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도 "PPT 만들지 마세요", 'PPT의 시대' 저무나?

조회수 2019. 11. 5.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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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재나 보고를 할 때 마주 앉아서 한 장 한 장 설명하는 건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메일 보낼 때도 PPT(PowerPoint)는 굳이 첨부하지 마세요.

지난달 22일 현대차그룹 본사에서 진행된 임직원과의 타운홀 미팅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율복장 근무제', '직급 파괴' 등을 시행하며 평소 조직 혁신에 앞장서던 정 수석부회장이 이번엔 'PPT 남용'을 꼬집었다. 정 부회장은 보고 메일을 읽고 첨부된 PPT를 확인하면 똑같은 내용이 반복된다며 "포인트 몇 줄만 적어도 뜻만 잘 전달되면 괜찮다"고 강조했다.



경영 전면에 나선 후 새롭게 조직문화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는 정 수석 부회장의 '제로(zero) PPT' 발언에 여타 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할 것으로 보인다. 한때 중요한 발표에 빠져서는 안 될 필수 자료로 꼽히던 'PPT의 시대'는 지고 있는걸까.

국내서는 현대카드가 첫 출발...두산, 아모레퍼시픽, KB국민은행 등도 줄줄이 동참

'제로 PPT'를 표방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은 비단 현대차그룹뿐만이 아니다. 제로 PPT의 첫 스타트를 끊었던 국내 기업은 현대카드였다. 지난 2014년 현대카드는 정태영 부회장의 지시 아래 '제로 PPT 캠페인'을 한달간 시행했다. 이는 외형보다 본질에 집중하자는 정 부회장의 신념이 담긴 캠페인으로 한 달간 부서별로 돌아가며 사내 PPT 사용을 금지했다.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현대카드는 PPT를 워드 38%, 엑셀 35%, 이메일 19%의 비중으로 대체했다. 캠페인이 끝난 후,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전직원의 78%가 '제로 PPT 캠페인으로 사내문화가 바뀔 것이라 본다'고 답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발성 캠페인에 그쳐 사내문화로 자리잡기엔 역부족이었다.


2016년 3월 정 부회장은 다시 한 번 PPT 금지령을 내렸다. 이번엔 지난 제로 PPT 캠페인때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모든 보고서를 PPT 대신 자필 혹은 엑셀로 간단히 만들라고 지시했다. 정 부회장은 "과거엔 자율적인 PPT 자제를 추구했지만 항상 원점으로 돌아왔다"며 "PPT를 쓰면 편하고 효과적인 보고서가 일부 있지만 결국 남발되고 말기에 모든 직원의 프로그램을 읽기전용(read only)로 하는 차선책을 택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산그룹 역시 국내 기업의 제로 PPT 문화 정착에 힘을 보탰다. 지난해 하반기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은 업무 방식의 선진화를 강조하며 'PPT 제로'를 선언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효율적인 보고 방식으로 더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겠다는 취지에서다. 이어 아모레퍼시픽도 올해부터 '캐주얼 보고 습관화', '보고 문서 간소화' 등을 앞세워 사내에서 획일적인 PPT 양식 대신 2장짜리 '워드 보고'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제로 PPT 유행은 은행권에도 퍼졌다. KB국민은행은 보고서 작성에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올 6월부터 전 본부의 PPT 사용을 금지했다. 국내 은행권 중 '제로 PPT'를 실행한 곳은 KB국민은행이 최초다. 같은 그룹 계열사인 KB국민카드도 업무용 PC에서 PPT 프로그램을 삭제하고 사용이 불가피한 경우엔 사전 승인을 통해 PPT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NO PPT" 외치고 있던 세계적 기업들

이렇게 국내 대기업들이 '제로 PPT'에 동참하는 것은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영향이 크다.


국내에 제로 PPT 유행이 퍼지기 한참 전부터 '노(NO) PPT'를 외친 대표적인 인물은 글로벌 IT 기업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다. 그는 아이디어를 전달할 때 PPT의 슬라이드는 불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아는 사람들은 파워포인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People who know what they're talking about don't need PowerPoint)"라고 밝히며 PPT의 비효율성을 강조했다. 그가 암 투병중일때 담당 의사가 PPT로 병세를 설명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아마존 설립자 겸 CEO 제프 베조스 역시 예전부터 PPT 없는 보고를 추구해왔다. 아마존은 PPT 대신 '내러티브 메모(Narrative Memos)'를 활용한 독톡한 회의 방식으로 유명하다. 내러티브 메모는 아이디어나 의견이 담긴 6쪽 분량의 줄글로 직원들은 회의 시작 30분 전 이를 읽으며 자신의 의견을 정리한다. PPT를 사용한 일방적인 발표보다 이처럼 직원 모두가 함께 읽는 것이 오히려 회의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제프 베조스의 철학이 담긴 방식이다.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도 "사내에서 나에게 보고할때만큼은 시간이 드는 PPT 대신 어떤 형식으로든 내용이 충실한 보고를 해달라"고 말하며 PPT 보고를 금지했다.

과연 실효성은? '제로 PPT로 업무생산성 증대' VS '적재적소에 PPT 활용하는게 더 효율적'

국내외 기업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제로 PPT의 주목적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이고 보고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PPT는 시각적 요소의 비중이 큰 프로그램이다보니 깔끔하고 '예쁜'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과하게 시간을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점을 방지하기 위해 제로 PPT를 실천해 정작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무제 또한 국내 기업들의 제로 PPT 열풍을 이끈 결정적 요인이다. 효율적인 근무 시간 활용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전후로 회의 시간을 줄이고자 제로 PPT에 동참하는 기업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과연 제로 PPT를 행하고 있는 대다수 기업들의 말처럼 PPT 보고를 없애는 것이 효율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많다. 이들은 과하게 그래픽이나 디자인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PPT가 유용한 도구로서 작용할 수 있는 회의도 많다고 말한다. 임원진의 의사결정 회의 등에선 PPT로 간결하게 요점을 정리해 전달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PPT를 활용한 보고서 작성에 시간이 많이 드는 원인이 PPT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PPT를 사용하는 주체에 있다고 본다. 한국 기업들이 글꼴, 색상, 템플릿 등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는 형식주의를 탈피하지 못해 비효율성이 증대된다는 것이다.


박영렬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정된 자원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낭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업들이 혁신 방안으로 제로 PPT를 내놓는 것"이라 밝히며 "제로 PPT가 올바른 방향인 것은 맞지만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선 윗 사람을 비롯해 회의에 참여하는 이들의 철저한 보고 내용 숙지가 선행돼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비즈 임현석 신혜원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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