 한 부분을 담당한 경우엔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일을 미루는 사람은 그 습관을 고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중요한 일을 미루는 대신 조금 덜 중요한 일들을 해내게 된다는 사실을 기쁘게 생각하라는 얘기다.

 

페리 교수는 이러한 습관을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소개했다. 한 가지는 할일 목록을 작성할 때 제일 중요한 일을 3번째 정도에 쓰는 거다. 예를 들면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집안 청소라면 1,2번에는 중국어 배우기나 1일1식 실천하기와 같이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쓰고 3번에 청소를 쓰는 거다. 그러면 1,2번이 너무 하기 싫어서 3번을 시작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할일 목록 작성하는 좋아한다면 할일을 단계별로 작게 쪼개서 작성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만약에 오늘이 마감인 글이 있다면, 1) 커피 타기 2) 책상에 앉기 3) 컴퓨터 켜기 4) 메일 체크 하지 않기 5) 웹서핑 하지 않기 6) 워드 프로그램 열기와 같이 단계적으로 중요한 일에 접근하도록 자신을 유도하라는 설명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습관적으로 미루는 사람은 안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지를. 하지만 페리 교수의 책을 읽어보면 그런 자신의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옵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럼으로써 덜 중요한 일들을 조금씩 끝낼 수 있고 자신에 대해 조금은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

미루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학자가 또 한 명 있는데, 바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심리학자인 애덤 그랜트다. 그는 책 ‘오리지널스’에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탐색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일을 미룰 때 더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미루기 효과를 '전략적 지연'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구상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독창적 생각이 완벽해질 때까지 완성을 미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을 빨리 빨리 해버리는 사람들은 어쩌면 ‘체계적인 미루기’나 ‘전략적 지연’은 미루는 버릇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루기의 달인들에겐 물에 빠졌을 때 간절한 지푸라기 일수도 있고, 한 줄기의 빛일 수도 있다.

 

(결과론적인 얘기겠지만, 고등학교 때 한 영어 공부는 지금 미국에서 사는 내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필자 김선우

약력

-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인문지리학과 졸업

- 워싱턴대(시애틀) 경영학 석사

- 동아일보 기자

- 새로운 삶을 발견하기 위해 현재 미국 시애틀 근처 시골에서 작은 농장 운영 중

- <40세에 은퇴하다> 작가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