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소증 앓았지만 '임진왜란 영웅'된 '이 사람'

조회수 2020. 1. 17. 18:0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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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1568년(선조 1년) 영의정 이준경이 선조에게 간청했다. “장차 나라에 큰 도움이 될 자가 매우 위태하니 속히 구해야 합니다.” 선조는 영의정의 말에 강삼(江蔘) 다섯 근을 내려주며 병을 치료하도록 하면서도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영의정이 다급히 청하는지 궁금해했다. 선조는 청년의 병이 낫자마자 궁으로 입궐시켜 직접 만나보았다. 청년의 이름은 이원익. 태종의 5대손 종친이라고는 하나, 얼굴은 볼품없었고 키는 매우 작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키는 3척 3촌(약 1m)이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수치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키는 아무리 크게 어림잡아도 요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키와 비슷한 수준이라 오늘날의 왜소증 장애를 앓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선조는 그를 본 후 ‘저런, 내가 강삼 닷 근만 낭비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은 청년은 훗날 위태로운 조선의 든든한 대들보가 되어 강삼 닷 근의 100배, 1000배가 넘는 공로를 쌓는다. 이원익은 88년의 인생 중 무려 70년을 관직에 복무했고 이 중 약 40년간 재상을 지냈다. 선조부터 광해군을 거쳐 인조까지… 조선왕조의 혼란기 속에서도 그가 70년이나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원문 기사 더보기

두문불출 공부벌레, '대명 외교'의 핵심이 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원익 영정

이원익은 15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고난 성격이 조용하고 사람 만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유성룡만이 이원익의 됨됨이를 알고 신임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 그는 조용히 중국어 공부에 몰두해 있었다.



당시에는 젊은 문관들을 별도로 선발해 중국어를 공부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하지만 다분히 형식적인 제도였다. 양반들의 입장에서 중국어는 중인 출신의 역관들이나 공부하는 것이었다. 양반이 중인의 일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원익은 달랐다. 그는 묵묵히 중국어를 공부했고 매 평가마다 수석을 차지했다. 이원익이 이때 익힌 중국어는 훗날 '대명 외교'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사신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명나라 군대와의 교섭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중대사를 논의하기 위한 양질의 통역관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때 이원익이 중국어 실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장수는 그를 두고 "이 사람은 한인(漢人)이 아니냐"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러한 이원익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율곡이이'다. 이이의 천거를 받은 이원익은 승진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팍팍한 민심 달래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

이원익은 안주 목사를 지내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당시 안주는 관서지역(오늘날의 평안도)의 요충지였지만 연이은 재해와 기근으로 인해 모두가 부임하기를 꺼렸던 고을이었다. 이원익은 안주로 가자마자 긴급히 구휼 곡식을 나눠주고, 군정을 개혁했으며, 백성들에게 부과됐던 잡역을 감면했다. 또한 뽕나무를 심고 누에치기를 권장해 백성들의 부대수입도 늘려주었다. 이러한 이원익의 공덕을 기려 관서지역 백성들은 뽕나무를 '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고 불렀다고 한다.

출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어가(임금이 탄 수레)행렬

안주에서 얻은 명성과 경험은 이원익이 더 큰 역량을 발휘하는데 토대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이원익에게 관서지역으로 가서 고을의 터줏대감들을 설득하여 민심을 수습하도록 명령했다.



만약 왜군이 한양 도성 근방까지 온다면 관서로 파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이원익은 어명을 받들어 징병 체찰사 신분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임금이 타던 수레로 돌이 날아올 정도로 인심이 흉흉해진 상황에서 왕이 안전하게 피신하기 위해서는 관서지역에서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이원익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원익은 직접 병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급습해 전마 80필을 빼앗는 등 전공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전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대책을 시행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오직 이원익만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조도 "우리나라에는 오직 이원익이 있을 뿐이다."라며 그의 아들과 사위에게도 관직을 하사하여 공적을 치하하였다. 이원익은 임기가 끝났는데도 계속 유임되었다. 이원익말고는 관서지역의 일을 감당해 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한 사관은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눈에 보이는 리더십'의 힘

출처: wikipedia
이원익의 초상

이식의 <택당선생별집>에 따르면 "이원익이 부임한 지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그를 부모처럼 받들어 사모하였고 이임할 때는 수레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이별을 하지 못하였으며 떠나고 나서도 송덕비를 세우고 그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대체 이원익은 어떻게 이처럼 백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을까?

이원익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그가 백성들의 고난에 늘 함께하며 고난을 이겨내도록 지원하는 일에 진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다. 전란에는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 현장에서는 직접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백성들을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했다. 이원익에게는 언제나 백성이 '최우선'이었다.

사람들은 지도자가 자신의 곁에 있을 때 믿음을 보낸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일수록 더욱 그렇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빗발치는 폭격 사이에서 보급품으로 간신히 연명했던 영국 국민들이 처칠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어야 그들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 힘을 결집시켜야 비로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이원익은 "민심이 뭉치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백성들이 합심했을 때의 힘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들의 곁에서 고난을 함께하는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원익 리더십으로 배우는 '믿을만 한 2인자'의 중요성

민심이 왕이 아닌 신하에게로 향하는 것은 자칫 왕권을 뒤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왕들은 백성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는 신하들을 의심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원익은 달랐다. 그는 매사에 전심을 다하는 신하였다. 자신의 안위보다 조선의 앞날과 백성들을 더욱 중요시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벌어지자 이원익은 80을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에도 "비록 늙고 병들어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라며 반란 진압에 자원할 정도였다. 이렇듯 그는 왕에게 '믿음'을 주는 신하였다. 민심과 왕의 신임을 동시에 등에 업은 몇 안 되는 재상이었던 것이다.


참된 힘의 원천은 그 사람이 얼마나 필요한 사람인지에 있다. 그리고 그 필요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되며 '믿음'은 모범과 실천을 통해 적립된다. 이는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1인자의 눈치를 보고 아부만 하는 2인자는 오래 갈 수 없다. 그를 대체할 만한 인물은 차고 넘친다. 2인자는 이원익처럼 청렴하고 성실하게 업무에 임하면서 기업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가장 먼저 용기 있게 나설 줄 알아야 한다.

업무능력과 조직에 대한 헌신으로 1인자에게 믿음을 주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눈에 보이는 지도자'로서 신뢰를 받는 2인자. 1인자가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기업의 이미지라면, 2인자는 구성원들에게 언제나 함께하는 리더라는 본을 보여야 한다.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 조직이라면 풍전등화의 환경에서도 위기를 극복할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71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박윤주 윤현종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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