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징 패션 브랜드 만든 이 사람..엘리트 디자이너? 아니, 매장 점원 출신

조회수 2019. 11. 10. 11:0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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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누군가 '랄프 로렌스럽다'는 말을 하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92년 랄프 로렌에게 CFDA 공로상을 시상한 오드리 햅번의 말-

오드리 햅번의 말처럼 '랄프 로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아메리칸 룩'의 정석. 랄프 로렌이 1967년 설립한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은 전 세계 65개국에 진출하며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은 랄프 로렌은 디자이너로서는 유일하게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가 수여하는 다섯 개 부문의 상을 모두 수상하기도 했다. 요즘같이 유행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폴로 랄프 로렌'만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백만장자' 꿈 품은 소년,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새로운 유행 만들어

폴로(POLO) 브랜드 창시자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화려한 이력 뒤엔 불우한 과거가 있다. 그는 1939년 뉴욕 브롱크스의 가난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세 아들 중 한 명은 랍비가 되길 바랐지만 그의 관심사는 종교가 아닌 '경제적 성공'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의 성공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기념 앨범에 꿈을 '백만장자'라고 써냈을 정도다. 어린 나이부터 자수성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출처: 폴로 랄프 로렌 공식 홈페이지
젊은 시절의 랄프 로렌

그는 유대인 가문의 성인 리프시츠(Lifshitz)도 형을 따라 로렌으로 바꾸고, 미국 주류 사회에 진입하겠다는 열망도 드러냈다. 그리고 가장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명민하게 찾아냈다. 바로 패션이었다.


그가 옷을 보는 안목은 학창시절부터 남달랐다. 미국 동부 명문 사립 고등학교 학생들이 즐겨 입는 프레피 룩(preppy look) 코디를 좋아하던 그는 넉넉치 않은 형편에도 항상 잘 다린 카키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다녔다. 그는 "비싼 옷은 아닐지라도 남과 차별되게 스타일을 잘 맞춰입는 날이면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패션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17살부터 의류 브랜드 매장에서 판매원으로 일을 하며 패션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때 한 의류 매장에서 교환, 환불 업무를 맡으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패션과 싫어하는 패션을 배웠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뉴욕 시립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던 랄프 로렌은 등록금을 내기 어려운 가정형편과 학문보다 실무를 통해 경영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학교를 중퇴한다. 그는 대학 중퇴 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성 패션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의 최초의 매장인 뉴욕 메디슨 애비뉴점에서 어시스턴트 바이어로 일했다. 브룩스 브라더스를 거친 랄프 로렌은 남성 넥타이 제조업체 리베츠 앤 컴퍼니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넥타이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결국 그는 리베츠 앤 컴퍼니에서 넥타이 판매를 넘어 디자인 영역까지 발을 넓혔다. 그가 디자인한 넥타이는 당시 유행하던 폭이 좁은 회색톤의 2.5인치(약 6cm) 짜리 넥타이와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최초로 유행을 거스르고 폭 4인치(약 10cm) 짜리의 두툼하고 펑퍼짐한 디자인의 넥타이를 선보였다.

당시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넥타이 제조업체였던 보 브러멜(Beau Brummell)은 이 넥타이를 보고 랄프 로렌에게 투자를 결심한다. 보 브러멜의 도움으로 랄프 로렌은 자신이 디자인한 넥타이를 '폴로(POLO)'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폴로라는 브랜드명은 스포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추구하기 위해 유럽의 상류층이 즐겨하는 스포츠 폴로에서 차용한 것이다. 그렇게 1967년, 우리가 알고있는 폴로라는 브랜드가 시작됐다.


폴로 넥타이와 일반 넥타이의 차이점은 디자인뿐만이 아니었다. 랄프 로렌은 가격도 일반 넥타이 가격의 2배로 책정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디자인으로 상류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폴로는 '상류층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빠르게 성장했다. 유행을 깨고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 것이다.

1971년 탄생한 포니 로고...위대한 개츠비, 애니 홀 효과로 국민 브랜드 등극

넥타이로 기대밖의 성과를 이뤄낸 랄프 로렌은 1968년 브룩스 브라더스의 사장 노먼 힐튼의 지원을 받아 '폴로 패션'이라는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작은 쇼룸에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랄프 로렌은 넥타이에 그치지 않고 남성복 라인을 출시했다. 이 역시 기존의 미국 남성 의류 브랜드들과는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프레피 룩인 '아이비리그 스타일'이었다.

출처: 폴로 랄프 로렌
폴로 랄프 로렌의 프레피 룩

남성용 셔츠, 바지, 슈트 등 제작 품목을 확대하며 폴로의 인기는 점점 커져갔다. 이를 유심히 지켜본 뉴욕 대표 백화점 블루밍데일즈(Bloomingdale’s)는 폴로 바이 랄프 로렌(Polo by Ralph Lauren)의 첫 부티크를 열어줬다.


남성복 성공 후에도 폴로의 성장세는 계속 됐다. 1971년 여성복 영역에도 발을 들인 폴로는 남성용 셔츠를 여성 맞춤 사이즈로 제작한 테일러드 셔츠를 출시했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폴로의 포니 로고가 탄생한 시점이었다. 이때부터 폴로는 포니를 타고 있는 폴로 선수의 모습을 셔츠에 수놓기 시작했다. 포니 로고는 폴로가 상류층의 상징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연이은 '대박'으로 폴로의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자 수십년째 폴로라는 명칭의 옥스포드 셔츠를 생산하고 있던 브룩스 브라더스가 이의를 제기했다. 브룩스 브라더스와 상표권을 두고 법적 다툼을 벌이던 폴로는 결국 창업자의 이름을 추가한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으로 브랜드명을 바꿨다.

상승세를 타던 폴로 랄프 로렌이 미국의 '국민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데는 영화 '위대한 개츠비'와 '애니 홀'의 역할이 컸다. 지금이야 영화 '위대한 개츠비'하면 슈트를 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이미 40여 년 전에 영화화된 적이 있다. 랄프 로렌은 1976년에 개봉한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로버트 레드포드의 의상을 제작했다. 1977년 개봉한 우디 엘런 감독의 '애니 홀'에도 의상 협찬을 제공한 폴로 랄프 로렌은 두 영화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


사람들은 폴로 랄프 로렌의 의상에 '개츠비 룩', '애니 룩'이라 이름을 붙이며 열광했다. 어느 순간 폴로 랄프 로렌은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적으로 선호되는 국민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이 있듯이 랄프 로렌은 영화의 의상이 화제를 끌며 순식간의 유행을 타자 더욱 더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그는 두 영화의 의상 '모두'를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처럼 언론에 발표하지만 실제로는 일부만 담당했다. 이에 두 영화의 다른 의상 디자이너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드림케팅과 머천테인먼트의 선구자, "옷이 아닌 꿈과 라이프스타일을 팝니다"

랄프 로렌은 '드림 케팅(꿈(dream)과 마케팅(marketing)의 합성어)'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의 "나는 옷을 파는 것이 아니다. 꿈을 파는 것이다"라는 발언은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출처: pinterest

랄프 로렌은 일반 대중들이 동경하는 상류층의 패션 스타일을 보편화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는 단지 미국 상류층의 스타일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도 함께 제시했다.


그는 여유가 있는 '미국적'인 삶을 동경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자극해 폴로 랄프 로렌의 옷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삶을 즐길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이러한 점은 폴로 랄프 로렌의 광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광고에 유명 인사가 아닌 친근한 모델을 기용해 폴로 랄프 로렌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모방 욕구를 자극했다. 그가 옷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을 파는 디자이너라고도 불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그는 구매 행위를 넘어 소비자가 보고 즐기고 느낄 수 있는 머천테인먼트(merchant+entertainment)를 실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랄프 로렌은 머천테인먼트란 전 세계에 제품에 대한 스토리를 전하는 것이고, 채널별로 이야기를 창조해 제품을 라이프스타일 그 자체로 변모시키는 것이라 설명한다.

폴로 랄프 로렌은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들이 머천테인먼트를 경험할 수 있도록 내부 분위기를 호텔 로비와 같은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꾸몄다. 또한 폴로 랄프 로렌 매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고객들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교육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폴로 랄프 로렌의 마케팅 전략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소비자들을 공략하는데 성공했다. 덕분에 랄프 로렌은 자신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해낸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SPA 브랜드 공세에 주춤한 폴로 랄프 로렌...계속되는 위기, 돌파구는?

1990년대 폴로 랄프 로렌은 무서운 기세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1993년엔 폴로 스포츠와 남성복 캐주얼 라인을 런칭하고 1996년에는 홈 컬렉션으로 페인트와 벽지를 출시하는 등 분야를 막론하고 영역을 넓혀갔다.


승승장구하던 폴로 랄프 로렌은 오히려 1997년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직후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상장 당시 33달러(한화 약 3만8000원)였던 주가는 상장 이후 16달러(한화 약 1만8000원)까지 떨어졌다. 1998년 클럽 모나코(Club Monaco)를 5200만 달러(한화 약 600억 원)에 인수하는 과정에서 빚은 늘어갔고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실제로 랄프 로렌은 "30년 동안 매우 성공적으로 회사를 경영했지만 상장 이후 직면한 새로운 게임은 내가 몰랐던 새로운 세계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해결책으로 2000년 로저 파라를 폴로 랄프 로렌의 새로운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영입하고 새로운 전략을 취하기 시작했다. 유통채널과 공급망 등을 대대적으로 손보고 고가의 제품은 일부 백화점에서만 판매하는 고급화 전략도 구사했다.

출처: pinterest
스테판 라르손(좌)과 랄프 로렌(우)의 모습

이들의 노력 덕에 폴로 랄프 로렌의 순이익은 2002년 1억 7250만 달러(한화 약 1995억 원)에서 2007년 4억 90만 달러(한화 약 4637억 원)으로 반등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성비를 앞세운 SPA 브랜드들의 공세에 다시 실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랄프 로렌은 2015년 48년동안 지켜온 CEO 직위를 내려놓고 H&M에서 12년간 일한 경험이 있는 SPA 전문가 스테판 라르손을 후임 CEO로 임명했다.


그러나 랄프 로렌의 입김은 여전히 강하게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테판 라르손도 패스트패션 사업모델 도입 등을 놓고 랄프 로렌과 마찰을 빚다가 2017년 사임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패스트패션으로 전환엔 차질을 빚었지만, 되레 최근엔 정통 아메리칸 클래식이 부활하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 살아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7년부터 회사를 맡은 패트리스 루비트 랄프로렌 CEO는 중국 등 신흥국 시장에서 기회를 찾겠다는 생각이다.

한국서도 부침 격어...뉴트로 열풍 타고 부활 조짐도

랄프로렌은 한국서도 정통 미국 클래식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브랜드였다. 특히 1985년 두산이 판권을 사들여 정식으로 유통하면서 남성복 시장에서 매스티지(Masstige-중산층을 겨냥한 중저가 명품) 포지셔닝을 해낸 브랜드였다. 국내 주요 남성복 캐주얼 브랜드복 매장에서 느낄 수 있는 '미국풍'의 원형격으로 여겨진다. 빈폴이나 해지스 등 국내 남성 캐주얼 브랜드들이 런칭할 때 어떤 식으로든 의식하거나 참고할 수밖에 없는 브랜드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들어 국내서도 SPA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위상이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해외 직접구매가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브랜드 가치 유지에도 애를 먹었다. 마침 소비재산업 비중을 낮춰가던 두산은 랄프 로렌과 결별했다. 랄프 로렌도 마침 글로벌 차원에서 직영 정책을 펴던 때라 두산과 결별 후 국내 시장에 직진출했지만, 결과적으로 국내 시장에서 쌓아온 노하우가 무너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긴 침체기에 들어야 했다. 두산이 유통할 때만 해도 주요 백화점 남성 트레디셔널 캐주얼 브랜드 중 점유율 20% 언저리를 유지해며 부동의 1위 업체였지만, 이후 3년새 점유율이 10% 가까이 빠지면서 해당 부문 선두를 빈폴에게 내줘야 했다. 폴로랄프로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에서 삼촌이 입던 옷으로 변했다.​

그러나 최근 반전의 조짐이 보인다. 예전 것을 멋있다고 여기는 복고 바람, 즉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어서다. 랄프로렌을 복고 상징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해외서 먼저 나왔다. 미국서 1990년대 폴로옷만 입는 흑인 갱단을 의미하는 '폴로갱'이 복고 키워드로 떠올랐다. 거리의 삶을 살면서도 비싼 폴로 옷을 입는다는 독특한 감성이 복고의 대상이 된 것이다. 국내서도 비슷한 감성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패션들이 나오면서 다시 주목도가 높아졌다. 랄프로렌이 스트리트 패션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보인다. 즉, 새로운 해석이 반영된 복고다. 패션업계에서 랄프로렌을 두고 새로운 레트로, 뉴트로의 정석이라고 부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인터비즈 임현석 신혜원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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