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에 '철퇴'로 맞아 죽은 김종서, 실패한 재상이 된 이유는?

조회수 2019. 11. 12.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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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동아비즈니스리뷰] 문무를 겸비하고 용맹함이 호랑이같다하여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김종서. 그는 16세에 과거급제를 한 후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육진 개척은 물론 북방 안정을 비롯한 각종 민생안정책을 세우고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문종이 당부했던 '단종의 보호'와 '수양대군 견제'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권력 교체기의 '실패한 재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자부심이 너무 센 나머지 독선적인 행태를 보였고 스스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했다. 권한 위임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놓쳤다. 정도전의 실패와 겹치는 부분이다. 김종서의 삶을 통해 조직이나 기업에서 2인자가 갖춰야 할 태도에 대해 알아보자. DBR 159호에 소개된 내용을 요약한다. ☞원문 기사 더보기

소년 급제한 김종서, 세종의 총애 받다

1383년, 고려 우왕 9년에 태어난 김종서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큼 빠른 기록이다. 흔히 김종서 하면 백두산 호랑이라는 그의 별명처럼 장대한 체격을 가진 무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그의 체구는 작았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그는 문신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도 남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그는 집현전과 춘추관의 총책임자가 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 작업을 주도했다. 또한 유생들로부터 “학문이 경전과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도덕과 문장을 본받을 만하니 신하들의 영수요, 사림의 표준이라 할 만하다”는 칭송을 듣기도 했다.

출처: 경기문화재연구원
1452년(문종 2)에 편찬한 편년체 역사서 고려사절요

김종서는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행대감찰로 강원도에 파견돼 백성들의 기근상황을 살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충청도로 가서 수령들의 백성 구호사업 실태를 점검했다. 이어 황해도 등 각 지방의 경차관(敬差官) 업무를 차례로 수행한 것으로 보아 그의 업무능력이 세종의 합격점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세종 15년 12월9일. 세종은 김종서를 관찰사로 삼아 함길도에 파견했다. 이어 함길도의 군권을 총괄하는 도절제사로 직을 옮겨서 국경방어를 담당하게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문신이 군의 통수권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임금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대표적인 측근을 갑작스레 척박한 변방으로 보낸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는 김종서를 국경을 어지럽히는 야인을 단속하고, 북방개척을 통한 영토 확장의 숙원사업을 이뤄낼 최적임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

이후 김종서는 세종 22년 12월3일 형조판서로 제수돼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 동안이나 변방의 삭풍을 맞서며 북방을 개척하고 조선의 영토를 지켜냈다. 김종서가 중앙 조정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세종은 “앞으로 함길도의 사변과 방어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같이 의논하라” 며 그로 하여금 안보 문제에 계속 관여하도록 했다.

세종 23년 11월에는 그를 예조판서로 임명해 외교를 총괄하게 했다. 이어 세종 31년에는 우찬성 겸 판병조사로 삼았으며 “함길도 변경의 일과 왜인, 야인을 접대하는 일은 우찬성 김종서와 더불어 의논해 시행하라”고 지시한다. 이 분야의 최고책임자이자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몽고의 달달 야선이 요동에 침입해 국경에 위협이 닥치자 그는 노구를 마다하지 않고 다시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했다.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권력 교체기...연이은 실수 범한 김종서

김종서는 문종이 즉위하면서 좌찬성에 올랐고 문종 1년 10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됐다. 재상이 된 그는 북방의 상황을 점검하고 해안 경계태세를 확립하는 등 국방에 최우선의 힘을 기울인다. 당시는 명나라 황제가 몽고의 포로로 붙잡히는 등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력 교체기를 맞은 조선의 내부 또한 안보 기강을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종이 승하한다. 2년 만에 또다시 국상을 맞은 조선의 정국은 혼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보위를 노리고 있었다.


원래 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나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돼 있다. 왕이 국정을 배우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할머니나 어머니가 후견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단종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생존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후궁이었고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서 문종은 죽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 정승들을 불러 어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관상' 스틸컷

김종서는 비록 일흔의 늙은 나이였지만 자신을 알아줬던 주군 세종의 손자이자 자신에게 유명(遺命)을 내린 문종의 아들,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정을 안정시키고 신하들의 기강을 다잡았으며 안평대군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왕위를 위협하는 수양대군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런데 김종서는 재상으로서 연이은 실수를 범한다.


세종과 같은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의 재상과 살얼음판 같은 권력 공백기의 재상에게서 요구되는 자질은 엄연히 다르다. 김종서는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힘의 공백기와 치열한 권력투쟁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세종 대에는 명신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단종 대에는 실패한 재상으로 남게 된다.

실패한 재상이 된 김종서, 비참한 죽음 맞이하다

우선, 그는 자긍심이 매우 강했다. 한번은 신숙주의 능력을 칭찬하며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함길도에서, 그리고 조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독선적이고 오만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해야 마음을 놓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중요한 사명을 받아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물론 한 사람에게 업무가 집중되기 때문에 효율성은 높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리는 만기총람의 폐해는 머지않아 분명히 찾아온다. 더욱이 모든 권한과 업무가 그 사람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에 만약 그 한 사람이 쓰러진다면 조직 자체도 일거에 무너지거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출처: 네이버 영화 '관상' 스틸컷

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김종서였다. 세조는 김종서 한 사람을 제거한 것만으로 계유정난의 성공을 점쳤다. 이는 김종서의 역할이 워낙 중요했음과 동시에 그가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김종서가 자신을 도와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힘썼더라면 김종서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정변이 곧바로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종친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잘못이었다. 수양대군의 정변에는 양녕대군을 비롯해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제외한) 다른 대군들의 지지 혹은 묵인이 있었다. 세종의 형제들과 문종의 형제들이 단종의 보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이 사건을 찬성한 것이다.


당시 김종서를 위시한 집권그룹은 종친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어린 임금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종친의 활동을 제약하고자 했다. 물론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세종에 의해 이미 정국운영에 활발히 참여한 경험이 있던 대군들로서는 재상들의 독주가 불만이었을 것이다. 재상권이 강화되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안평대군 한 사람에게만 힘을 실어줬다. 다른 종친들로서는 이 또한 못마땅했을 것이다. 김종서가 종친들을 단종을 지켜주도록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적절히 다독이면서 힘을 분산해 서로가 서로를 제어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면 아마도 역사의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종서의 가장 큰 실수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김종서도 수양대군을 죽였어야 했을까. 그렇게 했으면 정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말은 쉽지만 신하로서 그렇게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무력화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김종서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단종 즉위 초기 대군과 재상들의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분경(奔競) 을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자신들을 의심하는 행위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김종서는 대군에 대한 분경 금지를 철회했다. 합법적인 세력화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또한 수양대군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수양대군의 인사 개입을 통제하지도 못했다. 수양대군의 측근을 제압하고 무력을 해체하는 등 선제적으로 대처하기는커녕 합법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놓쳐버린 것이다.


결국 1453년(단종 1년) 10월10일. 김종서는 수양대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날 밤 김종서의 집에 도착한 수양대군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읽어보실 편지가 있다며 김종서를 어두운 뜰 아래로 이끌었다. 김종서가 달빛에 비춰 편지를 읽으려는 찰나 수양대군의 가노 임어을운의 철퇴가 머리 위를 내리쳤고 그는 피를 흘리며 땅으로 쓰러졌다.


김종서가 현대 경영자와 리더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권력 교체기에 2인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2인자는 후계자가 전임 리더의 권력을 원활하게 계승하고 업무와 조직을 장악해 안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후계자가 존재하더라도 리더의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2인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진다. 치열해질 권력투쟁 속에서 아직은 유약한 새 리더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호해야 하지만 결코 독선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조직을 이끌어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권한과 업무를 독점하다 보면 새 리더를 지지하고자 했던 다른 임원들의 반감을 사서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특히 혼자서 모든 핵심 업무를 손에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


또 2인자는 조직의 경영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새 리더를 뒷받침해 줄 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조직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실력자나 주주들에게 적절한 권한을 위임하며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을 전제하면서 2인자는 반대 세력을 차근차근 무력화시켜야 한다. 자칫 성급하게 제거를 시도할 경우 유혈 충돌이 일어나 조직 전체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방치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리더의 자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나아가 조직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만다. 김종서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출처 프리미엄 경영 매거진 DBR 159호

필자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인터비즈 신혜원 임현석 정리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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